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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세계 구상사랑이 다스리는 길입니다(창 1,26-28; 눅 10,29-37)
김상기 목사(백합교회) | 승인 2021.09.16 16:43
▲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며 세우셨던 세계에 대한 구상을 실현하는 길은 사랑의 공동체를 건설해 가는 것이다. ⓒGetty Image

성서는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는 웅장한 선언으로 첫장을 엽니다. 하나님이 창조주임을 알리는 선언입니다. 그의 시간인 영원 안에서 어느 시점에 시작된 세상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세상이 처음부터 그런 것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끝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끝은 완전한 끝이 아니라 새하늘과 새땅의 창조로 이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이 새창조가 언제 어떻게 이루어질지는 모릅니다. 다만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 끝이 사람 때문에 온다고 하는 점입니다.

사람도 하나님의 창조물인데, 바로 그 사람 때문에 하나님의 창조는 원래의 모습을 잃었고 또 끝에 이를 것입니다. 창조와 관련하여 인간의 역사를 말한다면, 그것은 창조 파괴의 역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도대체 이런 일이 왜 일어나게 되었는지요?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크게 기뻐하셨고 그 가운데는 사람도 있었으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 가운데에는 사람도 당연히 포함됩니다. 어떤 모습의 사람이기에 그리 할 수 있었는지요?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시기 위해 하늘회의를 여셨습니다. 그 회의 참석자가 누구인지는 보도되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단지 우리라고 말씀하실 뿐입니다. 사람의 창조는 하나님에게 그만큼 중요하고 그만큼 신중한 일이었습니다. 처음부터 사람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 존재로 지어진 셈입니다.

사람은 땅 위에 던져진 존재만은 아닙니다. 사람은 하나님과 하늘의 존재들과 뭇생명들의 관심 속에 태어났습니다. 이 관심이 잊혀질 때 사람은 개별화되고 스스로를 던져진 존재로 인식하고 존재의 불안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재라 하더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짓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의 형상으로 지으시고 이 세상에서 생명들과의 관계 속에 살게 하셨습니다. 사람은 처음부터 관계 속의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은 그 관계가 특별한 관계임을 암시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하나님을 그의 피조물과 연결하고 하나님이 통치하고 계심을 피조물에게 알리는 역할을 합니다. 단순히 알리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신하여 돌보는 일도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은 뭇생명들을 위한 하나님의 특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사람이고 세계에서 사람의 위치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창조세계를 보존하고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사람을 그의 형상으로 이 땅에 두셨습니다. 이것이 다스리라는 명령의 내용이었습니다. 그러한 자로서 사람은 하나님 앞에 있는 존재이고, 이것이 인간의 존엄성의 기초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 하나님의 세계구상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 지은 것을 후회하시게 되었고 가슴 아파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홍수로 세상을 심판한 이유를 성서는 사람의 죄와 악 때문이라고 뭉뚱그려 말하는데, 사람은 도대체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왜 세상을 보존하기 보다는 파괴하고 평화보다는 폭력을 다스림의 방식으로 선택했을까요? 욕심과 시샘과 분노와 어리석음과 불안과 무절제 등 때문이라면, 사람이 이를 통제하고 이길 수 있는 길은 없는 것일까요?

혹시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세상에 있었음에도 세상을 대하는 하나님의 태도가 어떤 것인지 몰랐던 것일까요? 그 태도는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다음에야 구체적으로 명시됩니다. 요 3,16-18은 하나님이 세상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또 어둠에 갇힌 그 세상이 구원받기를 얼마나 간절히 원하시는지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그 사랑이, 그 마음이 그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게 했다면, 그 사랑과 그 마음이 어떠한 것인지 조금은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사람은 그 사랑과 그 마음을 넉넉히 품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비극의 원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모습을 닮은 그의 형상으로 지어진 사람에게 그 사랑과 그 마음이 턱없이 부족했거나 없었다면, 참으로 놀라운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사랑의 능력이 작아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수행해야 할 일을 할 수 없었고, 사람의 지배 아래 있는 세상은 하나님의 뜻과 달리 고통을 겪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사랑의 능력으로 바꿔 이해할 수 있다면, 사람과 세상의 관계도 달라지지 않을까요?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도 다른 것이 아니라 사람 속에 사랑을 일으키고 사랑의 능력을 키우고 사랑으로 평화의 세상을 이루려고 하신 것입니다.

어느 날 한 율법사가 예수를 찾아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냐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 답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는 그의 입에서 그 답이 나오게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마찬가지로 그 답을 알고 있듯이, 그것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영생을 얻는 길임을 앎에도 그 길을 가지 않는 것이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고 말하는 것은 맞을 수도 있고 맞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 말을 사랑으로 영생을 얻는다는 말과 결합시켜보면, 생명에 이르는 믿음은 사랑으로 나타나고 사랑으로 일하는 믿음임이 드러납니다(갈 5,6). 믿음이 이 믿음일 때 그 믿음은 영생에 이르게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사랑 없는, 사랑을 낳지 못하는 믿음은 아무 것도 아니며, 더나아가 하나님을 기만하는 것이라고 해야 합니다.

예수는 “내” 이웃이 누구인지 묻는 율법사에게 사마리아 사람 비유를 들려주시고 누가 강도만난 “저 사람”의 이웃이냐고 묻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너무나 분명한 이야기였기에 그 이야기를 들은 사람은 설령 어린 아이라도 그 물음에 답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율법사와 예수의 질문이 서로 방향이 다르다는 점입니다.

사랑은 사고의 전환을 수반합니다. 그것은 나 중심의 일차원적 사고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 중심의 사고에서 너와 그는 도구화되고 폭력의 피해자가 되기 쉽습니다. 사랑도 소유의 연장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와 달리 예수가 요구하는 사랑은 사고의 전환에 따른 지평의 확대를 가져옵니다. 이제까지 내 시야에 들어오지 않고 내 품에 품을 수 없었던 사람과 세상이 내 사고의 중심이 됩니다. 사랑은 이처럼 사고의 중심을 “나”에게서 “저”에게로 옮기는 일입니다.

아마도 하나님이 그의 형상으로서의 사람을 지으시려고 하셨을 때 사람에게 이 사고는 전제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처음부터 다른 생명들과 땅의 평화를 위한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잊혀졌던 이 사실을 일깨우고 “저 사람” 중심의 사랑으로 그 형상을 우리 안에 회복시키고 실현시키려고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말의 의미를 바로 여기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와 같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창조절이기를 빕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사랑의 사람입니다. 사랑의 사람으로 사람과 세상을 사랑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기를 빕니다. 새로운 피조물로 새하늘과 새땅에 잇댄 세상을 만들어가기를 빕니다.

김상기 목사(백합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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