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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되고 싶은가, 백성들의 종이 되라첫째와 끝이 만나는 곳(열왕기상 12,1-7; 마가복음 9,33-37)
김상기 목사(백합교회) | 승인 2021.08.05 16:38
▲ Hans Holbein the Younger, 「Rehoboam’s Insolence」 (1530) ⓒGetty Image

지금은 올림픽 계절입니다. 코로나19 위기에도 관중 없는 올림픽이란 전례 없는 기록을 세우며 강행된 올림픽입니다. 그렇게 된 데에는 경제적 계산이 작용했겠지만, 어쩌면 그것이 비대면이 일상화되는 미래의 새로운 축제 형식이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분명 그것은 비극일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서도 변함없는 것은 우승에 대한 열망입니다. 이를 부채질하는 것은 아마도 2등은 기억되지 않는다는 말 속에 들어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축제를 부정하는 것 아닐까요? 우승이 값진 것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우승 자체가 모두의 유일한 목적이면 축제는 더 이상 없습니다. 우승 이외에 또 다른 것이 있어야 올림픽이라는 말에 어울리는 것 아닐까요? 축제를 가능케 하는 것은 우승보다 더 아름다운 참여입니다. 갈등과 대립을 넘어 연대와 평화의 꿈을 실현시키는 장이 되고자 했던 올림픽입니다.

그 꿈은 하나님 나라의 꿈과 닮았습니다. 이 나라에서 첫째는 어떻게 인식되고 어떻게 가능할까요? 열왕기상의 본문은 현실정치적인 이야기지만 거기에는 우리의 관심이 되는 놀라운 통찰이 담겨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강국을 지향하는 솔로몬의 강압적 정치로 남북분열의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의 뒤를 이은 르호보암이 즉위식을 하러 세겜에 갔을 때였습니다. 이스라엘 회중은 솔로몬의 탄압을 피해 이집트로 피난 간 여로보암을 불러들이고 함께 르호보암에게 왔습니다. 그들은 솔로몬이 그들에게 부과했던 무거운 멍에를 가볍게 해주면 그를 왕으로 섬기겠다고 제안합니다. 이것은 당시 이스라엘이 아직 군주국가로 완전히 자리 잡지 못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왕권을 포함해 모든 국가의 권력이 본질적으로 백성과의 계약에 의거해 위임받은 것임을 보여줍니다. 불행하게도 분명한 이 사실이 지금도 제대로 인식되고 인정되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르호보암으로서는 즉각 답하기 어려운 문제였기에 3일 후에 다시 만나 이야기하기로 했습니다. 과연 그는 어떤 선택을 할까요? 그는 솔로몬 왕정의 대신들과 상의하였습니다. 그들의 답변은 솔로몬의 지혜보다 더 지혜로웠습니다.

“(왕께서) 이 백성의 종이 되어 그들을 섬기고 그들에게 대답하며 그들에게 좋은 말을 하시면, 그들은 평생 왕의 종이 될 것입니다.”

왕이 백성의 종이 된다는 생각이 우선 놀랍지 않습니까? 군림하는 자의 길을 걸었던 솔로몬을 그의 대신들이 부정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솔로몬 생전에 어떻게 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정치의 바른 길을 제시하고 있으니 늦은 것은 아닙니다. 다시 백성이 주권자임을 인정하는 그들입니다.

왕은 백성에게서 권력을 위임받은 백성의 종입니다. 르호보암이 이 해법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군림하는 솔로몬의 모습을 보고 자란 그입니다. 여기서 좋은 말이란 듣기 좋은 립서비스가 아닙니다. 그들의 요구를 수용하고 그에 맞는 정책을 세우고 시행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는 이렇게 하는 것이 왕의 권력과 권위를 포기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느꼈을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대신들이 말하는 그 결과에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그들의 요구를 수용하면, 백성들은 자발적으로 그의 종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백성들의 요구를 수용할 수 없었습니다.

왕이 백성의 종이 되면, 백성이 스스로 그의 종이 될 것이다. 종이라는 말이 귀에 거슬릴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종복(從僕)이라는 정치권에서 자주 사용되고 있습니다. 왕이 백성의 종이라는 것은 왕이 백성에게서 권한을 위임받은 자이고 백성이 주권자임을 인정하는 것 그 이상의 말이 아닙니다.

이것이 현대정치의 기본상식이 된 지 오래이지만, 실제로 잘 지켜지지 않는 경우들이 많은데, 그 당시는 더 말할 것이 없었을 것입니다. 백성은 왕이 그 사실을 인정하면 그들이 왕에게 부여한 권력에 자발적으로 복종할 것입니다. 이것은 최고 권력자가 자기를 백성의 끝에 둠으로써 첫째가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왕과 백성의 이러한 관계는 참으로 이상적이고 국가가 존재하는 한 아마도 영원한 이상일 것입니다.

첫째가 되는 것은 올림픽에서의 우승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의 중요한 관심사입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제자들은 자기들 가운데서 누가 큰가를 놓고 서로 이야기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특별한 사람들이 없습니다. 지극히 평범하고 다 고만고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본래 그들은 평등한 관계였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숫자도 얼마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그 가운데서 누가 더 클까를 따지니 그것은 사람의 자연스런 욕심 내지 현상일까요?

그런데 예수께서는 이 자연스러움을 자연스럽지 않은 것으로 만드십니다. 뭇사람이란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이 속해 있는 집단의 사람들로 이해됩니다. 그 가운데서 첫째가 되려고 하느냐? 그러면 그는 그 사람들의 끝이 되어야 하고 그들을 섬기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솔로몬의 대신들이 르호보암에게 대답했던 것과 실질적으로 동일한 내용의 말입니다. 보다 일반화된 표현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자그마한 동아리부터 국가에 이르기까지 집단의 크기는 다양하겠지만, 그 원칙은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우리는 세상의 원칙과 다른 이 원칙을 따를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어떤 사람은 이를 비상식적인 것으로 여기고 그러한 사람을 오히려 우습게 여기고 조롱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그 원칙은 변함이 없고 실제로도 무의미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를 예로 보여주십니다.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제자들 가운데 세우시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왜 아이일까요? 아이들은 소중한 존재이지만, 많은 경우 어른들에게 무시당하기도 하며, 어른들이 있는 자리에서 내보내지기도 합니다. 어리다는 사실에만 초점을 맞추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바로 그런 아이를 주님의 이름으로 받아들일 것을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는 아이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불리는 아이입니다. 그에게서 주님을 보라고 하십니다. 그를 주님을 맞듯 맞으라고 하십니다. 아이에게서 사람들이 주목하는 어리다는 것은 완전히 뒤로 물러났습니다. 그 자리를 주님의 이름이 대신했습니다.

아이는 통상적으로 집단의 끝에 위치합니다. 바로 그 끝을 주님의 이름으로 맞을 수 있다면, 나머지 모든 사람들도 그리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것이 예수께서 아이를 제자들 가운데 세우신 이유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주님을 맞는 것과 같고 더 나아가 하나님을 맞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첫째가 되는 것은 세상의 어떤 원리를 따라서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원리에 의한 것입니다. 아이를 통해 하나님을 맞는 것이 첫째가 되는 길입니다.

하나님에게는 작은 자가 없습니다. 첫째가 되는 단 하나의 사람도 없습니다. 하나님에게는 그렇게 모두의 종이 되어 모두를 섬기는 것이 첫째가 되는 조건이기에 누구나 동시에 첫째가 될 수 있습니다. 첫째와 끝이 이렇게 서로 만납니다.

그런 세상의 아름다움을 우리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 세상을 우리는 우리 가운데 이루어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맞이하고 하나님이 그 가운데 주님으로 계시는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그 지혜는 끝과 첫째를 하나로 만들며 모두가 행복한 세상이 되게 할 것입니다. 끝에 서서 섬길 수 있는 우리가 되고 하나님과 사람 보기에 첫째가 되기를 빕니다.

김상기 목사(백합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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