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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계 61인을 중심으로 “2022 한반도 참된 인류세를 위한 새문명 선언” 발표전환 시점에 선 이번 대선의 의미 강조하며 올바른 선택 촉구
이정훈 | 승인 2022.02.26 17:34

“이번 한국 대선 정국에서 한 후보자나 그 부인이 자신들이 ‘영적’이라고 밝힌 것 자체를 문제 삼을 수 없다. 그보다 더 근본적으로 여기서 예수도 그 영의 분별을 행한 것처럼, 그들이 말하는 영이 진정 자기 부정을 가능하게 하고, 공동체를 우선하며, 생명과 정의와 평화를 증진하는 영인지, 아니면 반대로 오직 자기 욕심만을 채우고, 그 영을 수단으로 삼아서 다른 사람을 억압하고 착취하며 공동체에 차별과 혐오를 조장하는지를 살피고 따질 일이다.”

이은선, 김민웅, 채수일, 이정배, 윤인중 등 61명이 발의하고 500여명이 서명한 “2022 한반도 참된 인류세를 위한 새문명 선언”은 대선 과정에서 계속해 문제가 제기되고 있는 윤석열 후보와 아내 김건희 씨의 무속과 관련해 이같이 일갈했다.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무속을 동원하는 것이 오히려 무속을 비하하는 행위로 본 것이다. 사적 욕망을 실현시키기는 도구로 전락한 전통적인 무속을 제자리로 돌려놓으려는 노력으로도 읽힌다.

하지만 여기에 머물지 않고 한국 기독교의 행태에 관해서도 분명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소위 한 ‘성직자’가 하나님과 예수의 영을 자기 욕심과 세상에서의 이득, 불의한 권력을 탐하는 일로 사용했다면 그는 더러운 영과 악마에 사로잡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성직이라는 권위는 사람을 착취하는 권위이며, ‘무술’과 잘못된 ‘무속’에 빠진 사람과 다르지 않다. 그런 사람일수록 더욱 영을 독점하려고 하고, 그 독점은 심각하게 공동체의 위기와 부패, 분열과 소외를 불러온다. 오늘 한국 사회에서 신천지와 같은 사이비 종교집단이 난무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보수 기독교의 영적 경직과 특히 일부 남성 성직자의 특권적이고 반이성적인 영의 독점에 책임이 크다.”

최근 불거지고 있는 교계 내의 윤석열 지지 현장에 대해서도 날을 세운 것이다.

이어 “오늘 우리 시대 민중을 압박하고, 병들게 하고, 자살하게 하고, 온갖 좀비와 괴물로 화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고 되물으며 “서울 중심의 지독한 지방 소외, 학교 제도라는 거대한 신분제도와 거기서 특히 특정 대학을 중심으로 한 학력 카르텔, 몸의 노동에 대한 천시와 더불은 극심한 빈부격차와 고용현장에서의 잔인함, 성차별로 몸과 마음이 고통 받는 젊은이들과 여성들, 이에 더해서 더 근본적으로 우리 삶의 바탕을 흔드는 일로 한반도 남북 갈등 조장과 또한 불의한 인간 중심의 산업 문명으로 인한 지구 기후 위기 등”으로 분석하고 “지금 인류가 고통 받고 있는 코로나 팬데믹은 오늘 생명을 죽이는 소외와 차별이 지구 집 전체로 퍼져 생명 종(種) 차원까지 번져나간 것을 극명하게 보여주지만, 한국 교회는 오히려 방해자가 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또한 이들 61인의 발의자들은 “지금 인류세의 가장 힘센 두 세력인 미국과 중국이 한반도의 38선에서 맞붙어 싸우게 되면 인류 문명 자체가 의문시되므로 우리는 어떻게든 이곳에서 평화와 화합을 이루어내야 한다.”며 “그 일을 위해서 오는 3월 9일 한국 대통령 선거가 큰 기회와 위기가 될 것을 본다.”고 강조했다. “어느 후보가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서 더욱 적합한 지를 잘 판별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마지막으로 “이제 우왕좌왕을 그치고 우리의 한 표에 나라와 온 세계 인류의 앞날이 크게 좌우된다는 것을 통찰하며 과감한 행동으로 나서자! 쉽게 포기하지 말고, 과거의 길에서 배우며, 성령의 인도를 간구하며, 그 한 표로써 온 인류를 위한 영화(靈化)의 새 시대를 모두 함께 준비하자!”고 촉구했다.

발의자들은 이 선언문에 동참하기 바라는 분들은 ‘구글 폼’(클릭하면 서명 페이지로 연결된다)에 접속해 작성하며 집계를 거쳐 매일 업데이트 한다고 밝혔다.

다음은 선언문 전문이다.

“2022 한반도 참된 인류세를 위한 새문명 선언”
- 3월 9일 대선 앞에서 한국 기독인이여 일어나라 -

2022년 새봄, 온 우주에 새로 오는 봄을 세우기 위해서(立春) 그 동북방의 집 한반도가 요동치고 있다. 한반도의 요동을 보면서 온 세계가 숨죽이고 있고, 잠깐 깜박하며 한반도가 헛발을 짚는 순간 그를 낚아채서 뱃속에 삼키려는 악귀들이 주변에 즐비하다. 인류세 지구 최고 강자들이 포진해서 싱싱하고 신선한, 그러나 그 안에 인류 창세기 때부터 일구어온 온갖 선의 씨앗을 담지한 한반도라는 과실을 따먹기 위해서 3월 9일 제20대 대선을 주목하고 있다.

20세기에 들어서서 나라가 이웃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기 전, 그때 나라 권위를 담당하고 있던 유학자들에게 “입만 열면 성선(性善)을 말하고 말만 하면 반드시 정자(程子), 주자(朱子)를 일컬으나 재주가 높은 자는 훈고에 빠지고 지혜가 낮은 자는 명예와 이욕에 떨어지고 있었다”라는 비판이 드높았다. 그 비판이 오늘 한국 사회 구성원 20% 이상의 정신을 관장하는 기독 교회와 그 주관자들에게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 아닌가? 말만 하면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을 말하고 이웃사랑을 외치지만, 그 지도자들은 온갖 명분과 과거 문자에 사로잡혀 있고, 교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사적 욕망 채우는 일에 급급하다. 한일병탄 당시 이완용은 그 가능성을 타진하며 제 종교의 현황을 묻는 일본에게 그중 ‘예수교’와 ‘천주교’는 한반도에서 불란서 계통, 미영 계통, 독일 계통 등으로 나뉘어서 한국인들 스스로 서 있지 못하기 때문에 염려할 필요가 없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서구 문명과 가까웠던 기독교가 그러한 평가를 받았던 것이 오늘 동족상잔의 한국전쟁이 있었던지 70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그 서구적 힘에 기대서 갈등을 조장하고 부추기는 한 대선후보와 그를 지지하는 보수 기득권 기독교의 모습에서 유사하게 반복되고 있다.

오늘 세계가 선망하는 K방역을 이룰 수 있는 나라가 되기까지, 한국전쟁 당시 세계 최빈국에서 지금 세계가 인정하는 선진국으로 도약하기까지, 한반도는 피나는 노력을 감내해 왔다. 종종 ‘압축적 근대화’라는 말로써 그 시간을 서술하는 대로 해방과 분단, 전쟁과 산업화를 참으로 응축적으로 겪어왔다. 그 결과 오늘 세계는 남쪽 K문화 콘텐츠 등을 보면서 “근래 한국인의 자본주의적 에너지와 욕망은 미국인을 넘어서고, 최대한의 노력을 쥐어 짜내는 집요함은 일본인을 능가하고 있다”라는 평가를 한다. 여기서 긍정과 부정이 모두 들어가 있는 평가가 나오기까지 밑바탕에 한국 기독교가 핵심적인 정신적 추동력으로 역할해 왔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한국 기독교는 그렇게 서구에서 들어와서 20세기 후반기에 인민들의 주체적 욕망과 의지를 그와 같은 정도로 세밀하고 강력하게 형성했다. 그것은 곧 거룩(聖)의 영역이 더욱 넓게 평범(俗)의 영역으로 확장된 것을 말하고, 그를 통한 삶의 주인의식과 자신들도 최고 창조주와 직접 소통할 수 있다는 ‘하늘 자녀’ 의식은 지금까지 한국인들이 경험한 어떤 종교의식보다도 강력한 진취력과 행위력으로 삶에서 역할했다.

하지만 그 기독교 복음도 다시 폐쇄되기 시작했고, 일부의 초월적 특권으로 변질되어 갔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을 소유하고 있고, 이생 이후의 생까지 영원히 보장받았다는 기득권 의식(영생 또는 천국)은 일종의 영적 특권의식으로 변하여 자신들이 받은 영만을 ‘성령(거룩한 영)’이라고 규정하고, 교회 안과 밖을 원리로써 나누며, 과거의 문자와 일부 특권자에게만 영을 가두는 영의 사유화(enclosing)가 일어났다. 그러면서 그 밖의 사람들을 다시 차별하고 소외시키면서 한편에서는 눈에 보이는 물질과 권력, 명예만이 모든 것의 모든 것이 되어 한국 기독교와 보수 교회의 타락이 오늘의 지경에 이르렀다.

이스라엘 유대교 전통에서 지구 땅에 태어나서 하늘 자녀 의식을 참으로 고유하게 제시한 예수는 이 땅에서 공적 삶을 시작할 때 자신을 영적(靈, spirit) 권위의 사람으로 드러냈다. 바람과 바다까지도 복종하고, 귀신들린 사람들을 고치고, 병자를 치유하는 뛰어난 영의 사람으로 그는 자신의 영과 권위가 지금까지 사람들이 이 땅에서 보아왔던 것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영과 권위임을 보여주었다. 그 영은 사람을 살리고, 생명을 다시 이어주며,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함으로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위해서 자기 목숨까지 버리게 하는 영으로서 더할 수 없이 극진한 ‘자기 부인’과 ‘자기 초극’의 그것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영을 진정 처음 경험하는 놀라운 영으로 만났고, 그 이전에 사람을 착취하고, 세상을 돌같이 굳어진 성결법으로 정죄하고 나누는 나쁜 권위의 영이 아님을 분명히 보았다.

그런 예수는 영의 구분을 위해서 ‘성령(the holy spirit)’과 ‘더러운 영(unclean spirit)’이라는 말을 쓰고, 더러운 영을 ‘사탄(a Satan)’ 또는 ‘마귀(a demon)’로 이름짓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 모두 ‘영(spirit)’임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번 한국 대선 정국에서 한 후보자나 그 부인이 자신들이 ‘영적’이라고 밝힌 것 자체를 문제삼을 수 없다. 그보다 더 근본적으로 여기서 예수도 그 영의 분별을 행한 것처럼, 그들이 말하는 영이 진정 자기 부정을 가능하게 하고, 공동체를 우선하며, 생명과 정의와 평화를 증진하는 영인지, 아니면 반대로 오직 자기 욕심만을 채우고, 그 영을 수단으로 삼아서 다른 사람을 억압하고 착취하며 공동체에 차별과 혐오를 조장하는지를 살피고 따질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얼마 전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이 오늘 우리 시대는 “악마”와 싸우고 있다고 규정하면서, 그 악마로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진실을 왜곡하며 기소라는 칼을 입맛대로 휘두르는 검찰, 불의한 판결로 참된 형평을 그르치는 법원, 삼류소설 같은 기사를 편파적으로 써내는 언론 등을 지목한 것은 옳다.

예수는 거룩의 영역을 급진적으로 온 세상으로 확장하길 원했고, 21세기 지구 집에서 우리는 영의 평범성과 보편성이 더욱 확장된 세기를 살고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라고 하는 이미 주어진 체제와 신조가 그 자체로 그들 영을 무조건적으로 ‘성령(the holy spirit)’으로 보장해 주지 않는다. 만약 그곳의 소위 한 ‘성직자’가 하나님과 예수의 영을 자기 욕심과 세상에서의 이득, 불의한 권력을 탐하는 일로 사용했다면 그는 더러운 영과 악마에 사로잡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성직이라는 권위는 사람을 착취하는 권위이며, ‘무술’과 잘못된 ‘무속’에 빠진 사람과 다르지 않다. 그런 사람일수록 더욱 영을 독점하려고 하고, 그 독점은 심각하게 공동체의 위기와 부패, 분열과 소외를 불러온다. 오늘 한국 사회에서 신천지와 같은 사이비 종교집단이 난무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보수 기독교의 영적 경직과 특히 일부 남성 성직자의 특권적이고 반이성적인 영의 독점에 책임이 크다.

이상의 이야기는 오늘 한국 대선에서 기독인들이 어느 후보를 선택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밝혀준다. 지금으로부터 200여 년 전에 복음을 받아들여서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이전 이 땅에서 먼저 영근 영적 열매들을 바탕으로 참 신앙과 참 영적 권위의 길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보여주었다. 그것은 진정 예수의 삶이 그랬듯이 ‘지공무사(至公無私)’의 길이었고, 그 시대 민중이 가장 견디기 어려워하는 삶의 장벽을 알아서 그것을 털어내고 걷어내는 일(生物)을 하는 것이었다. 오늘 우리 시대 민중을 압박하고, 병들게 하고, 자살하게 하고, 온갖 좀비와 괴물로 화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 서울 중심의 지독한 지방 소외, 학교 제도라는 거대한 신분제도와 거기서 특히 특정 대학을 중심으로 한 학력 카르텔, 몸의 노동에 대한 천시와 더불은 극심한 빈부격차와 고용현장에서의 잔인함, 성차별로 몸과 마음이 고통받는 젊은이들과 여성들, 이에 더해서 더 근본적으로 우리 삶의 바탕을 흔드는 일로 한반도 남북 갈등 조장과 또한 불의한 인간 중심의 산업 문명으로 인한 지구 기후 위기 등이다. 지금 인류가 고통받고 있는 코로나 팬데믹은 오늘 생명을 죽이는 소외와 차별이 지구 집 전체로 퍼져 생명 종(種) 차원까지 번져나간 것을 극명하게 보여주지만, 한국 교회는 오히려 방해자가 되고 있다.

그런데 바로 한 대선 후보가 이러한 중첩적인 불의와 탄압을 몸소 겪었고, 그것을 말할 수 없는 인내로 이겨내며 한 공적 인물로 우뚝 서서 그 불의와 탄압의 악마를 물리치는 일에 자 신을 던지겠다고 한다면 우리 기독인들은 그 사람을 선택해야 하지 않을까? 그 사람이 지금까 지 백사천난(百死千難)의 고통을 견디며 우리 공동체의 몸과 정신이 온전히 회복되는 일을 위 해서 매진해 왔다면 그것이야말로 참된 영의 회복을 위한 실행이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와는 반대로 자기 욕망 채우기와 온갖 불법과 거짓, 편법으로 사적 재산을 불려왔고, 안하무인으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꿈꾼다면 그 영은 사이비 영이고, 위선자의 영이며, 사탄의 영이 라고 부르고자 한다. 그리고 아무리 예수를 믿는 기독인, 그 성직을 맡은 자라 하더라고 그러한 영을 추종하고, 그 거짓을 밝히는 일에 침묵하는 자는 똑같이 미신과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것이다.

오늘 우리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도달해 있다. 인류 20세기가 동트기 훨씬 전부터 이 땅의 뛰어난 영적 선인들은 그때까지 세상의 중심이었던 중국으로부터의 동북방, 간방(艮方)의 한반도가 새로운 인류세 시작의 새 마당이 될 것을 일찍이 선포해왔다. 그 새로운 세기란 이전과는 다르게 자연과 인문이 조화되고, 지성과 영성이 하나가 되어서 뛰어난 신화(神化, 포스트 휴먼)가 이루어지며, 새로운 성평등과 만민평등의 뛰어난 복지사회가 이루어지는 지경이다. 그것은 인류의 제 종교가 상호이해와 존중, 협력하는 새 문명, 새 하늘과 새 땅의 시작을 말한다. 그 새로운 시대를 위해서 한반도는 자격이 있고,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자격은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라 수천 년의 억압과 고통을 겪으며 인고의 세월을 거치면서 얻어진 것이다. 오늘 한국의 모습이 보여주듯이 한반도에는 지금까지 인류가 이 지구 집의 동서에서 온갖 노력으로 문명의 열매로 낳은 다양한 종교와 사상이 세계 어느 곳에서보다도 활발하게 현재적으로 역동치고 있다. 20세기 인류의 난제인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갈등도 이곳에서 지금 여전히 강력하게 분출되고 있으며, 그래서 38선은 한반도의 38선만이 아니라 세계의 38선이라는 말이 나온다. 그런 의미에서 한반도의 문명은 인류 문명의 영적 ‘석과(碩果, 종자 과일)’라고 할 수 있다.

‘석과불식(碩果不食, 종자 과일은 먹지 않는다)’이라는 말이 있다. 씨와 종자가 되는 모체는 아무리 굶주려도 먹어치우지 않듯이 지금 인류세의 가장 힘센 두 세력인 미국과 중국이 한반도의 38선에서 맞붙어 싸우게 되면 인류 문명 자체가 의문시되므로 우리는 어떻게든 이곳에서 평화와 화합을 이루어내야 한다. 그 일을 위해서 오는 3월 9일 한국 대통령 선거가 큰 기회와 위기가 될 것을 본다. 진정 어느 후보가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서 더욱 적합한 지를 잘 판별해야 한다. 한반도가 참된 인류세의 시작을 위해서 자격이 있다고 하는 것은 그냥 얻어진 말이 아니다. 세계 어느 곳에서보다도 일찍이 ‘홍익인간’이라는 온 세상을 품는 이상이 발설되었고, 인간과 자연이 조화를 이루는 새 우주와 천지를 말하면서도 그 안에 바로 인간이 사는 지구 안의 인간이 없다면 그것 또한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물으면서 인간 세상에 대한 염려를 끝까지 놓지 않았다. 그것은 참된 인간세의 도래를 위한 준비자인 것을 말한다. 그러한 인류를 위한 통합과 통섭의 큰 정신은 1919년 3.1 독립운동에서 나라를 빼앗기기까지 한 상황이었지만 그 약탈자의 미래와 이웃 중국의 처지까지 염려하였고, 그와 같은 어려울 때도 최고의 평등사상과 인권의식, 세계대동의 이상을 웅장하게 선포하였다. 그 정신은 가까이는 2016년의 촛불 혁명에서 또 발현되어 사이비 영의 또 다른 추종자였던 최순실 국정농단을 단죄하고 새로운 민주주의의 뜻을 이룰 터전을 마련했다.

오늘 우리 앞에 놓인 일이 설사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은 그 일도 하실 수 있다는 믿음(信)이 우리 신뢰의 최종 근거이다. 예수는 그를 “선한 선생”이라고 부르는 유대인 부자 청년에게 “하나님 한 분밖에는 선한 분이 없다”라고 답했다(막 10:17-27). 이런 복된 소식을 들으면서 우리는 오늘 촛불 혁명을 이룬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오징어 게임’과 ‘지옥’, ‘지금 우리 학교는’의 상황을 걷어내지 못한 것에 깊은 책임을 느끼며 우리 자신도 또 다른 기득권이 된 것을 반성한다. 하지만, 그러나 동시에 그럼에도 이번 대선이 그 상황을 다시 전환하고 새 문명의 시간을 가져오는데 절체절명의 기회라는 것을 강조하며 용기를 내고자 한다. 하여 우리는 큰 불의와 위기 앞에서 작은 실수와 잘못을 과하게 탓하는 일에서 벗어나서, 더욱 장기간에 걸쳐 이루어진 후보 삶의 여정을 보면서 그것이 진정 공동체를 위한 지공무사의 것이었는지를 판단하며 우리 선택을 결정할 일이다. 

이 땅의 기독인들이여 일어나라! 이제 우왕좌왕을 그치고 우리의 한 표에 나라와 온 세계 인류의 앞날이 크게 좌우된다는 것을 통찰하며 과감한 행동으로 나서자! 쉽게 포기하지 말고, 과거의 길에서 배우며, 성령의 인도를 간구하며, 그 한 표로써 온 인류를 위한 영화(靈化)의 새 시대를 모두 함께 준비하자!

2022년 2월 23일

이정훈  typolog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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