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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것’이 아니라 사는 ‘곳’2021 NCCK신학위 <사건과 신학> 11월호 ⑷
박흥순(다문화평화교육연구소장) | 승인 2021.12.22 16:17
▲ 고급 아파트 ⓒ뉴스1

‘마을’이나 ‘동네’라는 단어를 사용하면 돌이킬 수 없는 과거를 회상한다며 낭만적이라고 핀잔을 듣는다. 거의 무너져 이제는 작동하지 않는 ‘공동체’라는 의미를 붙들고 목이 쉬도록 외친들 되돌릴 수 없다. 기후 위기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외쳐도 꼼짝하지 않는 사람들이 ‘마을’, ‘동네’, ‘공동체’, ‘공유’라는 단어에 반응하리라 기대함이 어리석다. 놀라운 것은 자기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일에는 호의적이고 관대하다가도 이해관계로 얽히면 얼굴색이 바뀌고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라는 것이다.

부실 공사로 거짓 위용을 자랑하던 삼풍백화점이 1995년 6월에 붕괴하고 502명 희생자가 있었던 그 자리에 고급 주상 복상 아파트 아크로비스타가 당당하게 자리 잡았다. 2009년 1월 용산 철거민 강제진압으로 철거민 5명과 경찰관 1명이 사망했다. 그리고 그곳에 용산 센트럴파크 해링턴 스퀘어란 이름이 붙은 고층 아파트가 들어섰다. 철거 반대하며 농성하던 그 건물 외벽에 써 붙인 글귀를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세상은 사는 ‘것’이 아니라 사는 ‘곳’이다!”

사람과 사람이 함께 사는 ‘곳’이 사고파는 ‘것’이 된 세상에서 ‘공존’이나 ‘상생’이란 말을 외친들 무슨 영향이 있을지 회의가 든다. 세상은 사는 ‘것’이 아니라 사는 ‘곳’이라고 외치는 사람들 목소리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귀를 기울이고, 반성하고 성찰할지 마음이 우울하다. 하나님을 믿고 성서 말씀을 따르는 기독교인과 다음 말씀을 주목해서 함께 나눈다.

땅을 아주 팔지는 못한다. 땅은 나의 것이다.
너희는 다만 나그네이며, 나에게 와서 사는 임시 거주자일 뿐이다(레위기서 25:23).

사람은 땅을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공유’할 수 있는 ‘곳’이라고 강조한다. 나그네로 잠시 땅에 거주하는 ‘임시 거주자’라고 인식하는 기독교인은 얼마나 있을까? 부동산 광풍이 온 나라를 집어삼킬 때 ‘토지공유’ 개념을 외치며 더불어 살자고 말하는 기독교인은 어디에 있는가? 부동산 가격이 오르도록 기도하거나 부동산으로 재산을 불려 헌금하면 축복이라고 말하는 목회자나 성도에게 ‘나그네’와 ‘임시 거주자’ 정체성을 언급할 수는 있는가? 현실을 모르는 순진하고 이상적 생각을 하는 사람이라고 비난이나 손가락질받을 것이다. 그래도 성서에 나타난 ‘공유개념’이나 ‘나그네 정체성’을 말하지 않는다면, ‘공동체’를 꿈꾸는 것조차도 옅어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밀려오기에 거듭해서 말하고 또 강조한다. “세상은 사는 ‘것’이 아니라 사는 ‘곳’이다!”

세상이 사는 ‘것’이 아니라 사는 ‘곳’이란 외침을 무색하게 한 사건이 있었다. 인천 한 아파트 놀이터에서 놀던 어린이가 그 아파트에 살지 않는다는 이유로 입주민대표회장으로부터 도둑으로 몰린 사건이 있었다. 지난 11월 9일에 있었던 일이니 한 달이 지나지 않았다. 물론 그 아파트 입주민 모두가 이렇게 생각하고 행동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사유재산’과 ‘공유공간’ 사이에 틈을 좁히거나 개인 ‘마당’과 동네 ‘마당’을 연결하는 마을 공동체가 지닌 중요성을 간과할 수 없다. ‘마당’은 놀이 공간이며, 만나는 장소며, 삶을 공유하는 곳이었다. ‘마을’ 마당이 있었던 자리를 고급 고층 아파트가 빼앗고, 장벽 같은 철옹성을 쌓아 “세상은 사는 ‘곳’이 아니라 사는 ‘것’”이라고 항변하는 시대가 되었으니 답답할 뿐이다. ‘사람’이란 존재가 집값이나 부동산 가격보다 하찮게 여겨지는 세상에서 ‘공존’이나 ‘연대’ 혹은 ‘존엄’이나 ‘인권’을 말함이 가당키나 한 것인가!

하지만 암울하고 절망적인 현실에 직면해 있을 때 그냥 손 놓고 보고만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대안을 찾아보려고 아무리 애써도 뾰족한 묘수가 보이지 않는다. 마가복음에서 소개하는 말씀처럼 완전하게 무너지는 ‘전복’을 기대해야 할까? 성전 건물에 감탄하는 제자에게 예수께서 던진 말씀에 주목해 보자.

예수께서 성전을 떠나가실 때에, 제자들 가운데서 한 사람이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보십시오, 얼마나 굉장한 돌입니까! 얼마나 굉장한 건물들입니까!”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 큰 건물들을 보고 있느냐? 여기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다.”(마가복음 13:1-2)

멋지고 화려한 성전은 굉장한 돌과 굉장한 건물로 위풍당당하게 서 있었다. 하지만 ‘여기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다’라는 이 말씀을 누가 받아들일 수 있나? 눈앞에 보이는 휘황찬란하고 견고해 보이는 굉장한 건물이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무너짐을 상상하는 일이 바로 ‘전복’이다. 세상이 완전하게 뒤집히는 것을 상상하는 것으로 길을 찾을 수 없으니 다른 대안을 찾아본다.

10년 전인 2011년 7월 22일 노르웨이에서 있었던 테러 사건을 회상한다. 수도 오슬로에 있는 정부 청사에 폭탄을 설치해 8명을 죽게 한 범인은 곧바로 집권당 노동당 청년캠프가 열린 우퇴위아 섬으로 이동해 한 사람씩 조준해 죽이는 방식으로 69명을 죽였다. 77명이 죽고 319명이 부상한 이 사건은 극우주의, 기독교 근본주의, 반이슬람, 반다문화주의 성향을 지녔던 한 사람이 저지른 테러였다. 당시 노르웨이를 포함한 온 세계는 충격에 빠졌고, 어떻게 이런 사건이 일어났는지 질문했고 해답을 찾으려고 애썼다. 희생자를 기리는 자리에서 당시 노르웨이 총리였던 얀스 스톨텐베르그 총리는 이렇게 연설했다.

“테러에 대한 우리 응답은 더 많은 민주주의, 더 많은 개방성, 더 많은 인간애다. 노동당 청년캠프에 참석했던 한 소녀가 미국 씨엔엔(CNN) 방송과 인터뷰에서 한 말이 이를 가장 잘 보여준다. 그녀는 ‘만약 한 사람이 그렇게 많은 증오를 만들어낼 수 있다면, 우리 모두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랑이 얼마나 클지 상상해 보라’고 말했다.”

민주주의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무엇’이 아니라 우리가 하는 ‘무엇’이라고 교육학자 파커 파머는 말했다. 부동산 광풍에 미쳐 돌아가는 세상에서 찾을 수 있는 대안 중 하나가 바로 ‘우리가 하는 무엇’에 주목하는 일이다. 테러로 수많은 사람이 죽고 다친 엄중한 상황에서 ‘더 많은 민주주의, 더 많은 개방성, 더 많은 인간애’를 외칠 수 있는 그 ‘무엇’이 대안이다.

이 같은 ‘대안’이 모든 사람과 모든 세상을 바꿀 수는 없어도, 최소한 내가 살고 있는 곳과 내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 속에서 변화를 만드는 꿈을 꾼다. 이런 작은 꿈이라도 꿀 수 있어야 세상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사는 ‘곳’으로 만드는 여력을 마련할 수 있으리라. 사람이라는 존재가 그 무엇보다 소중하며, 그 존재를 얼굴만으로 환대하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는 꿈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다. 암울하고 절망적 소식을 뚫고 다시 일어나 세상은 더불어 사는 ‘곳’임을 외치는 사람들을 찾아 걷는다. 그 여정에 같이 걷는 사람들이 있기를 기대하며.

박흥순(다문화평화교육연구소장)  kncc@kncc.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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