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학술 칼럼
신학, 하나님과 동행하는 행복한 학문칼 바르트, 신학의 학문성과 과제를 말하다 ⑷
최영 소장(기독교장로회 목회와신학연구소) | 승인 2022.01.22 16:35
▲ 바젤에서 강의하는 칼 바르트 ⓒCenter for Barth Studies(https://barth.ptsem.edu/biography)

바르트는 『교회 교의학』 시기를 거치며 점점 더 분명하게 예수 그리스도에 집중하였고, 이 그리스도론적 집중은 1953년부터 펴내기 시작하여 1959년에 완성한 세 권의 화해론(2,984쪽)에서 절정에 달하였다. 그리스도론에 대한 집중은, 역설적으로, 바르트에게 놀라운 영역들에로 여행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였다. 그의 저서에서 우리는, 예컨대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che)와 장 뽈 사르트르(Jean Paul Sartre), 라이프니츠(Leibniz)와 레싱(Lessing)에 대한 광범위한 부분들을 발견한다. 또한 무엇보다도 『교회 교의학』 화해론 제3권에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과 인류, 그리고 세계와의 화해사건에 비추어 피조세계의 모든 현실들을 이해하고자 했다. 그러므로 바르트에게 그리스도론은 인간, 자연, 그리고 창조를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1)

그리스도 안에서 찾은 신학의 학문성

바르트는 1961/62년 겨울학기에 『개신교 신학 입문』(2)에 대한 강의와 함께 40년에 걸치는 그의 긴 교수경력을 끝마쳤다. 여기서 그는 ‘화해론’에서 더욱 심화되고 확장된 신학에 대한 그의 이해를 매우 유려하게 표현하였다. 신학은 다른 모든 학문들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일정한 대상 혹은 대상 영역을 현상으로 인지하되 이 대상에 의해서 확정된 방법론에 의하여 그것을 인지하고 … 그것의 실존의 효력을 언어로 표현하는” 학문이다.

그러나 바르트는 여기에 멈추지 않고 보다 명백하게 학문으로서의 신학을 정의한다. ‘신학’은 “하나의 특수한(대단히 특수한) 학문으로서 하나님을 인지하고 이해하며 언어로 표현하는” 과제를 갖고 있다.(3) 바르트가 관심을 갖는 이 신학은 “프로테스탄트” 신학으로, 신약성서와 16세기 종교개혁에서 그 유산을 물려받은 신학이다. 따라서 이 신학은 바르트가 『로마서 강해』 제2판 이후 계속 이의를 제기했던, 하나님에 관한 주관적인 감정이나 관념들에 근거를 두는 다른 신학들과 대조적으로 의식적으로 하나님을 그 대상으로 삼는 신학이다.

“하나님이 인간의 학문의 대상이 되고 이 학문의 근원과 규범이 될 때 바로 여기에 프로테스탄트 신학이 있다.”(4)

그러므로 이 신학은 무엇보다 그리고 포괄적으로 하나님 자신에 관심을 갖는다. 그것의 지배적인 전제는 “하나님의 자기실존의 증명과 주권의 증명”이다.(5) 이 우선순위를 뒤집는 것은, 예컨대 신학자들이 하나님을 입증하려고 시도하거나, 혹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관계를 지시하는 대신에, 하나님을 인간에게 관계시키려는 시도는 신학을 “바벨론 포로”가 되게 하는 것이다.(6) 왜냐하면 이 신학의 대상은 하나님의 행동의 역사에 나타난 살아 계신 하나님이기 때문이며, 따라서 신학은 이 행동사를 통하여 자신을 알리는 하나님을 따라가면서 생생한 하나님의 행동사의 과정을 인지하고 숙고하여 말하고 표현할 경우에만 자기의 본분을 다할 수 있는 하나의 ‘순례의 신학’(theologia viatorum)이기 때문이다.(7)

바르트는 여기서 40여년 전 『로마서 강해』 시기의 최초의 신학적 통찰을 전혀 새롭게 표현해낸다. 하나님은 그 어떤 존재에 의해서도 제한 받거나 규정될 수 없음은 틀림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위엄에 속박된 자가 아니며, ‘전적 타자’인 것만도 아니다. 성서의 증언에 따르면, 하나님은 “고귀하고 고상할 뿐만 아니라, 인간 속에 오실 만큼 낮고 천하신 분이시다... 이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서 그리고 인간과 더불어 하시기를 원하시며 행하시는 일이란, 돕는 일이요, 치유하는 일이요, 바로잡는 일이요, 따라서 평화와 기쁨을 일으키는 일이다.”(8) 바르트는 프로테스탄트 신학이 정확히 이 하나님, 곧 임마누엘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행복한” 학문이라고 선언한다.(9) 그런데 어떻게 이 하나님을 대상으로 하는 신학이 대학교 내의 일반 학문들 가운데서 정당하게 자신의 자리를 확보할 수 있을까?

바르트는 19세기 신학의 실패를 회상하면서 신학의 학문성은 무엇보다도 “신학이 다른 학문들 사이에서 어떤 외적인 자리 확보와 변증학을 일단 포기하고 엄격히 자신의 일에 몰두하며 자신의 일을 숙고하려고 할 때”, 그 주변 세계를 향하여 “길게 설명하거나 구구히 변명하지 않고 자기가 걸어야 할 길을 자기의 법도대로 굳건히” 걸을 때, 확보된다고 천명한다. 여기서 “신학의 ‘자리’는 자기내부로부터 제시된 출발점이며 자신의 대상으로부터 필연적으로 연유하는 출발점이다.”(10)

물론, 하나의 학문으로서 신학은 인간의 학문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시되지도 않는다. 그러나 본래 ‘신학’(theology)이 하나님(theos)에 의해 가능하게 되고 확정된 ‘말들’(logia)을 지시한다고 할 때, 신학이 의미하는 것은 다만 “저 말씀에 대한 인간적인 ‘유비’(ana-logia)”와 다른 무엇이 아니다. 말하자면, 신학은 “그 어떤 창조의 행동이 아니라 그것의 창조자와 그의 창조의 행위에 대하여 성실하게 응답하는 찬송”이다.(11)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의 앞선 창조적 행위가 없다면, 신학은 있을 수 없다.

“이 로고스가 신학의 창조자이다. 신학의 위치와 과제는 이 로고스에 의하여 지시를 받고 지정을 받는다. 프로테스탄트 신학은 하나님의 은혜의 계약과 평화의 계약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섬기는 것이다.”(12)

40년에 걸치는 그의 긴 신학의 여정을 함축적으로 담고 있는 이 『개신교 신학입문』에서 바르트는 신학의 과정을 마치 신앙의 사건처럼 이해했다. 신앙의 사건이 “전에 귀먹고, 눈 멀고, 말을 하지 못하는 자였으나 이제는 듣고, 보고, 말하는” 치유의 사건으로 이해되는 것처럼, 신학의 대상인 살아 계신 하나님은 신학적 인식의 과정에 참여하는 신학자를 전적으로 주장하여 그가 신학적으로 인지하고, 탐구하고, 사고하고, 말할 수 있게 한다.(13)

예컨대, 신학자는 다른 일반인들과(불신자를 포함하는) 똑같은 이성의 능력을 사용하고 있고, 동일한 이성의 능력을 사용하여 모든 인간이 대처해야 하는 현실에 대처하지만, 만약 그가 성령의 역사를 뒤따라가면서, 그가 결코 앞서 나가려 하지 않고 자기의 사고와 언어를 그 능력에 종속시킨다면, 그는 세계의 현실을 새로운 빛 안에서, 즉 새로운 관점으로 볼 수 있게 된다.(14) 말하자면, 인간에 의해서 동기가 부여된 질문과 대답이 아니라 인간에게 전해진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동기가 부여된 질문과 대답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15) 바르트는 이러한 신학적 탐구의 전 과정에서 신학이 언제나 따라야 하는 길을 16세기 개혁자 칼빈의 표현을 빌려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모든 올바른 하나님의 인식은 복종에서 일어난다”(Omnis recta cognitio Dei ab oboedientia nascitur).(16)

신학의 학문성, 신학의 자리를 바로잡을 때 가능하다

지금까지 우리는 19세기 신학과의 대결을 통하여 발전된 바르트의 신학방법을 신학의 학문성과 과제에 대한 그의 견해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바르트는 신학을 일반 학문세계의 원리와 방법에 종속시킴으로써 신학의 학문성을 확보하려고 했던 19세기 신학과는 정반대로 신학의 고유한 학문적 특징을 있는 그대로 드러냄으로써 확보하고자 했다. 예컨대, 신학의 학문성은 복음을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시며 인간에게 말씀하시고 행동하시는 하나님을 이 하나님에 의하여 제시된 방법으로 인지하고 이해하며 언어로 표현할 때 비로소 확보된다는 것이다.

신학적 사고는 성령의 역사와 능력을 ‘뒤따르는 사고’이며,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의 창조적이며 해방시키는 능력에 대한 복종에서 생기는 ‘자유’이기 때문이다. 신학적 사고의 자유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복종에 있다는 발견은 신학에서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인간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주도되는 연구대상과의 완전한 결속은 모든 전이해와 편견적인 사고로부터 분리를 낳고, 이 분리의 방법론적 추구를 통하여 학문적 객관성을 성취할 수 있게 했기 때문이다.

바르트에 의해 다시 새롭게 이해된 신학은 교회 안에서 그리고 교회를 위해서 다음과 같이 봉사한다. 신학은 그것의 고유한 중심,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에 응답하는 신앙의 해명에 관심을 갖는다. 신학은 또한 이 복음의 기록인 성서를 추구하고 설명하는 일에, 이 복음에 의해 근거되고 결정된 교회의 역사에, 그리고 교회의 교리와 삶에, 성서적 진리의 지적이고 체계적인 표명에, 그리고 그것을 선포하는 새로운 방식을 추구하고 발견하는 일에 관심을 갖는다. 바로 이 일을 위해 신학은 역사적인 유일회적인 성서의 메시지를 현시대의 이해의 지평으로 옮겨오는 해석과 대화의 작업을 수행해야 한다.

신학과 교회는 얼마간 세상을 향하여 그리고 세상과 관계하여 열려져 있어야 하고, 어떤 식으로든 동시대와의 대화에 참여해야 한다. 그러나 성서적 근본 경험과 현대의 경험이 상충되는 일이 발생할 때, 신학과 교회는 시대정신과 타협하지 않고, 언제나 인류와 세계의 결정적이고 궁극적인 물음에 최종적인 대답을 주는 복음 자체의 빛에서 시대와의 관련성을 비판적으로 점검하고, “복음 자체”인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 신학은 획일적 기회주의적 카멜레온적인 태도를 지니지 않고, 성서적 근본 증언에 비추어 자신을 비판적으로 평가하고 시대의 변천 속에서도, 신학의 불변적 요소(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의 계시사건)를 성서적 기원과 상응할 뿐만 아니라 현실에도 충실하게 표현”(17)하는 것을 그의 가장 중요한 과제로 삼아야 한다. 신학의 필수적인 이 사명과 과제를 다시 새롭게 일깨운 것이 바르트가 20세기 개신교 신학(또한 전체 그리스도교 신학)에 기여한 가장 큰 공헌들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미주

(미주 1) 최영, 『칼 바르트의 화해론 연구』 (서울: 한빛, 1996)을 참고.
(미주 2) 이 연속 강의는 1962년에 Einführung in die evangelische Theologie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바르트가 여기서 사용한 ‘evangelische’란 독일어는 ‘로마 가톨릭’과 대조되는 ‘프로테스탄트’ 혹은 ‘개신교’를 의미한다.
(미주 3) K. Barth, Einführung in die evangelische Theologie(1962), 이형기 옮김, 『복음주의 신학입문』 (서울: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3), 25.
(미주 4) Ibid., 27.
(미주 5) Ibid., 29.
(미주 6) Ibid., 29 이하.
(미주 7) Ibid., 30-31.
(미주 8) Ibid., 32-33. 바르트 신학을 연구하는데 있어 어려움은 그의 방대하고 심원한 사상뿐만 아니라 시기에 따라서 변화되는 것처럼 보이는 그의 신학적 전환에서 기인한다. 예컨대, 바르트는 그의 초기 신학에서 하나님의 신성, 초월성, ‘전적 타자’로서의 그의 존재를 강하게 강조한바 있다. 이것은 그 당시의 지배적인 주관주의와 역사주의 경향에 대한 그의 반응이었다. 그러나 그의 후기의 발전에서 그는 그의 최초의 신학적 통찰을 포기하지 않고 그것을 하나님의 인간성, 곧 나사렛 사람 예수 안에서 사람과 사귐을 갖는 하나님과 관계를 시켰다. 바르트의 신학의 발전과정에서 거듭 나타나는 이 전환에 대해 그의 동시대인들은 몇 번이고 ‘새 바르트’(new Barth)에 관해 말하며 그를 전혀 새로운 방향을 향해 휙 날아가는 제비와 같다고 묘사하였는데, 이는 그들이 바르트의 신학의 전체적인 발전과정 속에서 그의 사상의 깊이와 복잡성을 평가하지 못하였거나, 혹은 외견상으로 반대나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요소들을 심오한 통일성(이를테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조화시키는 그의 근본적인 단순성을 제대로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바르트 연구자들은 좌파, 우파를 막론하고 바르트를 전기와 후기로 구분하여 이해하지 않는 경향이다. 어떤 일관된 관점이 바르트 신학 전체를 꿰뚫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예컨대, 바르트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모든 신학적 기초가 되는 본문이라고 언급했던 것과 같은 것이다(CDⅣ/2, 122). 또한, 최영, 『칼 바르트의 화해론 연구』, 56이하를 보라.
(미주 9) Ibid., 33.
(미주 10) Ibid., 35, 36.
(미주 11)Ibid., 37. 
(미주 12) Ibid., 38-39.
(미주 13) Ibid., 113.
(미주 14) Ibid., 68.
(미주 15) Ibid., 124.
(미주 16) Ibid., 38.
(미주 17) 오영석, 『신앙과 이해』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9), 35.

최영 소장(기독교장로회 목회와신학연구소)  webmaster@ecumenian.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최영 소장(기독교장로회 목회와신학연구소)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종로구 김상옥로 30, 402호  |  제호 : 에큐메니안
대표전화 : 070-4252-0176  |  팩스 : 0303-3442-0176  |  등록번호 : 서울 자 00392  |  등록일 : 2012.10.22
발행인 : 홍인식  |  편집인 : 이정훈  |  청소년보호책임자 : 홍인식  |  E-mail : webmaster@ecumenian.com
Copyright © 2022 에큐메니안.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