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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運)을 믿습니까은혜와 겸손과 감사(시편 30:6-12)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 승인 2022.02.13 15:14
▲ 사람들은 뜻하지 않게 자신이 바라는 대로 일이 이루어질 때 운이 따른다고 이야기하곤 한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에게 운이란 것이 존재할까. ⓒGetty Image
6 내가 형통할 때에 말하기를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하였도다 7 여호와여 주의 은혜로 나를 산 같이 굳게 세우셨더니 주의 얼굴을 가리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 8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고 여호와께 간구하기를 9 내가 무덤에 내려갈 때에 나의 피가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진토가 어떻게 주를 찬송하며 주의 진리를 선포하리이까 10 여호와여 들으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를 돕는 자가 되소서 하였나이다 11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12 이는 잠잠하지 아니하고 내 영광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심이니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영원히 감사하리이다

주현절 여섯째 주일입니다. 성서 일과에 따른 이번 주일의 본문은 신명기 4장 32-40절, 시편 30편, 마가복음 10장 13-16절, 고린도전서 3장 18-23절입니다. 이번 주간에 지정된 본문들을 하나로 엮어서 간단하게 말하자면,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나아가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지혜를 높이려하지 말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아가자는 내용입니다.

마가복음 10장에 나타난 본문인 ‘하나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에 대한 말씀도 이런 맥락에서 선정된 것으로 보입니다. 개인적으로 마가복음 10장의 본문은 너무 단락적인 내용만을 보고 선정되었다고 생각하긴 합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를 받든다는 말씀은 낮은 자세로 하나님 나라를 받든다는 의미로 읽을 수도 있겠지만, 의심 없이 하나님 나라를 믿고 따른다는 의미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또 예수님의 만져주심, 안수하심을 바라며 아이들 예수님 앞에 데려온 어른들의 모습과 그저 하나님을 믿는 아이들의 모습은 명확한 대비를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도우신다는 믿음을 아무런 조건 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과 예수님의 안수와 같은 기적적 행위를 바라고 있는 어른들의 모습이 대조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마가복음 10장 전반적인 내용과 함께 살펴본다면, 의심 없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그분의 뜻에 따라 살아가라는 명령이 됩니다.

오늘 저희가 살펴보려는 말씀은 시편 30편입니다만, 마가복음 10장 13-16절의 말씀을 이번 주간의 말씀들과 연결시켜서 너무 단순하게 읽지 않으셨으면 하는 마음에 마가복음에 관한 이야기를 먼저 드렸습니다. 오늘 저희는 시편 30편에 나타난 시인의 고백과 그가 전하고자 했던 신앙을 함께 나눠보려고 합니다.

시편 30편

시편 30편의 표제는 ‘다윗의 시, 성전 낙성가’라고 적혀있는데, 이는 확실하게 후대에 붙여진 제목입니다. 성전 낙성가라는 것은 성전 헌당식 때에 부른 노래라는 뜻인데, 만약 성전을 처음 건축한 때에 만들어진 시라고 본다 해도, 다윗이 아니라 솔로몬의 낙성가라고 말해야 성경의 내용에 부합할 것입니다.

내용적으로 보았을 때, 이 시가 성전 건축이 이루어진 후 헌당식 때에 만들어진 노래로 보이지도 않습니다. 또 우리가 알고 있는 다윗의 삶과 연결시키기에도 약간의 무리는 있습니다.

이 시는 아마도 성전 헌당 축제인 하누카 때에 불려졌고, 그렇기에 성전 낙성가라는 제목이 붙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이 시를 만든 시인은 다윗이나 솔로몬이 아니라 예배 공동체 안에서 자신의 체험과 신앙을 전하고 함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했던 어떤 인물로 보입니다.

시편 30편의 내용은 그리 어렵지는 않습니다. 시인은 아마 생명의 위협을 받는 상황에 놓여 있던 것으로 보입니다. 1절에 원수라는 표현이 나오기는 하지만, 대적에 의해 위협을 받았다기보다 죽음에까지 이를 수 있는 질병에 의해서 위협받고 있던 것으로 보입니다. 2절에 나타난 고치셨다는 표현이나, 3절에 나타난 스올에서 올리사 무덤으로 내려가지 않게 하셨다는 표현에서 이 점을 알 수 있습니다.

1절에 나타난 원수들의 기쁨은 크게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만약 시인이 사회적으로 적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의 죽음 자체가 원수에게는 기쁨이 될 수 있습니다. 또 시인이 신앙에 관한 이야기만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신앙과 대척점에 있는 사람을 원수라고 말하고 있다면, 원수의 기쁨은 시인의 하나님이 그를 지켜주지 않는다는 점에 있었을 것입니다. 시인의 죽음은 그의 신앙이 잘못되었다는 점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시인은 자신의 신앙에 응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치유하셨고, 그의 신앙은 올바른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원수는 이제 기뻐할 수 없게 됩니다. 시인이 맞았고 원수는 틀렸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자신의 이러한 체험을 혼자만 간직하지 않습니다. 4-5절을 보면 그는 자신의 체험을 예배 공동체와 함께 나눕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놀라우신 능력을 함께 기억하며 감사하자고 외칩니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이면 반드시 기쁨이 찾아오리라고 말합니다.

간구와 은혜

재미있는 부분은 시인이 고통 중에 있을 때 하나님께 간구한 기도의 내용입니다. 8-10절을 보면 시인이 간구한 내용이 나타나는데, 자신이 죽어버린다면 어떻게 하나님을 찬송하며 진리를 전할 수 있겠냐고 하나님께 질문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살아서 하나님의 역사를 돕는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간구합니다.

시인이 간구하는 내용은 출애굽기 32장에서 모세가 하나님께 간구한 내용과도 비슷합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계명을 받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은 산 아래에서 금송아지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에 분노하시어 이들을 진멸하고 모세를 통해 새로운 민족을 이루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때 모세가 하나님께 드린 간구가, 지금 이스라엘 백성을 진멸하신다면 애굽 사람들이 하나님을 비웃게 될 것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는 악한 의도로 애굽에서 이끌어냈다고 말할 것이니 그 뜻을 거두어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시편 30편의 시인이 간구하는 바는 모세의 간구와 비슷해 보이는 면이 있습니다. 자신의 신앙이 잘못된 것이 아님을 증명해 달라고,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그 진리를 전파할 수 있게 해달라는 간구입니다. 하지만 그의 간구는 모세의 간구와 같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행위를 멈춰달라는 간구는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의 삶을 위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하나님께 드렸던 간구로 보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하는 간구도 이와 비슷할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이 순간을 모면하게 해주신다면, 앞으로 이러저러하게 살아가겠습니다. 열심히 교회 나가며 신앙생활 하면서 살아가겠습니다. 이런 식의 간구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기도를 하게 되는 것은 우리의 어쩔 수 없는 마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신이 무엇인가를 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어떻게 해서라도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은 당연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런 순간이 왔을 때, 한 가지는 기억하셨으면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대가를 요구하시는 분이신가 하는 점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독생자까지 보내셨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해주신다면, 그것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은혜입니다. 우리에게 찬양받기 위해서 우리를 도우시는 것도 아니고, 당신의 복음을 만방에 퍼뜨리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살리시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우리를 아끼고 사랑하시기에 우리를 도우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고, 세상에서 선을 행하는 이유, 정의를 따라 살아가는 이유는 하나님이 그런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복을 받기 위해서 이런 신앙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믿는다고 고백하는 분이 그러한 분이시기 때문에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갔을 때, 은혜와 마찬가지로 우리를 아끼시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더욱 잘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주시는 것이고,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입니다.

겸손과 감사

시인이 잘못된 신앙을 가졌고, 잘못을 범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시인은 죽음 앞에 놓였을 때 사람이 어떻게 행동하게 되는지를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 순간에 또 다른 점을 깨달았고 이를 공동체에 전합니다.

6-7절을 보면, 그는 자신이 형통했을 때, 건강했을 때에 ‘영원히 흔들리지 않으리라’, ‘나는 산 같이 굳건하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얼굴을 가리셨을 때, 자신의 건강이 사라졌을 때, 그제야 자신이 가지고 있던 것이 한순간에 사라질 수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자신이 가지고 있던 것이 아무것도 아니게 될 수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최근 EBS에서 『정의란 무엇인가』의 저자 ‘마이클 샌델’의 비대면 특강을 6회에 걸쳐 진행했습니다. 아마도 그의 최근 저서 『공정하다는 착각』을 주제로 한 특강이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마지막 부분만 봤기 때문에 정확하게 어떤 내용들이 나왔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마지막에 그가 특강의 내용을 정리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현대의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운(Lucky)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의 성공이 상당 부분 운에 의한 것이었음을 인정해야 한다. 사람들이 운을 인식한다면 운이 없었던 사람들 앞에서 겸손해질 수 있고, 공공선을 위해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만 이야기한다면 조금 왜곡된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지만, 마이클 샌델이 얘기하고자 하는 핵심은 자신의 성공에 도취하여 성공하지 못했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겸손한 마음으로 공공선을 이루자는 것입니다. 그는 부자 부모의 자식으로 태어난 것도 운이라고 말합니다. 특강에서도 몇 가지 지적 사항이 나오긴 했지만, 저는 ‘운’이라는 단어의 선택이 좋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운도 능력이라고 말합니다. 실제 운이라는 것은 우리의 노력과 별개로 우연히 얻게 되는 어떠한 것을 이야기하지만, ‘운이 따르는 사람’이라는 표현이 있듯이 운도 개인이 가진 능력 중 하나로 평가되곤 합니다. 따라서 운이 좋아서 성공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는 결국 개인의 능력으로 성공을 이루게 되었다는 식으로 생각하게 만듭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운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섭리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진정으로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완전한 나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었기에 우리가 지금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죽음 앞에서 자신의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이전의 형통함, 이전의 굳건함은 아무 소용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겸손해집니다. 자신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을 간구하게 됩니다. 자신의 삶 모든 순간에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었음을 깨닫고 겸손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가 겸손한 마음을 가졌을 때, 그는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삶을 이끌고 도우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그 감사의 마음이 있었기에 자신이 속한 공동체 사람들을 향해 외쳤습니다. 우리 함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찬양하고 감사하며 살아가자고 외쳤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진 마음이 감사를 불러일으켰고, 그 감사는 진리를 전파하는 데로 이어졌습니다. 함께 그 감사함을 느끼며 나누고자 하는 마음으로 이어졌습니다.

저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만이 아닌 세상 앞에서도 우리가 겸손해지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고 도우시는 만큼, 다른 이들도 아끼고 사랑하십니다. 그렇기에 세상 많은 사람들 앞에서 우리는 겸손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만큼 세상 앞에서도 겸손해야 합니다.

이런 겸손은 세상을 향한 감사로 이어질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것은 나 하나의 능력 덕분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노력하며 살아가고 있기에 우리는 이 땅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각각의 사람들을 지키시며 그들이 자신의 자리를 지키게 하시기에 모두가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다면, 하나님께서 아끼시는 모든 사람들 앞에서 겸손해야 하고, 이런 모두에게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마도 이런 형태의 공동체가 마이클 샌델이 이야기하고 싶었던 공동체의 모습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공동체를 이루는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중심이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 겸손해지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 겸손함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또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은 나와 우리 가족, 우리 교회 성도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 하셨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모든 이들 앞에서도 겸손하게, 감사하며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그런 삶을 살아갈 때에 이 땅은 참된 하나님 나라가 될 줄 믿습니다.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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