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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과 차이하나님은 화해의 사건입니다(역대하 28:8-15; 고린도후서 5:14-19)
김상기 목사(백합교회) | 승인 2022.03.09 23:56
▲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은 이웃을 위해 산다는 뜻이다. ⓒGetty Image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들은 지나갔고  보라 새 것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자기와 화해시키시고 또 우리에게 화해의 직분을 주신 분입니다.”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본문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지요?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과 그의 부활이 그를 믿는 자들에게 갖는 의미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들인 그 둘은 예수만의 사건이 아니라 그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사람들의 사건이기도 하다는 바울을 깨달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란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 안에서 예수와 함께 다시 산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 때문에 삶의 목표가 자신에게서 그리스도로 바뀌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결단이라기보다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 안에 불러일으키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그리스도를 위해 살도록 합니다. 문제는 이 일이 즉각적으로 시행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든 그것은 그에 앞서 우리의 인식 기준이 바뀌는 것을 요구합니다. 그렇게 살기 이전에 인식 기준은 육신(싸르크스)였습니다. 육신을 따라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리스도를 위해 산다는 말에 비춰보면 그 말은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자기를 위해서라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 아닐까요?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거기에 언제까지 머물러 있어도 좋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한 사람은 바울의 말을 빌면 육신에 속한 자라고 할 수 있고, 육신에 속한 자는 그리스도 안에 있으나 아직 성숙하지 못한 어린 아이들 같은 자입니다(고전 3,1-3).

어린 아이 같다고 말하면 그것은 성장이 필요함을 의미합니다. 믿음 곧 그리스도를 앎은 성찰과 성숙의 과정입니다. 어린 아이 같을 땐 육신을 따라 알고 행동하는 것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겠지만, 성찰의 과정이 없는 그와 같은 미성숙한 상태에 계속 머문다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육신을 따라 그리스도를 알지 않겠다고 한 것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오히려 이것을 먼저 말합니다. 삶의 목표와 인식 기준의 변화는 그리스도와의 관계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관계에도 영향을 끼칩니다. 그럴 때에만 그 변화는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육신을 따라’가 자기를 위해 자기중심적으로 사고하는 것이라고 풀이될 수 있다면, ‘육신을 따라 하지 않겠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위해 산다고 말하는 것처럼 너를 위해 산다고 말할 수는 없어도 최소한 그 역시 하나님 앞에 있고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으로 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특히 약자를 그와 동일시하시며 그에게 하는 것을 자기에게 하는 것과 같다고 하십니다(잠 14,31; 17,5; 19,17). 그러면 다른 사람은 우리의 이익을 위한 수단이 될 수 없고 무시와 억압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인식기준이 육신이 되지 않았을 때 그리스도를 앎이 가져오는 변화입니다. 흔히 하는 말대로 다른 사람을 목적으로 대하게 될 것입니다.

바울이 너무 간략하게 말하고 있기 때문에 지나쳐버리기 쉽지만 그의 말에는 이와 같은 성서의 생각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이러한 토대 위에 저 위의 그 유명한 고백이 이어집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육신에 따라 알지 않게 되었을 때를 가리킵니다. 그러한 사람이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그를 이전에 지배하던 것들이 다 지나갔습니다. 자기를 위한 자기중심적인 체계가 무너지고,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를 위한 삶이 새로운 체계를 만들어냅니다. 이것은 바울이나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일이 일어나도록 바울과 우리들에게 화해의 직무를 맡기십니다. 화해의 직무는 새로운 피조물의 사건이 반복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화해는 육신을 따라 사람과 그리스도를 알지 않는 것에서 완성됩니다. 사람들을 육신을 따라 알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 일이 사람들 사이에 확산된다면, 그때 사람들 사는 모습이 어떨지 상상할 수 있습니다. 서로 인정하고 서로 존중하는 평화스런 모습이 아닐까요?

오늘 우리가 읽은 역대하 본문은 바울의 본문이 그리는 것처럼 지속인 것은 아니지만 그 본문에 담긴 모습의 실현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읽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유다와의 전쟁에서 이긴 이스라엘 군대가 수많은 포로들을 이끌고 사마리아로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예언자 오뎃이 그 군대를 맞고 그들을 향해 외칩니다. 그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도구로 사용하여 유다를 심판했는데, 도구인 너희가 분노하여 그들을 살육하고 포로로 잡아와 노예로 부리려고 한다며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려면 포로들을 돌려보내라고 합니다. 이에 감동한 몇몇 사람들이 군대를 막고 이 일이 야훼께 우리의 죄와 허물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군대가 포로와 전리품들을 내놓고 이스라엘은 그들을 극진히 대접하며 돌려보냅니다.

비록 일회적 사건이긴 하지만,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가 강조되고 있기는 하지만, 오뎃은 이스라엘의 행태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알았고, 이를 이스라엘에게 말했을 때 이스라엘은 전쟁으로 얻을 수 있는 이익을 포기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화해의 사건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참으로 진기한 사건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무엇을 겨냥하고 계시는지 그것이 어떻게 실현되는지는 여기서 충분히 드러납니다. 오뎃에게서 몇몇 사람들에게로, 이들에게서 군대에게로 평화의 메시지는 흘러갔고 승자와 패자 사이의 화해가 이루어졌습니다. 이스라엘이 자기 이익과 편리를 고집했다면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란 이러한 사건들이 반복적으로 일어나게 해야 한다는 것을 뜻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 오늘의 본문이 말하는 의미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이라는 조건이 우리에게서 충족되기를 빕니다.

정의와 평화가 간절한 시대에 새피조물로 화해의 사신이 되기를 빕니다. 하나님을 부르는 것이 ‘육신을 따라’에서 ‘육신을 따라 하지 않는’으로의 변화이기를 빕니다. 우리의 미래를 결정할 선택의 시간이 하나님께서 일으키시고 우리가 참여하는 화해 사건의 시작이 되기를 빕니다.

김상기 목사(백합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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