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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까지 아시아의 고난과 연대한 사람, 파울 슈나이스 목사를 그리며“성을 쌓는 자 망하고, 길을 내는 자 흥한다”
이해학 이사장(겨레살림공동체, 목사) | 승인 2022.03.04 16:32
▲ 2013년 슈나이스(왼쪽) 목사가 부산에서 열린 세계교회협의회(WCC) 총회에 참가했을 때 나와 함께 했다. ⓒ이해학 목사 제공

은하수를 건너는 파울 하인리히 슈나이스!

당신의 시원한 발걸음이 밝은 빛으로 들어가는 것을 나는 봅니다.

그가 가방 하나 덜렁 들고 우리에게 온 것은 하나의 사건이었다. 1974년, 성남주민교회 교인들은 그에게 매달리듯 하소연하였다:

우리 전도사님, 면회도 못하게 해요. 이 추위에 침낭도 안 받아줘요. 무슨 죄가 있어 15년 징역이래요? 긴급조치는 악법이니 철회하고 민주화를 이루라는 주장이 왜 죄가 되나요? 우리 모두 셋방살이하는데 주인집을 뒤져서 쫒아내게 해요. 통반장을 동원해서 주민교회 나가면 사업 망한다고 소문을 내요. 교회당으로 쓰는 5평 집에서 쫓겨났어요. 그래서 밥 먹고 살만한 사람들, 미장원 하는 이, 연탄가게, 이발소 하는 이들이 다 교회를 떠났어요. 우리는 어떻게 해요?

1974년은 대한민국은 암흑 자체였다. 이런 어둠의 계절에 슈나이스 목사가 우리에게 온 것은 아침햇살 쏟아지는 동편으로 난 창과 같았다. 연일 방송과 신문들은 우리 구속자들을 역적인 것처럼 비난했고, 그 때마다 친척들도 관계를 단절하고, 우리가 속한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도 구속자들을 외면하였다. 그때 슈나이스 목사는 국가폭력의 암흑세상을 세계에 알리는 메신저 역할을 하였다. ‘아시아 교회협의회’(CCA)와 ‘세계교회협의회’(WCC)를 통하여 한국의 독재정부의 잔혹한 폭력상을 세계에 여론화하기 시작하였다.

세계인들은 한국의 피압박 민중의 봉기를 살아있는 신앙고백으로 규정하였다. 세계 각국에서 지지성명과 기도회와 모금운동이 일어나 총회를 통해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구속자들 때문에 한국교회가 살아있는 신앙고백적 교회라고 불리고 총회의 태도도 바뀌기 시작하였다. 슈나이스 목사는 주민교회 건축을 위해 모금하였고, 내가 세 번째 구속되었을 때는 ‘이해학 알기’ 행사 등을 하며 티셔츠를 만들어 팔기도하였다. 나는 그 티셔츠를 기념품으로 가지고 있다.

바인가르텐에 있는 목사 사택 2층 서재에는 그가 한국에서 몰래 일본을 거쳐 유럽으로 전달한 성명서 등 1차 자료들이 빼곡하게 쌓여 있었다. 당시 민주화운동과 반독재투쟁을 하던 단체들과 재야인사들이 발표한 자료들인데, 그가 위험을 무릅쓰고, 한때 한국정부로부터 추방까지 당하면서 모은 것들이다. 한국현대사의 방대하고 매우 소중한 1차 자료들을 그는 후에 국사편찬위원회에 모두 기증하였다.

내가 90년 범민족대회 후에 베를린에서 ‘남-북-해외 3자회담’을 한 것 때문에, 구속되어, 1년 6개월 동안 세 번째 징역을 살고 나온 직후에 슈나이스는 나를 찾아왔다. 그리고 자신이 사역하는 바덴 주교회 소속의 바인가르텐 교회와 성남주민교회가 자매결연을 하자고 제안했다. 그래서 주민교회와 독일 바인가르텐 교회는 매 2년마다 15명 정도로 구성된 방문단의 상호방문이 시작되었다.

또 청년 두 사람씩을 교류 훈련하였으며, 해마다 2월에는 세계평화를 위해 두 교회가 화상기도회를 함께 했다. 민간 친선 교류가 자발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체류 기간에는 교인들 집에서 민박을 하며 친교를 나누었다. 우리는 갈 때마다 그 지역 시장 실에서 인사하고 역사 문화를 체험하였다.

바인가르텐은 그 이름 뜻인 <포도원 동산>답게 포도주로 유명했고, 해마다 포도주 마시기 대회가 열렸는데, 우리는 그 때마다 바인가르텐 포도주와 유명한 소시지도 즐길 수 있었다. 우리는 독일에만 머물지 않고, 브뤼셀의 과학박물관, 스위스에 있는 칼빈의 종교개혁유적들을 더듬어 보기도 하였다. 스위스 융프라우 정상을 올라가 한국 컵라면을 먹었던 감격은 잊을 수 없다. 그 후, 파리 루브르 박물관까지 둘러볼 수 있었는데, 그것은 슈나이스가 열어준 길 위에서 대한민국의 마지막 꼴찌들이 인생을 마음껏 즐긴, 행복한 기억이었다.  

슈나이스와 바인가르텐 교인들이 한국에 왔을 때에는 서울 고궁보다는 남산 안중근 공원이나, 광주 망월동 518국립묘지를 거쳐 무등산을 오르기도 하였다. 어느 해에는 서울대에서 열린 범민족대회에 참가했다가, 헬기로 뿌리는 최루탄가루를 맞으며 산을 넘어 손잡고 도망치기도 하였다. 어느 해는 전라도 염산 바닷가에서 갯벌 체험을 했고, 설악산과 대포 항에서는 펄떡펄떡 생선이 뛰는 어시장을 즐겼다.

슈나이스는 70년대 한국의 민주주의의 발전과 인권 증진에 기여한 공로로, 특별히 광주민중항쟁의 메신저로서 ‘5월상’을 받았다. 그리고 제주 강정마을 투쟁을 취재하기 위해, 수없이 한국을 드나들면서 강정 마을을 세계 교회에 알린 공적을 우리 정부가 훈장을 내려 감사를 표명한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그러나 한국교회가 잊어서는 안 될 다른 일들이 있다. 슈나이스가 독일 ‘서남지구선교회(EMS)’를 통하여, ‘한국신학연구소’와 ‘디아코니아 자매회’를 시작한 일이다. 그리고 독일동아시아선교회의 파트너인 일본 도미사카 센터와 한국신학연구소가 공동으로 동아시아 평화를 위한 역사교과서 다시 쓰기 프로젝트를 진행하도록 지원한 것도 그가 남긴 소중한 기여라고 하겠다. 당시 러시아, 중국의 사회과학원, 일본의 도미사카 센터, 남한의 한국신학연구소, 북한의 주체사상연구소가 공동으로 추진했지만, 유감스럽게 북한 측 인사들이 참가하지 못했지만, 의미 있는 연구 작업이었다고 하겠다.

슈나이스를 나무에 빗댄다면, 그 가지가 어디까지 뻗혔는지 알지 못한다. 나는 내가 경험한 가지만을 말할 뿐이다. 하물며 그의 뿌리를 알 길이 있을까. 격동기 중국 선교사였던 선친으로부터 중국과 일본 문화를 접하고, 일본 여인과 결혼하고, 한국의 탄압받고 고난 받는 사람들을 마지막까지 사랑한 슈나이스, 기독교 신앙과 아시아의 영성을 하나로 접목한 그의 영성의 깊이를 알 길이 없지만, 나는 슈나이스를 연대(Solidarity)의 영성이 몸에 밴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다.

지금은 은하수를 건너 그를 기다렸던, 안병무, 강원룡, 오재식, 서남동, 김관석, 박형규를 만나 함께 신나게 이야기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독일이라는 자기 성 안에 머물지 않고, 성밖으로 나와 걸은 길, 동아시아의 평화를 향한 길 위에서 우리는 언제나 그를 다시 만날 것이다.

이해학 이사장(겨레살림공동체, 목사)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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