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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겨두는 실천따뜻함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있습니다(신 24,19-22; 마 13,31-33)
김상기 목사(백합교회) | 승인 2021.10.14 16:02
▲ Arthur Hughes, 「Gleaning」 ⓒsothebys.com

예수께서는 자주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그 까닭은 직접적인 언어로 표현하기가 대단히 어려워서라기 보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전이해 때문일 것 같습니다. 직접적인 언어로 말하면 논쟁으로 귀결되기 쉽고, 논쟁은 설득보다는 고집을 결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에 반해, 비유는 그것이 말하는 대상은 같지만 이를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주고 스스로 그 의미를 파악하게 하는 장점이 있습니다. 하늘나라에 대해서도 현재 여러 가지 표상들이나 이해들이 있겠지만 예수의 비유는 이것들에 대해서도 여전히 교정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하늘나라가 여기서는 겨자씨와 누룩에 비유됩니다. 하늘나라를 화려하고 거대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비유들이 충격적일 수 있습니다. 너무 작은 것들이어서 그렇습니다. 게다가 그것들은 성장하든 부풀리든 변화를 일으킵니다. 하늘나라를 영구불변의 것으로 이해했던 사람들에게는 말도 되지 않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자신이 본 하늘나라를 그렇게 설명하십니다.

두 비유는 동일하게 이야기하면서도 중요한 차이를 보입니다. 겨자씨와 누룩은 아주 작은 것들이나 그것들이 일으킨 변화의 크기는 너무 커서 그것들의 처음과 나중은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입니다. 사람들은 변화의 과정에 더 주목할 수 있으나, 비유는 그 과정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이 변화의 최종 모습과 그 크기에만 주목합니다. 변화의 결과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겨자씨나 누룩의 몫이 아니라 다른 자들이 누립니다. 나무 그늘을 찾는 새들이나 부푼 밀로 만들어진 음식을 나눌 사람들입니다. 타자의 이익을 위해 자신들의 결과를 내주는 것이 겨자씨와 누룩의 일입니다. 이것이 하늘나라의 모습이라면, 그 나라는 어떤 것일까요?

하늘나라는 완성된 모습으로 우리 앞에 오지 않습니다. 하늘나라는 가능성입니다. 우리의 팍팍한 현실을 뚫고 들어온 아주 작은 가능성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하늘나라는 이미 우리 가운데 가능성으로 현존합니다. 예수께서 하늘나라는 이미 너희 가운데 있다고 하신 것도 이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나라는 단순히 가능성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것은 변화를 일으키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힘은 가능성을 현실화하는 힘이지만 겨자씨와 누룩으로 표상된 힘은 방향이 서로 다릅니다. 겨자씨의 성장은 그 자체의 성장이며 누룩에 의한 팽창은 다른 것의 팽창이라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내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컨대 적어도 한 사람 안에서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늘나라 소식을 듣고 이를 품은 사람은 그 안에서 하늘나라가 자란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겨자나무가 온갖 풍파를 겪으며 자라듯 그도 그렇게 많은 시련들을 겪으며 겨자나무처럼 품이 넓은 사람이 되고 그 안에 타자들을 품게 될 것입니다.

동시에 그는 누룩처럼 자기 주변을 사랑으로 부풀리고 사랑을 나누게 할 것입니다. 그는 내적으로는 은사로서의 사랑 곧 인간됨으로서의 사랑(고전 13장)과 외적으로는 실천적인 사랑의 영향력을 갖춘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을 만들어내는 것이 하늘나라가 운동하는 방식입니다. 그 사람들을 통해 하늘나라는 세상을 바꾸어갈 것입니다.

이를 바탕으로 신명기의 본문을 살펴보면, 하늘나라 씨앗이 만들어내는 사람의 모습을 여기서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여기 언급된 경우들이 그렇다고 하기에는 너무 작은 일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남을 특히 약자를 배려하는 사람의 일상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마태복음 25장에서 볼 수 있는 대로 이렇게 작은 일이 하늘나라 심판의 기준이 될 수 있으니, 그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닙니다.

지금은 결실을 맺는 가을입니다. 추수 때의 일을 다루는 본문을 이해하기에는 적절한 때인 것 같습니다. 곡식을 베고 거두어들일 때 한 묶음을 놔두고 왔으면 다시 가지러 가지 마라. 감람나무에서 열매를 따고는 남은 것이 있는지 다시 살피지 말라. 포도를 딴 다음에는 뒤에 남은 것을 되돌아가 따지 말라. 이렇게 명령하는 이유는 모두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생각하고 그들이 먹을 수 있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통상 추수작업은 위의 명령과는 반대로 진행됩니다. 단 하나라도 거두지 못하면 손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못 거둔 것이 있는지 몇 번씩 확인하기도 합니다. 일반적으로 이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기에 그렇게 한다고 해서 너무 한다고 하거나 인색하다고 말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이러한 행태에 제동을 겁니다. 약자를 생각해서 되돌아가 남은 것이 있는지 살피고 마저 거두지 못하게 합니다. 뒤에 남겨진 양이 얼마나 될까 할 수도 있겠지만, 작더라도 그 양을 남길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람의 마음과 생활 속에 약자를 위해 한 구석 빈자리를 남겨둘 여유가 있어야 하지 않는가 입니다. 바로 그것이 배려이고 연대이고 신뢰이고 사랑이며, 그 빈자리에 이것들이 자리 잡을 수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면, 바로 그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자란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한 사람이 있다면, 옆의 밭이나 포도원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하늘나라가 넓혀지지 않겠습니까? 이 본문과만 관련해서 말한다면, 약자와의 연대가 이웃과의 연대를 낳고, 이 연대는 다시 저 연대의 폭을 넓히고 깊이를 더 깊게 할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주님은 마지막 심판 때 하늘나라에 들어갈 양으로 분류하십니다.

약자를 생각하고 배려하는 마음의 자리를 만드는 이 가을이면 좋겠습니다. 약자를 위해 남겨두는 행위를 통해 약자의 상한 마음이 위로를 얻고 그들의 기쁨에서 기쁨을 얻는 우리이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늘나라가 우리 안에서 또 우리 밖에서 자라가기를 빕니다.

김상기 목사(백합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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