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학술 칼럼
가짜 생태학, 사람과 환경을 더욱 착취한다기후위기와 탄소 중립에 요청되는 생태신학 ⑶
홍인식 대표(에큐메니안) | 승인 2021.12.03 16:22
▲ 사람과 환경을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그 이면은 결국 경제적 이득을 위한 것으로 전락한 생태학은 사라져야 한다. ⓒGetty Image

전 지구적 위기 유발 및 지속

이 시대는 인간이 지구 차원의 생물물리학적 변화의 주된 요인이 된 시대이다. 또한 신자유주의 세계화 프로젝트가 지구의 정치 생태학을 구성하는 지배적인 힘으로 작동하는 시대이기도 하다. 세계화 프로젝트는 세계의 사회경제적 형태를 형성하는 데에서도, 지구의 생물물리학적 변화를 이끄는 데에서도 주요한 역할을 한다. 오늘날 생태 오염과 사회적 불평등이라는 지구 차원의 위기는 세계화 프로젝트의 합법성에도 위기를 야기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위기와 세계화 프로젝트 간의 관계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폭넓은 역사적 관점이 필요하다. ‘세계화’와 그 사회적 환경적 비용에 대한 논란은 비교적 새로운 주제이지만 그 현상 자체는 오백 년의 역사, 대륙 간 무역망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엔리케 두셀이 말한 “오백 년간의 체제”와 관련하여 현재의 전 지구적 위기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지난 다섯 세기 동안 반복 재생산되면서 깊게 상호 연결된 방식으로 땅과 가난한 자들을 착취했던 동력은 무엇인가? 프랜치스코 교황은 『찬미 받으소서』를 통하여 네 가지 핵심 용어를 제가한다.

(1) “기술 관료 체계”의 출현, (2) 북반구가 남반구에게 진 “생태학적 빚”, (3) 세계화 프로젝트를 특징 짓는 “피상적인 가짜” 정치 생태학, (4) 오늘날 세계화 프로젝트의 가치 체계를 구성하는 “소비문화”

오백 년간 프로젝트의 기술 관료 체계

프란치스코의 주장처럼 “이 체계는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절차를 사용하여 외부 대상에 대해 지속적으로 접근하면서 이들에 대한 통제권을 획득하는 주체 개념을 칭송한다”(106). 프란치스코에 따르면 기술 관료 체계가 칭송하는 이 주체는 세상에서 마주치게 되는 외부 객체를 소유하고, 지배하고, 통제하기 위해 과학적 형태의 회계를 활용한다. 기술 관료 체계가 인간과 세상의 만남을 구체화하는 방식에 대해 언급하면서 교황은 이렇게 결론짓는다. “이는 마치 이 주체가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는 무형의 실체를 마주하고 있는 것과 같다”(106). 폴라니의 19세기 및 20세기 사회 분석은 주로 경제적 기술자 지배 사회가 부상하는 상황 속 인간과 자연의 운명에 관심을 두고 있다. 폴라니의 사상은 기술 관료 체계의 정황 속에서 땅의 탄식과 가난한 자들의 탄식 사이의 관계를 조명하는 데 도움을 준다.

시장 사회와 기술 관료 체계

경제학에 관한 고전적인 작품인 『거대한 전환』(The Great Transformation)에서 칼 폴라니는 19세기와 20세기의 핵심적인 사건은 “시장 사회”의 부상이었다고 주장한다. 폴라니의 설명처럼 시장 사회는 사회가 전통적으로 시장과의 관계에서 스스로를 구성했던 방식으로부터의 중요한 결별을 나타낸다. 전통적으로 시장은 사회와 문화의 넓은 관계적, 도덕-윤리적 구조 안에 “내재되어” 있었다. 시장의 가치는 정치, 종교, 사회관계" 등등 종종 충돌하는 가치와 우선순위에 제한되고 종속되어 있었다.

시장 사회의 부상은 19세기 경제 자유주의의 출현으로 이어지면서 이 질서를 뒤집는다. 시장 사회에서 시장은 사회와 자연이라는 더 넓은 관계의 모판으로부터 분리되어 사회와 자연이라는 모판을 자신 안에 포함시킨다. 폴라니의 설명처럼 시장 사회 에서 사회는 “시장의 부가물처럼 작동한다. 경제가 사회 규제에 내재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관계가 경제 체제 안에 내재된다.” 따라서 “자기 규제”를 내세우는 시장이 사회를 구성하는 유일한 수단이 되었고 가치는 가격을 통해 식별하게 되었다. 시장 사회에서 사회와 자연의 모든 요소들은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도구처럼 구성될 수 있는 상품 형태로 환원된다. 따라서 시장 사회는 “기술 관료 체계”의 효과적인 경제적 표현인 것이다.

시장 체제가 인간과 인간의 자연 환경의 운명을 인도하는 유일한 요소가 되도록 허락하게 되면… 결국 사회가 붕괴하게 된다. 인간은 문화적 관습이라는 보호막을 빼앗긴 채 사회적 노출의 영향으로 소멸된다. 인간은 악, 타락, 범죄, 기아 등으로 인한 극심한 사회적 혼란의 희생자로서 죽어갈 것이다. 자연은 그 구성 요소로 환원될 것이고, 주변 지역은 훼손될 것이고, 강은 오염될 것이고 … 음식과 원료를 생산할 능력은 파괴될 것이다. 수익을 위해 노동과 토지를 상품화함으로써 시장 사회는 사회적 경제적 건강의 계승된 상태를 “끊임없이 파괴한다.”

생태학적 빚과 불평등한 교환

프란치스코 교황은 『찬미받으소서』에서 “진정한 ‘생태학적 빚’이 특히 북반구와 남반구 사이에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교황은 이 빚이 “오랜 기간 일부 국가가 천연 자원을 편중되게 사용했기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주장했다(51항).

500년 프로젝트의 중심 영역에 있는 나라들은 무역에 대한 지배권을 놓고 경쟁하면서 채취 과정을 유지하려는 목적으로 “자국 내에서 더욱 강력한 기술, 재정 제도, 국가 체계 등을 새롭게 발달시켰다.” “해외에서 [중심부 국가들은] 원재료 시장과 교통 체계를 재구성하여 국내의 혁신을 보완하고 더욱 강력하게 만들었다.”

따라서 북반구의 중심부 국가들은 초기의 식민 채취 과정을 통해 지배 체제를 수립한 이후 땅에 대한 정치 생태학을 구성하는 방식을 혁신하고 수정하는 오래된 과제에 착수했다. 중심부 국가들은 강제로 얻은 초기 기본 재산인 권력과 자본을 세계의 자원에 대한 자신들의 소유권을 보호하고 확장하는 데 사용했다. 『찬미 받으소서』에서 프란치스코는 이러한 동력의 지속되는 성격을 지적하며 생태학적 빚이 깊은 역사적 뿌리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무역에서 계속되는 “상업적 불균형”과도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했다(51항). 여기서 교황은 학자들이 흔히 “생태학적으로 불공평한 교환”이라고 언급하는 현상을 언급한다.

앤드루 조겐슨에 따르면 생태학적으로 불공평한 교환은 “더 발달한/더 강한 나라들과 덜 발달한/덜 강한 나라들 사이의 비대칭 권력 관계”의 양산과 유지로 정의할 수 있다. “이 관계에서 전자들은 거래 형태와 다른 연관된 구조적 특성을 통해 후자들을 희생시켜 균형이 맞지 않는 이 익을 거둔다.” 세계의 강한 국가들이 얻었던 “균형이 맞지 않는 이익”에는 주변부에서 자원을 채취하는 능력과 유리한 교환 비율로 주변부에 쓰레기를 떠넘기는 능력이 포함된다. 따라서 생태학적으로 불공평한 교환의 이익과 불이익은 경제적 생산성과 생태학적 건강의 측면에서 드러나게 된다. 그 결과 생태학적으로 불공평한 교환의 특징인 상업적 불균형은 북반구의 힘에 의한 주변부의 토지와 노동 약탈을 지속하게 된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북반구의 남반구 약탈은 근본적으로는 후자로부터 전자로 생산적 에너지를 체계적으로 이전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북반구를 구성하는 나라들의 사회적 신진대사는 국가들이 생산할 수 있는 양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따라서 북반구의 나라들은 자기들의 “고도로 발달된” 사회적 신진대사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천연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계속해서 남쪽을 의지하게 된다. 이 자원들은 에너지, 물자, 상품 등으로 변환되어 이익을 남기고 시장에서 팔리게 된다.

세계화 프로젝트: 피상적인 가짜 (정치) 생태학

20세기 중반에 식민지 프로젝트는 붕괴됐다고 볼 수 있다. 미국이 주도하는 서구 권력들은 그 대신 떠오르는 개발주의 패러다임 위주로 세계를 구성하려고 애썼다. 따라서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이 미국이 개발 프로젝트를 시작해야 한다고 요청한 후 20년 안에 UN은 1960년대를 “개발의 10년”이라고 선언했다. 개발 프로젝트의 방패 아래 기술적 현대화는 예상대로 주변부 내에 중심부의 사회경제적 조건을 재현했다. 하지만 1970년대가 되자 개발 프로젝트에 대해 두 가지 유형의 비판이 제기되었는데, 둘 다 생태학적으로 불공평한 교환 과정이 지속되는 것과 관련하여 개발 프로젝트가 진정 더 공정한 세상을 구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지에 의문을 제기했다. 

동시에  비록  중심부에서 나오긴 했지만 땅의 “탄식”도 공명을 얻기 시작했고, 중심부의 패권주의적 확신에 더욱 의문을 제기했다. 1972년에 발표된 『성장의 한계』에서 현재 상태의 경제 성장은 생태계에 지속 불가능한 피해를 입히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만약 지구의 “인구, 산업화, 오염, 음식 생산, 자원 고갈 등에 아무런 변화가 없이 계속된다면” 지구가 감당할 수 있는 성장의 한계점을 21세기 말경이면 넘어서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 시나리오대로면 “인구와 산업 용량 모두에서 갑작스럽고 통제 불가능한 하락”이 일어날 것이다.

또 다른 한편 『성장의 한계』는 지구의 암울한 미래를 향해 가는 길이 완전히 고정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생태적 경제적 안정"의 미래가 연장 된 미래로 지속되도록 이 길을 변경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동시에 세계가 재앙의 길로 너무 내려가는 것을 막기 위해 필요한 대규모 정치 생태학적 변화를 취하기 위한 시간이 상당히 짧다고 경고한다. 만약 개발 프로젝트의 현재 궤도가 성장을 향한 “안이한 태도”로 유지된다면 인간 문명의 미래는 더욱 위태로워질 것이다. 이들은 지구 생태계의 한계에 대한 반응으로 세계의 정치 생태학을 재구성해야 하고 또한 현시대에 부를 좀 더 공정하게 분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경제학자들과 정치가들이 『성장의 한계』의 여러 주장을 비판하고 일축 하긴 했지만 이 보고서가 전 세계의 중요한 생태학적 담론을 위한 촉매 역할을 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그 결과 1970년대를 지나며 인간이 세계를 구성한 방식이 만연한 사회경제적 불평 등 뿐만이 아니라 생태학적 건강에 대해서도 반응해야 한다는 것이 점점 더 분명해졌다.

하지만 개발 프로젝트는 지구 차원의 공평과 건강이라는 두 가지 요구 앞에서 자신을 정당화 할 필요가 없었다. 왜냐면 환경에 대한 우려가 전  지구 차원에서 구축되던 때와 같은 시기에 개발 프로젝트의 동력은 세계화 프로젝트의 동력에 그 자리를 내주게 되었다. 개발 프로젝트의 특징이 “국가 경제 성장 전략”이었다면 세계화 프로젝트는 국가 간 경제적 경계와 무역 장벽을 약화하고 제거하는 방식으로 세계 경제 구조를 재구성하는 성장 전략으로 정의할 수 있다. – 간단히 말해 세계화 프로젝트는 신자유주의 신조라고 정의할 수 있다.

세계화 프로젝트 입안자들은 싹트기 시작한 땅과 가난한 자들의 탄식 앞에서 그 타당성을 유지해야만 했다. 바로 여기서 신자유주의가 세계를 구성한 것을 정당화하기 위한 방법으로 지속 가능한 개발이라는 용어가 정치적 경제적 담론에서 부상하게 된다.

“지속 가능한 개발” 개념은 1987년에 나온 ‘우리 공동의 미래’(Our Common Future)라는 UN의 유명한 보고서를 통해 유명해졌다. 이 보고서는 주저자인 그로 브룬틀란의 이름을 따라 "브룬틀란 보고서"로도 알려져 있으며, UN은 복합적인 정치 생태학적 위기가 형성되고 있다는 전 지구적 우려가 커짐에 따라 이 보고서를 요청하게 되었다. 보고서는 경제 발전을 목표로 하는 정책과 생태계의 건강을 유지하고자 하는 정책 사이의 가능한 갈등을 살펴본다.

보고서는 저개발의 위기와 생태 오염에 맞서기 위해 “고통스런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브룬틀란 보고서는 이를 인정한다면 “미래 세대가 자신들의 필요를 채울 수 있는 가능성을 훼손하지 않은 채 현 재의 필요를 채우는” 형태의 개발로 정의하는 “지속 가능한 개발”로 돌아설 것을 요구한다.

세계가 “고통스런 결정”을 직면해야 한다는 사실 앞에서 브룬틀란 보고서는 부의 생산과 생태학적 안정 사이의 긴장 관계를 암묵적으로 인정한다. 다시 말해 이 보고서는 지속 가능한 미래, 곧 인간과 땅의 번영을 보장하는 미래는 단순히 경제 성장에 대해 무비판적인 프로그램에 기초할 수는 없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견해는 이 문서의 핵심 용어에 덧붙여진 특히 모호한 정의 때문에 약화되었다.

지속 가능한 개발은 경제 성장이 현재와 미래의 필요를 채우는 데 필요하다고 가정한다. 따라서 지속 가능한 경제 성장에 우선순위가 놓이고, 성장이 끼치는 부정적인 생태학적 영향에 대한 우려는 성장의 필요성보다 뒷전으로 밀리게 된다. “생태계의 생존 여부가 ‘개발’의 한계를 설정하는 것이 아니라 ‘개발’이 사회의 생존 여부를 결정한다.” 실제로 지속하고자 하는 것은 ‘개발’이지 생태계나 인간 사회가 견딜 수 있는 수용력이 아니다.

홍인식 대표(에큐메니안)  webmaster@ecumenian.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홍인식 대표(에큐메니안)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종로구 김상옥로 30, 402호  |  제호 : 에큐메니안
대표전화 : 070-4252-0176  |  팩스 : 0303-3442-0176  |  등록번호 : 서울 자 00392  |  등록일 : 2012.10.22
발행인 : 홍인식  |  편집인 : 이정훈  |  청소년보호책임자 : 홍인식  |  E-mail : webmaster@ecumenian.com
Copyright © 2022 에큐메니안.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