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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박함을 견지하고 사욕을 줄여라見素抱樸 少私寡欲(견소포박 소사과욕, 출애굽기 20:17)
홍인식 목사 | 승인 2021.12.27 15:49
▲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는 소유욕의 절제를 의미한다. ⓒGetty Image

내년 3월에 있을 제20대 대통령 선거가 온통 우리의 관심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나의 머리에는 20년 전인 2002년 고 노무현 후보가 승리했던 제16대 대통령 선거가 머리에 떠오릅니다. 고 노무현 후보는 모든 예상을 뒤엎고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습니다. 당시 각종 언론에서는 노무현 당선자의 승리의 이유를 여러 각도에서 해석하는 기사를 내놓았습니다.

저는 어제 하루 동안 인터넷에 쏟아지는 수많은 글들을 읽으면서 저 나름대로 해석을 해 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고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가 선거 하루 전 한 인터넷 신문과 가진 인터뷰의 내용을 보고 바로 거기에서 하늘의 뜻이 노무현 후보에게로 갔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인터뷰 기사의 한 부분을 그대로 옮겨 봅니다.

‘공동정부’ 문제를 물었다. 공동정부라는 단어는 사용하지 않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초기부터 같이 운영을 한다는 말이 곧 그 말 아닌가 하는 질문이었다. 합의 과정 중에 그런 의미가 들어 있었는가 물었더니 그는 단호하게 “공동정부에 관해서는 일체 약속하지 않았다.”고 답했다. 국민통합21 측에서 요구는 했었지 않았느냐고 했으나 “어떻든 저는 약속하지 않았습니다.”라고만 답했다. 알려진 바로는 국민통합21의 공동정부 요구를 놓고 노 후보와 당내 의원들, 핵심 참모들은 며칠 동안 날밤을 새우다시피 하면서 격렬한 토론을 했다. 그리고 대세는 공동정부안을 받아들이자는 것이었다. 나중에는 거의 노 후보 혼자 남을 정도로 주변에서의 강력한 요구가 있었다. 그렇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노 후보는 이렇게 답했다. “우리 참모들, 선대위 간부들하고 많이 싸웠습니다. 선거 때의 상황에서 약속은 경솔한 약속이 될 가능성이 대단히 높습니다. 절박한 상황에 있기 때문이죠. 그런데 선거가 끝나고 보면 그것이 엄청난 제약이 될 수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 초당적으로 국가적 인재를 모으고 여야 동반자 관계까지를 꾸려 나갈 수 있는 초당적 인재 영입을 해야 하는데, 정몽준 대표와 저 사이에 인사에 관해서 합의가 이뤄져 있으면 그것이 제약이 되지 않겠는가. 그래서 앞으로 상황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도록 여지를 두어야 하고, 정책 공조까지는 약속했지만, 그 이상은 절대 할 수 없다는 것이 제 마지막 결론이었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 정몽준 대표도 명확한 이해를 갖고 있는지 물었다. “물론입니다. (그로서는)어떤 기대도 있겠지만, 저로선 구속받을 어떤 약속도 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참모들과 대화하면서 ‘내가 낙선해도 좋으니 제대로 하는 대통령이 나오도록 하자. 제대로 할 수 있는 대통령이 아니면 저는 대통령 하지 않겠다.’ 했습니다.” 실제로 공동정부 문제가 마무리돼 갈 즈음 노 후보 측근으로부터 비슷한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노 후보가 결론을 지으며 “실패한 대통령이 되느니 실패한 후보가 되겠다.”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저는 당시 기사를 읽으면서 고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은 정몽준의 공동정부 요청을 강력하게 거부하면서 차라리 실패하는 대통령보다는 실패한 후보로 남겠다는 그의 삶의 자세를 승리의 원인으로 생각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에게는 대통령 되겠다는 욕심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소신과 원칙을 지킬 수 있었고 고비마다 승부수를 던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승부수는 적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인이라는 이상을 끊고
지혜로운 자의 형상을 버리면
백성들의 이익은 훨씬 커진다.
인의의 관념을 끊어 버리면
백성들은 효성과 인자함을 회복하게 된다,
기교와 이로움을 끊어 버리면 
도적이 없어진다
이 세 가지는
모두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니
충분치가 않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방침을 지키게 한다.
소박함을 견지하고
사욕을 줄여라(도덕경 19장)

위에 기록한 도덕경 19장을 한 마디로 그리고 간단하고 쉽게 요약하면 인생에 있어서 쓸데없는 것에 정신을 팔지 않고 소박함을 끝까지 지켜나가며 부질없는 욕심에 자신을 맡기지 않으면 행복해 질 수 있다는 내용입니다.

사람이 소박함을 견지하고 사욕을 줄일 수만 있다면(견소포박 소사과욕) 많은 일에서 승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지나친 욕심과 집착에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성서는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죽음을 낳는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야고보서 1:15) 

요즘 저는 사람의 생애의 행복이 무엇인가를 자주 생각해 봅니다. 나이가 먹어가면서 그리고 목회의 연조가 깊어지면서 점차 어떠한 업적을 남기는 것보다는 인생의 의미와 행복함에 대하여 생각해 보곤 합니다. 업적보다는 의미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봅니다. 인생의 길이가 그리 길지 않은 것 같은데 괜한 데에 신경과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과연 어떤 인생이 의미 있고 행복한 인생인가요? 오늘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계명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욕심의 여부입니다. 탐심의 여부입니다. 오늘의 계명, 제10계명은 “너희 이웃의 집을 탐내지 못한다”라고 말합니다. ‘너희 이웃의 소유는 어떤 것도 탐내지 못한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의 문제는 ‘이웃의 것을 탐하는 데’에 있습니다. 탐심, 욕심이 우리네 인생의 행복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탐심과 욕심이 우리로 행복한 삶을 살아가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탐하지 말라’ 는 제10 계명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먼저. 탐욕의 문화에 현혹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오늘의 문화를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탐욕의 문화’입니다. 보이는 것이, 들리는 것이, 만져지는 것들 모두가 우리로 욕심을 갖게 만듭니다. 마치 뱀이 하와를 유혹하여 금단의 열매를 보게 만들어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다.”라는 감정을 갖게 했던 것처럼 오늘의 사회는 늘 욕심을 갖게 합니다.

오늘의 욕심과 탐심의 문화는 만족을 갖게 하지 못합니다. 늘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도록 만듭니다. 그래서 만족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상대방과 비교함으로써 그를 이기려고 하는 경쟁심을 유발시킵니다. 어떠한 방법을 사용하던지 상대방을 이겨야 합니다. 그렇게 됨으로써 우리의 삶의 끝없는 경쟁의 세계를 향하게 됩니다.

그런 경쟁과 비교의 세상은 행복을 보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탐심의 문화는 끝없는 욕망을 갖도록 충동하면서 우리에게 쉼을 빼앗아 갑니다. 제10 계명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못한다.” 오늘 우리가 행복한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은 남과의 비교를 통하여 남의 것을 탐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이웃의 집을 탐내지 않기’ 위해서는 이웃에 대한 존중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18세기와 19세기의 세계역사는 미국과 영국을 중심으로 한 서구열강의 아시아와 아프리카 대륙에 대한 식민지 정책과 제국주의가 판치고 있었습니다. 서구열강은 아시아와 아프리카 여러 나라들을 침략하여 무자비하게 이들 국가들을 착취해 갔습니다. 그 여파는 아직도 남아서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여러 국가들이 극심한 가난을 경험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서구열강들이 이 나라들을 침략할 때 그리고 그 나라가 소유한 모든 것들을 빼앗아 갈 때 그들은 이웃 나라를 전혀 존중하지 않았습니다. 흑인들에게 그리고 아시아 민중들에게도 영혼이 있느냐 하는 질문을 던지면서 마음대로 우리의 것을 탈취해 갔습니다.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이나 영국의 런던 박물관에는 아시아와 아프리카 열강들의 문화적 유산이 그대로 보관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인도나 중국의 선불교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인도나 중국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프랑스나 영국으로 유학을 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옛 문서와 문화유적들이 그곳에 보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웃에 대한 존중 없이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제10 계명은 이웃이 아무리 약하게 보일지라도 그리고 보잘 것 없이 보일지라도 그를 존중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서로서로를 존중하게 될 때 남의 것을 탐내는 문화는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제10 계명은 우리에게 탐욕의 문화의 문제를 직시하고 이웃을 진정으로 존중할 것을 요구하면서 또 다른 삶의 정신과 원리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절제를 통한 행복한 삶의 추구”가 그것입니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못한다.’라는 계명은 진정 우리의 삶의 행복을 위한 것입니다. 인간은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태어났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를 에덴동산에 두신 것은 우리에게 행복한 삶을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에덴동산은 인간의 행복한 삶의 상징입니다. 우리는 태초에 행복하게 살기 위해 태어난 사람입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노래처럼 우리는 행복하게 살기 위해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욕심으로 에덴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이제 에덴을 회복하는 길은 오직 하나입니다. 結者解之(결자해지), 묶은 사람이 풀어야 한다는 말처럼 욕심으로 묶였으니 욕심절제로 풀어야 합니다. 믿음은 왜 갖습니까? 결국, 잃어버린 행복한 삶을 되찾아 보자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잃어버린 에덴에서 다시 살겠다는 것에 대한 의사표시가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믿음의 훈련이란 자기통제의 과정입니다. 욕심과 탐심을 멀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평생을 통한 꾸준한 훈련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훈련을 통하여 조금씩 욕심과 탐심이 절제되어 진다면 우리는 하루가 다르게 에덴을 향하여 나가게 되는 것이고 행복한 삶은 우리를 향하여 성큼성큼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욕심과 탐심을 버리고 자기절제를 훈련하게 되면 탐욕의 문화에 젖지 않게 되고 이웃을 존중하며 살게 될 뿐만 아니라 자유의 삶을 살게 됩니다. 자기절제를 이루어 가게 되면 탐심과 욕심으로 가득 차 있던 시절에는 절대 볼 수 없었던 아름다운 것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 시절에는 들을 수 없었던 여러 가지 아름다운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경험은 신비한 하나님 나라의 세계를 경험하도록 해 줍니다.

우리는 모두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탐심과 욕심에 대한 절제를 훈련해야만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오늘의 제10 계명은 우리에게 행복한 삶을 보장해 주는 하나님의 귀한 명령입니다. “너희는 이웃의 집을 탐내지 못한다” 하나님은 모두가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문제는 우리의 욕심과 탐심입니다.

홍인식 목사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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