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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부스러기는 누구의 것입니까?2021 NCCK신학위 <사건과 신학> 7월호 ⑷
한수현(감리교신학대학교) | 승인 2021.08.24 21:36
▲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농사를 짓고 곡식을 거둘 때에 나그네와 과부,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밭모퉁이에는 추수도 하지도 말고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Getty Image

나이 서른에 우린 어디에 있을까.
어느 곳에 어떤 얼굴로 서 있을까.
나이 서른에 우린 무엇을 사랑하게 될까.
젊은 날의 높은 꿈이 부끄럽진 않을까.
우리들의 노래와 우리들의 숨결이 나이 서른엔 어떤 뜻을 지닐까.
- “나이 서른에 우린 어디에 있을까” (노래 마을)

필자가 20대의 대학생일 때, 가끔 위의 노래를 부르곤 했다. 그때의 노래를 부르던 마음은 아마도 나이가 서른이 될 때쯤엔 20대에 가지고 있었던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부담감은 사라지고, 나이 서른쯤엔 무엇이든 되어 있지 않을까, 가능하면 안정된 상황이라면 좋겠다던 마음이었다. 그러나 서른이 되어서도 큰 변화는 없었다. 20대 후반이면 결혼을 해야 한다던 여러 사회의 통념들이 무너지던 시대였고 결혼은 선택이라고 말하던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한 상식들이 무너지면서 대학원은 기본, 나이 서른이 되어 특정한 직장이 없어도 그저 젊음의 불안감이 이어질 뿐, 이에 크게 손가락질하는 사람들도 없었다.

따지고 보면 ‘서태지와 아이들’의 노래를 들으며 중·고등학교를 보낸 우리들을 사람들은 엑스세대라고 불렀고, 그 특징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발랄함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1997년의 IMF를 넘어서면서 좋은 직업을 가지는 것은 하늘에 별 따기라는 말이 유행되었고, 아웃소싱을 통한 계약직 직장들이 늘어나면서 1~2년 직장생활 하다가 그만두는 친구들도 많아졌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우리 세대의 친구들의 부모들은 나름 여러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흔히들 집만 잘 사면 어떻게든 집값이 오를 것으로 생각했고 실제로 그런 일들이 생겨나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필자의 부모 세대인 70대들은 한국의 세대들 중 경제적으로 가장 큰 혜택을 누릴 수 있었던 세대였다. (물론 그들은 한국 전쟁의 폐허 속에서 자랐고, 독재와 군사정권의 암울한 시대를 지나와야 했다.)

구약성서의 레위기 19장 9~10절을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농사를 짓고 곡식을 거둘 때에 밭모퉁이에는 추수도 하지도 말고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라고 말씀한다. 이는 포도원도 마찬가지인데 이렇게 남겨진 것들은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나그네, 외국인)을 위한 것이라고 말씀한다. 이후 랍비들의 미드라쉬를 보면 과연 그 모퉁이의 면적이 얼마냐는 것을 논쟁하기도 했지만, 그 의미만은 변하지 않았다. 자신이 노력해서 거두었다 하더라도 그중의 일부분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으로 레위기를 읽어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제사를 통해 끊임없이 곡물과 동물들을 바치라고 하지만 많은 경우 남은 제물들은 이웃들과 나누어 먹도록 한다. 지금 자신이 소유한 것들 또한 모두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마태복음 15장 21~27절에는 귀신 들린 딸을 위해 예수 앞에 선 가나안 여인이 등장한다. 간청하는 여인에게 예수는 말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서 개들에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새번역, 마 15:26) 이에 여인은 응대한다.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얻어먹습니다.”(새번역, 마 15:27) 참으로 용감하고도 지혜로운 대답이다. 필자에게는 이 여인의 목소리가 다음과 같이 들렸다. “포도원의 모퉁이의 것은 나그네와 외국인의 것이 아닙니까! 저도 하나님의 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는 여인의 말에 놀라 그 믿음을 칭찬하였다. 여인의 딸도 고침을 받았다.

이 시대 청년의 아픔은 앞으로도 계속 청년으로만 살아야 한다는 데에 있다. 현시대의 청년은 시간이 지나도 주거와 직업의 안정을 구하기 힘든 청년으로 남게 될 가능성이 크다. 40대의 청년, 50대의 청년이 된다. 여기서 청년이란 미래에 대한 불안과 기대를 함께 지닌 사람이 아니라 불안만을 지녀야 하는 사람들이다. 청년 소득, 기본 소득을 말하는 것도 자신의 손에 쥔 것을 놓지 않으려는 세대들이 낳은 아픔을 해결해 보려는 시도일 것이다. 가나안 여인처럼 그 부스러기는 우리의 것이라 외칠 수 있고, 그것을 칭찬할 수 있는 시대가 이루어지길 기대해본다.

언제부터인가 매달 한 두 번씩 모여 그 달의 <사건과 신학> 주제를 선정하고 누가 글을 쓸 것인지, 어떻게 쓸 것 인지를 이야기할 때면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단골주제가 있었다. 눈치가 빠르신 분이라면 제목을 보아하니 무엇인지 알겠다 싶으실 것이다. 바로 ‘청년’이 그것이다.

21세기에 들어서 청년을 이야기하는 수식어들을 열거해보면 그들의 신산한 상황이 한눈에 들어온다. 연애와 출산을 포기한다는 N포세대라는 이름표가 붙더니,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부모세대보다 가난한 세대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 그리고 결국은 영혼까지 끌어내야만 주거를 장만할 수 있는 세대가 청년세대라고 한다. 매달 주제로 거론될 만 하다.

하지만 사건과 신학은 선뜻 청년을 주제로 선택할 수 없었다. 변명처럼 들릴수도 있겠지만 정말로 저런 평가가 청년들을 제대로 표현하고 있는 것일까? 확신이 서지 않아서이기도 하며, 동시에 정말 그렇다 하더라도 그들을 대상화하고 타자화해서 분석하듯이 이야기하는 것이 바른 일일까? 확신이 서지 않아서였다.

그러는 동안 미디어와 정치권은 청년취업문제, 청년빈곤문제, 청년주거문제 등등 청년들의 문제가 산적해 있다고 연일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왠지 미디어와 정치권이 정말로 청년들을 걱정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던 것은 우리들만의 의심이었을까? 미디어와 정치권은 얼마전 있었던 지방자치단체장 보궐선거에서 야당을 승리로 이끈 주체로 20대 남자 청년들을 꼽고, 그것을 소위 ‘이대남 현상’이라 불렀다. 또 그들이 소위 ‘안티-페미’경향을 보이며 현 정권의 성평등 정책을 심판하기 위하여 정치화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러한 분석이 정말 그 현상을 문제로 인식하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분석인지 의심하는 것은 우리만의 생각일까?

그렇게 두세 달 정도를 흘려보냈나보다. 이제는 그 결과가 어떻든 간에 이 문제를 우리 곁에서 떠나보내기로 했다. 30대 청년이 야당의 대표가 되고, 20대 청년이 대통령 비서관이 되었다지만 청년세대(우리는 아직도 그 청년세대가 어디부터 어디까지인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라는 이들의 미래가 희망에 차있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더 이상 고민해도 뚜렷한 답을 찾지는 못할 것 같았다. 그저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정작 그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당사자에 해당하는 이에게도, 또 그들보다 조금 일찍 사회로 나선 그들의 선배들에게도 글쓰기를 부탁했다. 그렇다. 이번 달 <사건과 신학>은 그저 듣는 소리가 될 것이다. 그것부터 시작하는 것이 맞는 것 같다.
- <사건과 신학> 편집팀

한수현(감리교신학대학교)  kncc@kncc.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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