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학술 칼럼
선교사 죽음이 몰고온 조선 선교 논쟁과 조선 선교 공인밀알이 된 데이비스와 맥켄지 선교사의 내한과 죽음 ⑷
이이소 | 승인 2022.01.08 16:12
▲ 1905년 맥켄지 선교사의 아내인 메리 선교사(왼쪽)가 동료와 조선인 장로로부터 한국어 교육을 받고 있다.

데이비스와 맥켄지 선교사는 평범하지 않은 죽음을 죽었다. 그러나 그들은 사람들 가슴에 불러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생명을 바쳐 사랑한 한국을 섬기게 만들었다. 데이비스의 죽음이 계기가 되어 호주 교회는 한국 선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1891년 존 맥케이(J. H. Mackay) 부부, 메리 파우셋(May Fawsett) 양, 벨레 맨지스(Belle Menzies)를 선교사로 파송하였다.(1)

캐나다장로교는 맥켄지 죽음으로 야기된 한국 선교 찬반에 대한 3년의 긴 논쟁을 1897년 10월 7일 총회에서 111대 25의 투표결과로 막을 내렸다. 그리고 다음 해 해외선교위원회는 2월 15일 모임에서 로버트 그리어슨(Robert Grierson)과 윌리엄 러퍼스 푸트(William Rufus Foote)를 선교사로 임명하였으며 4월 모임에서 던칸 맥레(Duncan M. McRae)를 세 번째 한국 선교사로 임명하였다. 세 사람은 1898년 7월 20일 핼리팩스를 떠나 9월 7일 제물포에 도착하여 맥켄지의 뒤를 이어받았다.

때이른 죽음이 호주와 캐나다 교회를 움직였다

그들은 호주장로교와 캐나다장로교를 움직여서 세 가지 큰일을 하였다. 첫째 그들의 죽음은 호주장로교와 캐나다장로교에 한국 선교에 대한 관심을 크게 일깨웠다. 당시 유럽과 신대륙의 교회들은 인도, 중국, 일본 선교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한국은 기독교를 박해하는 배타적이며 폐쇄적인 위험한 나라로서 서구교회가 선호하는 선교지가 아니었다. 게다가 당시 호주장로교는 원주민 선교, 중국 이민자 선교와 남태평양의 뉴헤브리즈 선교에 집중하고 있었고 캐나다장로교는 쿠바의 트리니다드와 가이아나공화국의 데머라러 그리고 뉴 헤브리즈에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데이비스와 맥켄지의 한국 선교는 자신들의 소속교단과 교회의 공식적인 파송이나 관심과 지원을 받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공적인 지원을 호소하거나 기다리지 않고 개인의 자격으로 데이비스는 청년연합회의 도움으로, 맥켄지는 개별 후원자들의 도움을 힘입어 용감하고 무식하게 한국에 왔다. 그들은 믿음으로 불확실한 한국, 불확실한 미래를 향하여 뚜벅뚜벅 걸어왔고 불확실에 삼켜져 비극적인 죽음을 당하였다. 스데반의 죽음으로 초대교회의 선교가 확산되는 것처럼 그들의 자기희생적인 모범과 용기는 호주 장로교와 캐나다장로교에 한국 선교에 대한 관심과 열망을 고취하였다. 그리하여 호주와 캐나다장로교는 한국 선교를 교단의 공적인 소명으로 확정하기에 이르렀다.

둘째 그들의 죽음은 소속교단 해외선교위원회의 선교활동과 정책을 적극적으로 변화시켰다. 결과적으로 호주와 캐나다장로교는 한국 선교를 공식적인 교단의 활동과 사업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데이비스를 파송한 남청년친교연합회는 교단의 직속 해외선교부는 아니었지만 해외선교위원회의 인정을 받아 호주장로교의 선교사를 파송하는 공식적인 단체로 탈바꿈하였다. 그리하여 1891년 존 맥케이 (J. H. Mackay) 부부, 1894년에 앤드류 아담스(Andrew Adamson) 부부, 1902년에는 커렐 (H. Curell) 의사 등을 파송하여 한국의 ‘장로교선교연합공의회’에 참여하였으며 경남전역을 호주장로회 선교구로 확정하였다.

또한 부산, 진주, 마산, 통영, 거창에 선교부를 설립하였다. 당시 해외선교위원회는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하는 공식적인 책임을 지지않았지만 부산 ‘선교관’ 건축을 위하여 기금을 지원하였으며 남청년친교연합회와 여전도연합회의 선교사 파송에 대하여 자문과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데이비스 사후 9년째가 되는 1909년에 한국 선교에 공식적으로 재정적인 책임을 감당하기 시작하였다.(2)

맥켄지의 죽음이 계기가 되어 캐나다장로교 동부분과 해외선교부는 한국 선교를 공적인 사업으로 결정함과 동시에 그리어슨, 푸트, 던칸 맥레를 공식 선교사로 파송하였다. 그들은 북장로교, 호주장로교, 남장로교와 함께 ‘장로교선교연합공의회’에 참여하여 함경북도 전역과 함경남도 원산, 성진, 문천 등 북부지역을 선교구로 확정하였다. 그리고 부산, 원산, 함흥, 회령과 용정에 선교부를 개설하였다.

선교사들은 교단의 공식적인 지원으로 서로 협력하며 지방 선교부 중심으로 지역을 분할하여 복음을 전하였다. 그들은 유교의 가치관과 질서가 무너져 혼란에 빠져 방황하는 한국인들에게 복음으로 새 희망을 주었으며, 주권을 상실하고 절망 속에서 탄식하는 한국인들에게 조국 광복과 하나님 나라에의 기대와 용기를 주었다. 뿐만 아니라 학교와 병원 등을 세워 망국 백성들의 고난과 아픔에 동참하였으며 한국 근대화의 물코를 트며 다양한 황동을 통하여 민주주의 체험과 생명의 소중함을 각인시키며 각 분야에 전문적인 인재를 양성해주었다.

셋째 그들의 죽음은 여성들의 선교 의식과 조직의 필요성을 일깨웠다. 최초 선교사의 사망소식은 소속교단의 여성들을 자각시켜 스스로 연합회를 조직하여 선교활동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주체가 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메리 데이비스는 멜버른으로 돌아와서 한국 선교에 대한 호소를 하며 후원금을 기부하였다. 데이비스의 여동생 사라는 발라랏에서, 데이비스 동생 존 데이비스의 부인은 질롱에서, 하퍼 부인은 멜버른에서 여성 선교운동의 조직를 구상하였고(3) 그들의 제안이 동기가 되어 1890년 8월 25일 호주장로교 여전도연합회가 조직되었다. 조직 후 바로 그들은 1891년 세 명의 미혼 여선교사, 벨레 멘지스(Belle Menizies), 진 페리(Jean Perry), 메리 파우셋(Marry Fawsett)를 한국에 선교사로 파송하였다. 한국 선교사를 자원한 여성들이 여성들의 후원으로 앞을 다투어 한국으로 들어가서 학교 교육, 의료 활동, 직업훈련 등 제 분야에서 빛을 발하였다.

맥켄지의 죽음의 소식을 들은 캐나다장로교의 여성들은 또한 기도하며 회원들의 의견을 종합하였다. 한국 선교에 대한 부정적인 흐름에 반하여 1897년 2월 23일 ‘부인여성해외선교회’ 대표가 해외선교위원회 정기 모임에서 ‘한국 선교’에 대한 강력한 주장을 폈다. 그는 한국 선교를 시작해야 하는 8가지 긍정적인 이유를 말하였다.

“한국 선교가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있으며, 맥켄지 재산을 소유하고 있는 해외선교위원회가  그의 유산과 두 명의 선교 지원자를 다른 곳에 인계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으며, 한국 선교가 허락되면 한국 선교기금과 여타 선교기금이 해외선교위원회 기금으로 통합되므로 선교부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지 않을 것이며, 한국 기후와 캐나다 기후가 비슷하기 때문에 한국은 선교 지망생에게 매력이 있으며, 한국 선교에 대한 관심이 고조된 때야말로 한국 선교에 대한 최상의 기회이며, ‘부인여성해외선교위원회’가 한국 선교에 대한 진심어린 지원을 약속하였으며, 한국 선교문제로 선교에 대한 관심이 한껏 고조되었으므로 기존의 선교 단체들도 함께 후원을 받게 될 것이며, 맥켄지가 개인의 자격으로 떠났으나 하나님께서 18개월 동안 그의 사역을 놀랍게 축복하였으므로 한국 선교를 승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해외선교위원회는 여성 대표의 주장에 크게 고무되어 각 노회들에게 ‘부인여성해외선교회’의 제안을 구체화시킬 수 있는 사업보고서를 작성할 것과 한국 선교를 위해 개 교회가 책임져야할 몫에 대한 의견을 5월 중순 전까지 해외선교위원회에 제출하게 하였다. 그리고 결과를 취합하여 총회에 보고하고 총회가 한국 선교를 결정하는 길을 택하였다. ‘부인여성해외선교회’의 한국 선교에 대한 강력한 요청으로 말미암아 선교 논쟁이 다시 크게 일어났다. 한국 선교에 찬성하게 된 맥케이(N. Mckay) 박사는 “한국에서 온 선교 요청 편지, ‘부인여성해외선교회’의 주장, 한국의 어려운 사정들에 대한 글을 읽으며 한국의 호소를 전혀 들으려고 하지 않는 교단에 충성한 것이 부끄럽다.”고 고백하였다.

그러나 이에 반대하는 자들은 해외선교위원회의 빚과 한국 선교 때문에 진행되고 있는 선교 현장에 대한 지원의 감소에 대한 염려, 한국이 이미 미국장로교들의 막강한 지원을 받고 있는 점을 들어서 반대하였으며 특별히 에브라임 스코트(Ephraim Scott) 박사는 한국 선교 때문에 교회 전체가 동요하는 것을 우려하였으며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많은 선교 후원 약속을 신뢰할 수 없는 것으로 무시하였다. 그런 스코트의 반론에 대하여 한 ‘부인여성해외선교회’의 회원이 반론을 제기하였으며 ‘선교사업에 임할 때 선교적 열정을 고취하는 것이 좌절시키는 것보다 올바른 일’이라고 일침을 가하였다.

마침내 1897년 10월 5일 몽톤의 성 요한교회에서 열린 정기연회에서 한국 선교사업안이 통과됨으로서 ‘부인여성해외선교회’는 한국 선교의 제안자로서 한축이 되었다. 여성들이 맥켄지를 지원할 때 매리타임지역 여성선교위원회에서 지도력을 발휘하였던 루이스 맥컬리는 캐나다장로교의 최초의 정식 여성 선교사로 임명되어 1900년 한국에 도착하였다. ‘부인여성해외선교회’는 후원 약속대로 1901년에 케이트 맥밀란, 1903년에 제니 로브, 1905년에 캐서린 메어를 선교사로 파송하였다.(4)

1909년, 캐나다장로교 한국 선교 10년이 된 해에, 남자 선교사는 6명이었지만 여자 선교사는 8명이었다. 4명은 부인 선교사들이었으며 4명은 독신 여성 선교사로서 이들은 병원과 학교와 교회 목회 영역에서 희생적인 봉사로 북장로교에서 이어받은 14개의 교회를 134개로 성장시키는데 밑거름이 되었다.

특별히 케이트 맥밀란은 지방 순회 의료선교에서, 맥컬리는 여성들을 위한 교육 분야에서 탁월하였다. 맥컬리는 순회 전도 프로그램과 원산, 함흥, 성진에 있는 여성 특별반에서 성서공부와 여성 지도력 개발교육을 실시하였다. 그는 1909년 함흥에서 첫 번째 한국 여성선교위원회를 조직하였다. 그의 한국 여성 지도력 개발 교육은 캐나다 선교부 지역은 물론이고 한국 전 지역에서 실시되었다.(5)

헛된 죽음이 아니었다

데이비스와 맥켄지의 죽음은 한국을 호주와 캐나다장로교의 공식적인 해외선교지역으로 만들었으며 두 나라 장로교 해외선교위원회의 선교활동과 정책을 긍정적으로 변화시켰다. 또한 캐나다선교부의 경우, 한국 선교를 지원하는 과정에서 경쟁 관계에 있던 동부 분과와 서부 분과가 ‘캐나다장로회선교국’으로 통합되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죽음은 여성들의 선교의식을 고취하여 여전도회를 조직하거나 기성의 조직을 강화하여 그들로 하여금 선교적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환경과 기회를 제공하였다.

후배들에게 한국에의 길을 열어준 두 선교사에게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두 사람 다 대학 공부를 중단하고 도중에 인도와 래브라도해협에서 2년과 1년 반 동안 자원봉사를 한 것, 한국 선교 소명을 확신하였을 때 교장직과 담임목사직을 과감히 포기한 것, 공적인 후원 없이 선교 현장에 무모하고 용감하고 뛰어든 것, 한국에서는 철저하게 자신을 복종시켜 초라한 한국인의 자리에서 한국인처럼 살려는 의지가 강했던 것 등이다.

그들은 조국을 떠나 올 때, 자신들이 꿈꾸던 선교비전과는 다르게 불타는 선교 용광로가 되어 불확실하고 불투명하고 불안한 미래에 자신들을 던져 짧은 시간에 생명을 활활 불살랐다. 당시 아무도 그들의 비상한 죽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순수와 열정, 희생과 용기, 겸허와 사랑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그들의 죽음의 의미를 고뇌하며 모여서 기도하였고 그들의 죽음으로 빈자리를 채우길 열망하였다. 그들의 죽음에 상처받은 사람들은 위로를 받았으며 마침내 그들의 뒤를 따라 많은 선교사들이 한국을 향해 떠났다. 그리하여 데이비스와 맥켄지는 한 알의 밀알로 땅에 떨어져 죽은 자로서 최초의 호주 선교사, 최초의 캐나다 선교사가 되는 영예를 누리게 되었다.

하나님은 단순하고 무모하고 용감한 그들의 죽음을 통하여 호주와 캐나다장로교를 한국 선교 현장으로 초청하셨으며 미국의 장로교와 다른 모습으로 한국을 섬기게 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두 분 선교사의 짧은 생애와 죽음을 상기할 때 마다 눈물범벅이 된다. 아무 것도 아닌 키쇼르와 존 밥의 삶과 죽음을 기억하며 내가 살아야 하는 삶이 그들처럼 끊임없이 하나님만 바라며 무모하고 용감하게 버리고 떠나야하기 때문일 것이다. 맥켄지가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며 마지막 날 일기에 남긴 그의 신앙고백을 생각한다.

내 마음은 더할 나위 없이 평화롭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유일한 희망이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이루십니다.

미주

(미주 1) 헤리 로즈, 최재건 번역, 『미국 북장로교 한국 선교회사』 (연세대학교 출판부, 2010), 131; 에디스 커·조지 앤더슨, 양명득 편역, 『호주장로교 한국 선교 역사 1889-1941』 (동연, 2017), 50.
(미주 2) 에디스 커·조지 앤더슨, 『호주장로교 한국 선교 역사 1889-1941』, 56.
(미주 3) 김명구, 『한국 기독교사 1-1945년까지』 (예영커뮤니케이션, 2018), 164; 블로그 ‘크리스천 메이트’, ❮한국에 온 최초의 호주 선교사 ‘데이비스’❯, 2019.11.29.
(미주 4) 윌리엄 스코트, 연규홍 번역, 『한국에 온 캐나다인들』 (한국기독교장로회출판사, 2009), 118.
(미주 5) 윌리엄 스코트, 『한국에 온 캐나다인들』, 145.

 

참고서적

⦁ 에디스 커·조지 앤더슨 저, 양명득 편역, 『호주장로교 한국 선교 역사 1889-1941』, 동연, 2017
⦁ 윌리엄 스코트, 연규홍 번역, 『한국에 온 캐나다인들』, 한국기독교장로회출판사, 2009
⦁ 민경배, 『한국 기독교회사⌟, 연세대학교 대학출판문화원, 2017
⦁ 김명구, 『한국 기독교사 1-1945년까지』, 예영커뮤니케이션, 2018
⦁ 전병호, 『이야기 전킨 선교사』, 군산시기독교연합회전킨기념사업회, 2018
⦁ 류대영, 『한 권으로 읽는 한국 기독교의 역사』,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19
⦁ 헤리 로즈, 최재건 번역, 『미국 북장로교 한국 선교회사』, 연세디학교 출판부, 2010
⦁ 헬렌 F. 맥레, 연규홍 번역, 『팔룡산의 호랑이』, 한신대학교출판부, 2010
⦁ 도리스 그리어슨 엮음, 연규홍 번역, 『조선을 향한 머나먼 여정』, 한신대학교출판부, 2014

이이소  webmaster@ecumenian.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이소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종로구 김상옥로 30, 402호  |  제호 : 에큐메니안
대표전화 : 070-4252-0176  |  팩스 : 0303-3442-0176  |  등록번호 : 서울 자 00392  |  등록일 : 2012.10.22
발행인 : 홍인식  |  편집인 : 이정훈  |  청소년보호책임자 : 홍인식  |  E-mail : webmaster@ecumenian.com
Copyright © 2022 에큐메니안.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