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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신뢰를 주는 그리스도인(이사야 58:6-9)
이성훈 목사(명일한교회) | 승인 2021.12.26 15:43

6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7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8 그리하면 네 빛이 새벽 같이 비칠 것이며 네 치유가 급속할 것이며 네 공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9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2021년 저희 교회의 표어는 ‘빛을 비추는 교회’였습니다. 코로나 사태로 인해 어둡고 힘든 시기이지만, 우리가 세상에 빛을 비추고 희망을 전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자는 의미였습니다. 오늘 본문은 표어와 함께 한 해 동안 주보에 함께 적혀 있던 성경 본문입니다. 그리고 작년 마지막 주일에 함께 읽었던 본문이기도 합니다.

2021년 한 해 동안 우리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선을 행해야 한다거나 반대로 세상으로부터 손가락질 받으면 안 된다는 이야기를 드려왔습니다. 또 그리스도인은 세상 사람들이 절망하는 순간에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희망을 품어야 한다는 말씀도 전해드렸습니다.

그런데 2021년을 마무리하는 주일에 솔직히 저는 여러분께 어떤 말씀을 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올해는 다른 때와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한 해의 시작도 코로나로 인한 우울감에서 시작되었고, 한 해의 마지막 주일임에도 코로나로 인한 어려움은 마찬가지입니다. 이 우울감과 피로감이 너무나 오래 지속되고 있기에 내년을 맞이하면서 어떤 희망을 이야기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여러분께 계속해서 희망을 품어야 한다는 말씀을 드렸지만, 제가 제일 희망을 바라보지 못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구체적인 방향성이나 형태 없이 그저 선한 삶, 희망적인 삶만을 선포해왔기 때문에 저 자신에게도 성경의 말씀이 삶의 나침반이 되지 못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2021년의 마지막 주일에 우리가 한 해 동안 표어로 삼았던 말씀, 빛을 비추는 교회, 빛을 비추는 성도의 모습이 무엇일지를 함께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모습으로 한 해를 지내왔는지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성경 전반적인 이야기보다는 오늘 본문에 집중에서 생각해보겠습니다.

오늘 저희가 읽은 이사야 58장의 말씀은 상당히 구체적인 실천 사항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6절의 말씀은 어떠한 악에 의해 매여 있던 멍에와 압제와 결박을 풀어주는 일을 하라고 말합니다.

이사야가 선포한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은 어쩌면 단순할지도 모릅니다. 이들은 바벨론 포로 해방이라는 분명한 사건을 체험하였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을 포로에서 해방시켜준 페르시아를 향한 표현일 수도 있고, 자신들의 체험을 남에게 똑같이 행하면 안 된다는 금지 명령일 수도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애굽에서 종살이했기 때문에 나그네를 영접해야 한다는 오경의 명령과 유사한 맥락에서 볼 수도 있습니다.

지금 시대에 이 말씀을 어떤 실천으로 옮길 수 있을까요? 물론 지금 시대에도 말 그대로 누군가를 억압하고 압제하는 일들을 볼 수 있습니다. 굳이 해외의 어떤 나라를 예로 들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사건들은 종종 있었습니다. 2014년에 터졌던 전남 신안 염전 노예 사건이 그 예입니다.

바벨론 포로기와 같은 방식의 억압과 압제가 아니라 더 큰 의미에서 억압과 압제의 상황을 생각해볼 수도 있습니다.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비정규직 법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함께 사회가 특정 집단을 악한 존재, 미워해도 되는 존재로 규정하고 그들을 사회적으로 억압하고 있다면 이 사회에서도 여전히 억압과 압제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가 이 억압과 압제를 끊어낼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어떤 사항에 있어서는 우리가 실제로 참여해서 바꿔나갈 수 있는 부분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가 갑자기 시민단체 활동에 참여한다거나 잘못된 점을 고쳐야 한다는 시위 활동에 동참하는 일은 쉽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할 수 있는 일도 있습니다. 내 이익이나 내가 계속 가지고 있던 생각을 잠시 내려놓고 지금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을 살피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억압과 압제를 발견한다면, 나를 비롯한 내 주변 사람이 그런 행동에 동참하지 않도록, 그런 생각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도록 이끌어나갈 수 있습니다.

물론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기 때문에 내가 무엇인가를 깨달았다고 해서 주변 사람들의 생각을 쉽게 바꿀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그 억압과 압제가 만연한 사회 현상을 이야기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이사야의 선포를 지키고 따르는 일입니다.

7절에 나타난 말씀은 어쩌면 지키기 쉬워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 우리가 가장 먼저 생각하는 것은 기부일 것입니다. 우리가 기부를 통해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 통로는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어떤 분께서는 지금의 이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사람들이 돈으로 도우면 된다는 식의 사고방식을 갖는 게 문제일 수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현실적으로 제일 큰 도움이 되는 것이 돈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기부 문화가 꼭 잘못되었다고 말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군가 어려움에 처한 사람이 있다면 도울 수 있어야 합니다. 초대 교회는 자신의 재산을 모두 바쳐서까지 가난한 이들을 도우려고 했습니다. 우리가 그 정도까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내 돈이 아깝다는 생각은 버리고 남을 돕는 일에 동참할 수 있어야 합니다.

▲ Julius Schnorr von Carolsfeld, 「St. Roch distributing alms」 ⓒGetty Image

물론 돈으로만 누군가를 도울 수 있지는 않습니다. 누군가가 도움을 요청할 때 내 시간을 들이고 내 체력을 사용해서 도움을 줄 수도 있습니다. 7장에 나타난 ‘골육에게서 피한다’는 말씀은 그들의 요청을 외면하고 숨는다는 의미로 보입니다. 이사야는 멀리 있는 모르는 사람을 향한 도움에 대해서도 말한다고 볼 수 있지만, 가장 가까이 있는 형제를 돕는 일도 함께 이야기합니다.

여기에서 조금 넓게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누군가를 돕는 일은 우리가 어떤 사람의 어려움을 먼저 알아채고 행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남의 어려움을 알아채는 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아프리카 어린이들이 굶주리고 있다는 사실은 TV를 통해서 볼 수 있기에 금방 알 수 있지만, 내 주변의 누군가가 힘들어하고 어려워한다는 사실은 쉽게 알아차릴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자살을 선택하는 사람들은 이를 실행하기 전에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신호를 보낸다고 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그 신호를 인식하지 못합니다. 설마 극단적 선택을 할까 하는 마음에서 그럴 수도 있지만, 자신의 기준 속에서 그 정도는 버틸만 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누군가의 어려움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이유는 그 사람이 우리에게 직접적인 도움 요청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것이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의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도움을 요청해도 된다는 신뢰를 그들에게 주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육아에 관련해서 전문가들의 이야기가 TV에 많이 나옵니다. 이런 프로그램들을 보다보면 자녀와 부모 사이에 대화가 끊어지고 자녀가 부모에게 어떤 이야기도 하지 않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피상적인 대화는 나눌지 몰라도 자신의 어려움이나 힘든 점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자녀가 부모를 신뢰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부모가 자녀를 키우면서 어떤 신뢰도 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누군가 내 주변에 있는 사람이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까? 내가 상대방에게 신뢰를 주지 못했다면, 그 상대방은 당연히 나에게 어려움이나 아픔을 이야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신뢰감을 넘어서, 우리는 믿을 수 있는 사람입니까? 자기 이익을 탐하는 사람, 왠지 거짓을 말하고 있는 듯한 사람, 그저 말뿐인 사람은 남에게 믿음을 주지 못합니다. 저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남에게 믿음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회는 믿음을 주는 사람들의 모임이 되어야 합니다. 전도사 생활을 할 때부터 목회자는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면 안 된다는 이야기를 계속 들어왔습니다. 성도님들과 아무리 친해졌다 할지라도 약점이 될만한 점을 드러내선 안 된다고 들어왔습니다. 언젠가 내가 스스로 드러낸 약점이 나에게 비수가 되어서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이는 실제로 많은 교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기도 합니다. 목회자가 성도님들을 믿지 못하고, 성도님들은 서로서로를 믿지 못합니다. 믿었던 사람이 언제 나를 공격하게 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그런 교회에 있다 보면 편안한 맘이 들지 않습니다. 항상 스스로를 조심해야하고 자신을 감추려 하게 됩니다. 언제나 날카로운 가시 위를 걷는 느낌입니다.

그런데 정반대의 교회도 있습니다. 그냥 앉아서 예배드리기만 해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교회가 있습니다. 이곳에 있는 누구도 나를 해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드는 교회도 있습니다. 믿음을 주는 성도님들만 계시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이런 곳이 되어야 합니다. 또 그리스도인은 교회에서 뿐만 아니라 세상 속에서 믿음을 주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저는 이것이 세상 속에 빛을 비추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사회의 억압과 압제를 바라보고 이를 고쳐나가려고 노력하는 삶, 어려움에 빠진 사람들을 도우려는 삶, 모두 중요합니다. 그런데 저는 믿음을 주는 삶이 지금 이 사회 속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믿음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일이 지금 시대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제일 중요한 지침이라고 생각합니다.

2021년이 끝나고 2022년이 됩니다. 2021년, 우리는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는 존재였는지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우리가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믿을 수 있는 사람,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다짐했으면 합니다.

우리 삶에서 자신의 이익을 도외시 할 순 없지만, 그래도 내 이익만 먼저 생각하거나 내가 더 많은 것을 차지하려고 애쓰지 않기에,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거짓을 이야기하면서 자신이 추구하는 것만을 쫓으려 하지 않기에 다른 사람에게 믿음을 줄 수 있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때 그리스도의 빛이 세상에 비춰질 줄 믿습니다.

또한 우리가 이런 삶을 살아갈 때에 11절에 나타난 말씀과 같이 하나님께서 메마른 곳에서도 우리의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우리의 뼈를 견고하게 하셔서, 물 댄 동산 같은 삶, 물이 끊이지 않는 샘 같은 삶을 살아가도록 이끄실 줄 믿습니다. 이런 은혜를 받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길 간구하며 노력합시다.

이성훈 목사(명일한교회)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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