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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의 실천으로부터 시작되는 창조세계의 보존창조세계의 회복(호세아 4,1-3; 로마서 8,18. 25)
김상기 목사(백합교회) | 승인 2021.09.08 22:56
▲ 인간의 부정의으로부터 시작된 창조 세계의 파괴는 공의의 실천으로만 회복될 수 있다. ⓒGetty Image

현재 지구는 누구나 다 아는 대로 기후변화로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그 원인도, 일부 사람들이 부정하고 있지만, 알려지지 않았거나 모호하지도 않습니다. 세계가 이를 인식하고 노력을 시작한지도 벌써 40년이 지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위기는 심화될 뿐 완화되지는 않았습니다. 위기에 대처하는 인간의 지혜와 의지에 대한 신뢰가 그 위기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게 했을 수도 있고, 경제발전과 성장의 신화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물신숭배가 그 위기를 잊게 했을 수도 있습니다. 기후위기와 그에 수반되는 팬데믹은 인간의 가까운 미래조차 우울하고 어둡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오늘 창조절을 맞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고 보존하신다고 고백하고 기억하는 절기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보존이 전적으로 하나님만 하실 일이 아님을 우리는 지금의 상황으로부터 깊이 깨닫고 있습니다. 이제까지는 그가 지으신 세상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였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했을지 모르지만, 앞으로는 그렇게 하기가 어려울지 모릅니다. 오늘 우리는 그만큼 큰 위기 앞에 서있습니다.

그런데 성서는 이러한 위기가 전지구적인 것은 아닐지라도 오늘날에 비로소 시작된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그에 따르면, 그것은 누적된 결과일 수 있습니다. 인간의 역사에서는 언제든 그러한 위기가 발생할 수 있고 그 위기의 생산자는 언제나 바로 사람 자신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이 사람과 한 가지 문제를 놓고 재판정에서 다투듯 다투십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세상에는 저주와 속임과 폭력이 끝없이 이어집니다. 피를 흘리는 사건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납니다. 한마디로 악이 가득한 땅입니다. 이런 세상에서는 하늘 아래 숨 쉬고 사는 것도 힘들다는 사람들의 한숨 소리가 곳곳에 메아리칠 것만 같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살기 좋은 세상을 꿈꿀 텐데 도대체 이러한 일이 왜 벌어지는지요? 하나님 보시기에 이 세상에는 세 가지가 없습니다. 진실이 없고 사랑/인애가 없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습니다.

진실이 무게를 잃어버린 세상, 진실이 손해를 가져오고 진실이 외면당하는 세상입니다. 의심과 감시가 일상화되고, 신뢰가 자취를 감춥니다. 사랑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하지만, 신뢰가 없는 곳에 사랑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진실과 신뢰와 사랑/인애가 사라진 까닭을 하나님에 대한 앎이 없다는 것에서 찾는 것 같습니다. 그것들의 부재는 이 앎의 부재와 결합되어 있습니다. 마치 양자는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모를 리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셨고 해방시키셨고 정착시키신 민족이 이스라엘입니다. 그런데 그들을 가리켜 하나님에 대한 앎이 없다고 하십니다. 단순하게 말하면,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성구들을 몸에 붙이고 다니며 그렇게 긴 세월이 지났는데 기이하게도 그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그가 그들에게 기대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이스라엘은 모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앎이 있는지요? 입술로는 가까우나 마음으로는 먼 분이 하나님 아니지요?

하나님은 사람들이 자기를 정의와 공의를 사랑하시는 분으로, 그래서 약자를 사랑하시고 약자와 자기를 동일시하시는 분으로 알고 자기와 같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불행하게도 사람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고 해서 하나님과 같이 되겠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선을 행하기 원하는 자기에게 악이 함께 있고, 속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나 몸으로는 죄의 법을 섬긴다고 탄식했던 적이 있습니다(롬 7,18-25). 그는 원하기는 해도 행하는 것은 없음을 자각하는데 이릅니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이 한계에 체념하고 사는 극단적인 모습을 호세아는 이 땅에 오직 저주와 속임과 살인과 도둑질과 간음만 있고 피흘림이 피흘림의 뒤를 잇는다고 묘사합니다. 이 극단적 묘사에 세상이 아무리 악해도 설마 그렇게까지야 하는 반응을 보일 수 있습니다. 그 반응에 이어 저 한계를 인식하고 우리 삶을 반대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 노력하고 또 결실을 볼 수 있다면 참으로 다행일 것입니다. 바울은 그 계기를 그리스도 예수에게서 발견했습니다. 그의 경험이 우리의 경험이 되기를 빕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그와 같은 현실을 고발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것이 자연에 미치는 영향을 말씀하십니다. 땅이 슬퍼하고 탄식합니다. 땅에 사는 자와 들짐승과 하늘을 나는 새가 쇠잔해지고 바다의 고기도 마를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름답다고 감탄하셨던 창조세계의 소멸입니다. 자기 한계 속에 갇힌 인간의 행위가 초래할 결과입니다. 이러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행위는 변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인간의 약탈적 행위는 사람에게 머물지 않고 세상을 향해 확대 진행되어 왔습니다. 발전과 개발의 이름으로, 산업혁명의 이름으로 그때그때마다 형식을 바꿔가며 계속되었습니다. 호세아는 뭇생명이 어떻게 이 땅에서 존재를 위협받게 될지 몰랐으나 이제 우리는 적어도 그 일부는 알게 되었습니다. 전쟁뿐만 아니라 기후변화와 질병도 위기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모두 인간의 행위들과 직간접으로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위기 앞의 창조세계가 어떻게 회복될 수 있는지요?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립니다. 이들은 누구인가요? 인간이 아닌 신적인 존재들일까요? 바울은 한계 속의 인간이 하나님의 양자가 되기를 기다린다고 합니다. 양자란 곧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여지는 것 아닌가요? 그렇습니다. 인간 때문에 신음하는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된 바로 그 사람들을 기다립니다. 하나님은 예수가 그의 유일한 아들이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는 사람들을 자녀로 받아들여 예수가 맏아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출현이 이 위기 극복의 시작이 될 수 있을까요? 하나님처럼 진실과 정의와 공의를 사랑하는 사람들, 그의 창조세계를 보존하는 사람들, 약자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곧 피조물들이 기다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입니다. 사람들의 행위로 인한 위기 앞에서 탄식하는 세계를 생명과 풍요의 해방으로 이끌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출현이 위기극복의 시작입니다. 극복되었다고 할 때까지 얼마의 시간이 걸릴지는 모르지만, 그 시작이 없으면 그 때는 결코 오지 않습니다. 우리의 행위가 피조물들을 탄식하게 만든 것을 회개하며 하나님의 자녀들로 사는 우리가 되기를 빕니다. 피조물들이 우리와 함께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를 누리게 되기를 빕니다. 우리의 삶이 하늘과 땅과 우리가 조화를 이루는 창조세계의 회복을 가져오는 초석이 되기를 빕니다.

김상기 목사(백합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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