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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우리의 잘못을 일깨우는 사람“특사로서의 삶”(말라기 3:1-5)
이상중 목사(초도제일교회) | 승인 2021.12.07 14:52
▲ 2009년 1월 20일 새벽 서울 용산 4구역 재개발지역 건물에서 철거민 5명과 경찰 1명이 사망했다. ⓒ연합뉴스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한 주간 평안 하셨나요? 어떠한 상황에서도 평안을 선택하고 누리시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지난주 말씀을 전하며 대림절 기간 이전에 알고 있던 예수님과 관련된 또는 성경과 관련된 모든 지식들을 내려놓고 마음을 열어 말씀을 깊이 묵상함으로써 새로이 예수님을 알게 되고, 예수님을 다시 만날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을 다시 만난다는 건 거룩한 삶을 향해 멈춰 있지 않고, 전진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기에 베드로전서 1:13-16의 말씀처럼 우리는 더욱 거룩해지기 위해 애쓰는 삶을 의무적으로 살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13 그러므로 여러분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정신을 차려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여러분이 받을 은혜를 끝까지 바라고 있으십시오. 14 순종하는 자녀로서 여러분은 전에 모르고 좇았던 욕망을 따라 살지 말고, 15 여러분을 불러주신 그 거룩하신 분을 따라 모든 행실을 거룩하게 하십시오. 16 성경에 기록하기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여라’ 하였습니다.”

그러기에 나누어드린 대림절 묵상집의 말씀 묵상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의식성찰로 하루를 마무리 하는 삶이 가능하다면 대림절이 끝나 성탄절을 맞이할 때 저와 성도님들은 분명히 달라져 있을 줄 믿습니다. 이런 애씀이 예수님을 다시 만나게 되는 은혜의 사건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다시 만나야 한다.’고 이야기는 듣는데 그럼 예수님을 다시 만난다는 건 대체 뭘까요? 이 점을 설명하기 위해 저의 이야기를 들려 드리고자 합니다.

성도님들 2009년 용산에서 벌어진 ‘용산참사’를 기억하고 계신가요? 용산에 있던 미군이 이전을 하고 용산에 재개발 광풍이 불자 용산에서 살거나 장사를 하던 많은 이들이 쫓겨나 그야말로 거리에 나앉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1월19일 남일당이라는 건물에서 농성하고 있던 철거민 5명과 무리하게 강제집행을 하던 경찰 1명이 숨지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이 일과 관련해 설명한 한 글을 소개합니다.

“‘살기 위해 망루에 오르다.’ 억울하게 쫓겨난 사람들은 남일당 건물에 올라 농성을 준비한다. 1월19일 그 날은 칼바람이 세차게 부는 날이었다. 옥상에 망루를 설치하며 최후 항전을 준비하는 그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그렇게밖에 할 수 없는 현실이 답답했을 것이고 어떻게든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길 바랐을 것이다. 그들은 ‘죽으러’ 옥상에 올라간 것이 아니라, ‘살러’ 올라간 것이다.

‘누굴 위한 국가 기관인가?’ 그런데 그들의 모습을 보는 경찰의 태도는 예사롭지 않았다. 19일에 경찰버스가 도로한복판에 서며 자꾸 세입자들을 자극했다. 철거민들은 경찰차가 선 것을 보며, 골프공이나 화염병을 던지며 억울함을 표시했다.

남일당 건물 곁에는 용역들이 서서 온갖 욕설로 농성자들을 자극했고, 2층과 3층에선 가죽소파에 불을 붙여 유독가스를 옥상으로 피워 올렸다. 매서운 추위와 숨까지 막히게 하는 가스는 죽음의 공포를 더욱 부추겼다.

불이 붙은 것을 보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소방서에 연락을 하기도 했지만, 소방서는 공사장 인부들이 피운 불이라며 출동했다가도 그냥 돌아갔단다. 누구 하나 자신들의 처지에는 관심도 두지 않았으며 모든 관공서는 한 통속이 되어 철거민들을 압박했다.”

- <브런치, 건빵님의 글> (https://brunch.co.kr/@gunbbang/28)

당시 저는 용산 재개발로 인해 벌어지고 있던 가난한 이들에 대한 강제 집행과 폭력에 반대하며 철거민들 편에 서서 시위에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뉴스에 다섯 명의 철거민들이 경찰의 강제적인 진압 속에서 목숨을 잃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 소식은 저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왜 가난한 이들은 늘 이렇게 쫓겨나야 하나, 왜 죽임을 당해야 하나, 국가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 이들이 왜 국가의 보호조차 받지 못하는가에 대한 분노가 올라왔습니다.

용산 참사 이후에도 여러 차례 사건이 벌어진 남일당 건물을 찾아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철거민들의 죽음을 애도하고, 강제철거와 국가폭력에 대해 규탄하기 위해 모여 있었습니다. 뉴스로는 연일 철거민들이 잘못 했다는 기사가 올라왔습니다. 제가 직접적으로 경험한 일이 아니었음에도 너무나 억울했습니다. 철거민들의 죽음과 폭력에 관련된 사과, 관련자 처벌, 나아가 앞으로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아야 할 여러 가지 제도 장치들이 생기기를 바랐지만 무엇 하나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시위에 참여하며 연대하고, 있는 곳에서 기도하는 것 밖에는 없었습니다. 할 수 있는 일이 너무나 적었습니다. 그저 “하나님 도와주세요.”라고 외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시위에 참여하던 중 어느 날 용산 참사가 벌어진 건물 근처에서 성찬식이 진행되었습니다. 성찬 예식을 진행하던 목사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시간 예수님과 연합하고자 하시는 분들은 누구나 참여하십시오.”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이들, 교회를 다녀본 적 없는 이들과 함께 한 덩이의 빵에서 빵을 뜯어 포도주에 찍어 먹으며 얼마나 눈물을 흘렀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고난의 현장에서 베풀어진 성찬식을 통해 느꼈습니다. ‘바로 이곳에 하나님이 계시는구나! 바로 여기에 예수님이 계시는구나! 억울한 이들 곁에, 가난한 이들 곁에 계시는구나.’ 이렇게 예수님을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신학대학과 대학원을 수료하고 기계적으로 사역하던 저였는데, 억울한 이들, 가난한 이들과 연대하고자 하는 마음이 예수님을 다시 만나게 했습니다. 

저의 이야기를 들려드림이 너무나 부끄럽지만 말씀대로 살고자 애쓰려는 이런 노력이 오늘 본문에서 볼 수 있는 주님이 오실 길을 닦는 삶이고, 오실 길을 곧게 하는 삶, 예수님을 하나님을 다시 만날 수 있는 삶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오늘 본문 1-4절까지의 말씀을 읽겠습니다. “1 내가 나의 특사를 보내겠다. 그가 나의 갈 길을 닦을 것이다. 너희가 오랫동안 기다린 주가, 문득 자기의 궁궐에 이를 것이다. 너희가 오랫동안 기다린, 그 언약의 특사가 이를 것이다.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2 그러나 그가 이르는 날에, 누가 견디어 내며, 그가 나타나는 때에, 누가 살아남겠느냐? 그는 금과 은을 연단하는 불과 같을 것이며, 표백하는 잿물과 같을 것이다. 3 그는, 은을 정련하여 깨끗하게 하는 정련공처럼, 자리를 잡고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하게 할 것이다. 금속 정련공이 은과 금을 정련하듯이, 그가 그들을 깨끗하게 하면, 그 레위 자손이 나 주에게 올바른 제물을 드리게 될 것이다. 4 유다와 예루살렘의 제물이 옛날처럼, 지난날처럼, 나 주를 기쁘게 할 것이다.”

이 본문을 묵상하며 성도님들이 정련되어야 할 레위 자손의 입장으로 말씀을 듣지 않고 레위 자손을 정련시킬 수 있는 특사의 입장이 되어 듣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수동적으로 특사를 기다리며 ‘나 좀 정련시켜 주십시오.’ 하는 입장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특사가 되어 지금은 하나님 앞에 죄를 짓고 있으나 다시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들로 정련시킬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럼 특사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누가복음 3:1-6의 말씀이 이런 삶의 방향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1 디베료 황제가 왕위에 오른 지 열다섯째 해에, 곧 본디오 빌라도가 총독으로 유대를 통치하고, 헤롯이 분봉왕으로 갈릴리를 다스리고, 그의 동생 빌립이 분봉왕으로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을 다스리고, 루사니아가 분봉왕으로 아빌레네를 다스리고, 2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광야에 있는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내렸다. 3 요한은 요단 강 주변 온 지역을 찾아가서,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 4 그것은 이사야의 예언서에 적혀 있는 대로였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예비하고, 그 길을 곧게 하여라. 5 모든 골짜기는 메우고, 모든 산과 언덕은 평평하게 하고, 굽은 것은 곧게 하고, 험한 길은 평탄하게 해야 할 것이니, 6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구원을 보게 될 것이다.”

이 본문의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하나님의 구원의 형태는 ‘가시적으로’ 드러나도록 즉, 눈으로 볼 수 있는 삶으로 경험할 수 있는 구원이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디베료 황제로부터 시작하는 이 구절은 로마 제국의 통치 아래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아가고 있음을 상기시켜 줍니다. 그럼 왜 상기를 시키려 할까요? 억압아래 있고, 차별받고 있고, 가난 가운데 있고, 불평등한 관계에 있음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의 ‘회개의 세례’는 가난한 백성들을 향한 선포가 아니라 억압하고 있는, 차별하고 있는, 가난을 방조하는 자들을 향한 선포입니다.

억압을 멈추라는 선포이고, 차별을 하지 말라는 선포이며, 가난한 이들이 삶을 회복할 수 있도록 도우라는 선포입니다. 이렇게 마음과 삶을 돌리는 것, 이것이 산과 언덕을 평평하게 하는 일이요. 굽은 것을 곧게 하는 일이고, 험한 길을 평탄하게 하는 즉, 주님의 길을 예비하며 길을 곧게 하는 삶입니다. 이런 가시적이고 구체적인 삶의 변화를 이끌어내라!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구원의 삶이다! 라고 세례 요한은 선포합니다.

방금 읽어드린 누가복음 본문 뒤에 나오는 7-8절의 구절을 읽으면 더욱 확실해 집니다. “7 요한은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러 나오는 무리에게 말하였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닥쳐올 진노를 피하라고 일러주더냐? 8 회개에 알맞는 열매를 맺어라. 너희는 속으로 ‘아브라함은 우리의 조상이다’ 하고 말하지 말아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다.”

오늘 본문으로 다시 돌아온다면, 2절에 “그러나 그가 이르는 날에, 누가 견디어 내며, 그가 나타나는 때에, 누가 살아남겠느냐? 그는 금과 은을 연단하는 불과 같을 것이며, 표백하는 잿물과 같을 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사란 광야에서 외치는 세례 요한과 같이 억압, 차별, 기후변화, 거짓, 위선, 가난에 대해 선포하며 듣는 이들로 하여금 깨닫도록 하는 사람이라 말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선포를 듣는 사람은, 자신의 삶과 태도가 얼마나 거짓이고 위선이었는지가 밝혀지기에 견딜 수 없게 됩니다.

오늘 본문 5절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밝혀집니다. “내가 너희를 심판하러 가겠다. 점치는 자와, 간음하는 자와, 거짓으로 증언하는 자와, 일꾼의 품삯을 떼어먹는 자와, 과부와 고아를 억압하고 나그네를 학대하는 자와, 나를 경외하지 않는 자들의 잘못을 증언하는 증인으로, 기꺼이 나서겠다.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특사가 길을 닦은 이후에도 5절과 같이 변하지 않는 자들은 심판하겠다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특사가 되어, 다른 이들이 심판대 앞에 서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여기서 다른 이들이란 평범한 우리의 이웃을 말하지 않습니다. 가난한 이들의 약점을 이용해 이익을 취하는 자, 법정 앞에서 가난한 이들이 불리하도록 거짓 증언하는 자, 거짓으로 판결하는 자, 노동자의 노동을 갈취하는 자, 연약한 이들을 억압하는 자, 이웃을 차별하는 자,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위선적인 삶을 살아가는 자 등을 말합니다. 불의한 이웃을 일깨우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말로가 아닌 행동으로 일깨울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과제를 줍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발붙이고 있는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누구를 향해 외쳐야 할까요? 의롭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누구에게 보여 주어야 할까요? 누가 억압하는 자이고, 거짓을 말하는 자이고, 차별하는 자이고, 가난을 방조하는 자들일까요?

당장은 잘 알지 못하고, 불투명하게 보일지 몰라도 진실로 말씀을 깊이 묵상하며 기도하는 그리스도인은 불의한 이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독사의 자식들을 발견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특사와 같이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인 요한과 같이 살아가게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다는 전제하에 ‘간절함’이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기도를 눈물로 하게 됩니다. 간절함이 있으면 나오지 말라고 해도 새벽에 나와 기도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찾게 되고, 하나님과 연합하기를 원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위로를 자연스럽게 얻기를 원하게 됩니다.

하지만 ‘간절함’이 없으면 모든 것을 그저 형식적으로 하게 됩니다. 더구나 내 삶이 평안하고 큰 문제가 없고 교회라는 안전하고 튼튼한 건물 속에서, 편하게 앉아 예배를 드린다면 예수님을 다시 만난다는 건 정말 쉽지 않은 일입니다.

성도님들이 하나님을 만났다고 하는 순간은 거의 대부분이 자신이 가장 연약할 때, 혹은 사랑하는 이들이 연약함 속에 있을 때였습니다. 그래서 간절할 수밖에 없었던 바로 그 때 우리는 주님을 만났습니다.

말씀을 묵상하십시오. 기도 하십시오. 묵상과 기도가 성도님들에게 ‘간절함’이라는 선물을 안겨줄 것입니다. 그리고 이 간절한 마음은 행동으로 이어져 누군가를 표백하는 잿물과 같이 씻어낼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삶이 바로 오늘 본문이 말하는 특사의 삶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과정 속에서 예수님을 다시 만나게 됩니다. 회개한 우리의 삶이 누군가의 회개로 이어지는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상중 목사(초도제일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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