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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떼는 말이야~’전통의 전달(마가복음 7:18-20)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 승인 2021.06.27 00:21
▲ 전통과 권위가 혼동되는 사회에서 어느새 전통은 꼰대가 되어 버렸다. ⓒGetty Image
1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도 이렇게 깨달음이 없느냐 무엇이든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함을 알지 못하느냐. 19 이는 마음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배로 들어가 뒤로 나감이라. 이러므로 모든 음식물을 깨끗하다 하시니라 20 또 이르시되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오늘 저희가 함께 생각해볼 말씀은 부정한 음식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15장에도 같은 말씀이 나타나기는 합니다만, 마태복음은 마가복음에 나타난 말씀을 더 각색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마가복음의 말씀으로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마가복음 7장 1-23절의 말씀은 예수님과 바리새인의 논쟁이라는 하나의 이야기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최소 두 가지 이상의 말씀이 섞인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부정한 손으로 음식을 먹었다는 점에 대한 논쟁과 바리새인들의 전통 중 하나인 ‘고르반’에 대한 예수님의 질책입니다. 17절 이후에 나타난 반복된 설명 구절은 마가복음을 기록한 교회가 교회 구성원들을 위해 첨가해 놓은 구절로 보입니다. 마태복음은 이 부분에서 악행 목록을 십계명의 순서대로 재구성하면서 계명과 전통 사이의 논쟁이라는 완성도를 높이고 있습니다.

간단하게 상황을 정리해보자면,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님에게 온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식사를 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코로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이 보았을 때, 제자들의 모습은 분명히 위생적이지 않습니다.

14세기 흑사병이 유럽을 휩쓸었을 시기, 엄청나게 많은 유럽인이 죽어갔지만, 유대인들은 비율적으로 적게 죽었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이 너무 죽지 않았기 때문인지, 유대인에 대한 악감정이 본래부터 심했기 때문인지 당시 유대인 학살이 자행되기도 했습니다. 최근 병리학자들은 유대인들의 손 씻는 전통이 흑사병을 막아주었다고 추정합니다.

이런 점을 생각한다면 유대인의 손 씻는 전통은 위생적인 측면에서 나쁜 행위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당시 바리새인들이 지적했던 점, 예수님께서 비판하고 계시는 점은 위생적인 측면의 손 씻기가 아닙니다. 마가복음은 이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 2절에서 ‘손’ 앞에 ‘부정한(코이노스, κοινός)’이라는 단어를 붙여놓았습니다. 이는 구약성경의 정결법과도 연결되어 만들어진 전통인데, 본래는 제사장들이 제사를 드리기 전에 손과 발을 씻는 법에서 확대된 전통입니다. 아마도 하나님께서 주신 음식을 먹을 때 신체를 거룩하게 하고 먹는다는 개념으로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여기에서 약간 애매한 부분이 있습니다. 당시 정결을 강조하던 에쎄네파는 이를 철저하게 지켰고, 바리새인 중에도 식전에 손을 꼭 씻어야 한다고 강조하던 이들이 있었습니다. 2세기의 유명한 랍비 아키바는 로마 감옥에 갇혔을 때,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느니 굶는 것이 낫다고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런데 이런 전통을 지키는 일이 일반적이진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일반적인 유대인들은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전통이 널리 퍼지길 바랐겠지만, 일단 예수님과 제자들은 바리새인이 아니기 때문에 이를 지적할 이유가 없습니다. 일부 장로들의 전통은 본문 3절에 나타난 바와 같이 ‘모든 유대인’이 지켜야 할 의무가 없었습니다.

복음서는 기본적으로 바리새인과 예수님이 대립관계에 있다는 전제를 두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과 바리새인들은 항상 싸우거나 논쟁을 했다고 전합니다. 하지만 저는 오늘 본문의 실제 상황에서 바리새인들이 제자들의 행동을 지적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런 전통에 대해 예수님의 견해는 무엇인지 단순하게 질문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그렇게 본다면, 이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한 사람의 랍비로 대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이런 바리새인들을 향한 예수님의 대답은 아마도 15-16절의 말씀으로 보입니다. “사람에게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는 말씀입니다. 정결함, 거룩함이란 무엇을 먹는지에 달린 것이 아니라 자신을 어떻게 표출하는지에 달려있다는 말씀입니다. 정결법의 본질을 설명하신 것입니다.

19절 마지막에 붙어있는 ‘모든 음식물은 깨끗하다’라는 말은 마가복음의 첨가문으로 보입니다. 이는 아마도 당시 마가복음 공동체가 가지고 있던 상황을 반영해서 첨가되었을 것인데, 그 상황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판단하기는 어렵습니다. 어쩌면 고린도전서 8장에 나타난 상황과 마찬가지로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어도 되는가?’와 같은 문제가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마가복음은 이런 기본 이야기에 한 가지 이야기를 더 첨가합니다. 부모 공경에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본문 11절을 보면, ‘고르반’이라는 말이 나타납니다. 이는 히브리어로 ‘제물’을 의미하는 ‘까르반(קרבן)’이 헬라어로 바뀐 것인데, 예수님께서 활동하시던 시기에는 ‘제물’이라는 의미를 넘어서 ‘서원’이라는 의미로도 사용되었습니다.

당시 ‘고르반’이라는 전통이 무엇인지는 대충 보셔도 아실텐데, 간단하게 설명드리겠습니다.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부모를 봉양해야 하는 의무를 갖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어떤 사람이 자신의 재산은 모두 하나님께 바칠 것이라고 서원한다면, 그 사람의 재산은 모두 하나님의 것이 되기 때문에 부모 봉양의 의무를 갖지 않게 된다고 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널리 퍼져있는 전통인지는 불명확합니다. 다만 이 전통이 생겨난 이유는 민수기 30장에 나타난 서원에 관한 율법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서원을 지키지 않았을 때에 관한 규정이 없다는 점입니다. 자신의 재산을 하나님께 바친다고 서원한 후에 그것을 바치지 않았다고 해도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이런 행위가 일반적으로 일어났다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다만 부모와의 갈등이 있는 사람 중에서는 이런 방식으로 부모와 단절을 선언하는 이들이 있던 것으로 보이고, 이들이 당당하게 부모와 단절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고르반’이었습니다.

종종 말씀드리지만, 바리새인들은 그렇게 나쁜 사람들은 아닙니다. 그들이 보았을 때도 ‘고르반’이라는 전통은 상당히 잘못된 전통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의 문서인 미쉬나를 보면, ‘고르반’이 잘못된 전통이라고 비판하며 이를 폐지합니다. 미쉬나에서 ‘고르반’ 폐지를 선언한 시점이 언제인지 분명하진 않지만, 예수님이 활동하시던 시절에는 이에 관한 논쟁이 일어나고 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과 상관없이 누군가 ‘고르반’에 대한 예수님의 생각을 여쭈어보았을 수도 있고, 부모 공경에 관해서 설명하시다가 ‘고르반’에 관해 말씀하셨을 수도 있다고 봅니다. 한 가지 중요한 부분은 예수님께서 ‘고르반’에 대해 지적하시면서 질책하는 대상은 그런 일을 행하는 사람들보다는 그런 전통 자체를 만들어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었다는 점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두 가지 바리새인들의 전통에 관한 이야기가 나타납니다. 손 씻는 전통과 ‘고르반’ 전통입니다. 손 씻는 전통은 그 행위 자체가 잘못되지는 않았지만, 본질적인 의미가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반면에 ‘고르반’ 전통은 그런 전통이 생겨난 것 자체가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일이며 잘못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말씀을 해석하는 사람들을 향한 예수님의 지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말씀을 해석해서 삶에 적용시킬 때에 그 본질적인 의미를 잊으면 안 된다는 말씀이고, 잘못된 해석과 적용은 오히려 하나님의 계명을 깨뜨릴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말씀 해석하는 사람을 꼭 목회자로 한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목회자에 한정될 말씀이라면 복음서에 이렇게까지 적어놓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합니다. 성도님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들으면서 해석합니다. 우리 삶에 맞춰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를 생각하시기도 할 것입니다. 그런 순간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의 본질을 놓치고 있지는 않은지, 혹시 내가 적용하고 있는 모습이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깨뜨리고 있지는 않은지를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생각했으면 하는 점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후반부는 말과 마음이라는 주제로 집중됩니다. 이는 마가복음이 자신의 공동체에게 주는 지침이었을 것입니다. 마음의 악함은 우리의 입을 통해 표출되기 때문에 마음을 정결하게 하고 말을 조심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줍니다.

전통에 관한 이야기와 말에 관한 이야기를 보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꼰대’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꼰대’라는 말을 못 들어 보신 분은 없으실 겁니다. ‘꼰대’의 특징이 뭐냐고 묻는다면 대부분 “라떼는 말야~”라는 말을 떠올리시게 될 겁니다. 사실 ‘우리 때는 이랬다’라는 말들은 나이가 있는 사람이 자기보다 젊은 사람에게 자신의 경험을 전달하는 방식입니다. 경험을 전달하는 일은 노하우를 전하는 일이고 이는 일을 원활하게 진행할 수 있는 전통이 되어갈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시대에 이런 경험의 전달은 ‘꼰대’가 하는 소리로 치부 받습니다. 그 말의 내용과 상관없이 ‘나 때는’으로 시작되는 말은 ‘꼰대’의 소리가 되어버렸습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이런 말들이 노하우 전수를 위한 경험의 전달이 아니라 ‘경험 많은 내가 봤을 때 넌 틀렸어’라는 지적의 말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경험을 전하는 일은 중요합니다. 자신의 경험을 전하며 젊은 사람이 잘못된 길에 들어서지 않도록 이끄는 일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 말에 어떤 마음이 담겨 있는가에 따라 그 말은 누군가를 단순히 지적하고 틀렸다고 질타하는 말이 되어버립니다. 경험을 전하여 좋은 방향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그저 한 귀로 흘려버릴 훈계가 되어버립니다. 아마도 우리 사회에서 ‘나 때는 말야’로 시작되는 이야기들이 대부분 질책과 훈계에 그쳤기 때문에 지금에 와서는 ‘꼰대’의 표현으로 정착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말을 내뱉는 우리의 마음이 잘못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서를 읽으면서 장로들의 전통에 대해 안 좋은 이미지를 갖게 되지만, 전통은 꼭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손 씻는 전통이 흑사병으로부터 유대인들을 보호할 수 있었듯이 잘 지킨다면 우리의 삶에 도움을 주는 전통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왜 전달하는가? 이런 전통이 생겨난 본질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이 전통 자체가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하면서 진정 누군가를 생각하는 마음을 품고 올바른 말로 전달한다면, 우리는 다음 세대들에게 더 좋은 길을 제시할 수 있고 좋은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그리스도교 전통에 대해서도 그렇게 전해가야 할 것이고 세상의 경험들 또한 그렇게 전해가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해 나간다면 젊은 사람들과 연장자들 사이가 단절된 지금 사회 속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 중간 다리를 만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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