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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석은 근본부터 틀렸다사랑이 향할 곳(요한일서 3:14-16)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 승인 2022.04.03 00:39
▲ 이준석은 애초에 사고방식의 근간이 잘못되어 있다. ⓒ화면 갈무리
14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사순절 다섯째 주일입니다. 이번 주간 성서일과에 따른 본문은 신명기 6장 1-15절, 시편 31편 9-16절, 요한복음 13장 31-35절, 요한일서 3장 11-24절 말씀입니다. 신명기 본문의 말씀은 우리가 잘 아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라는 말씀입니다. 또 이를 자녀들에게도 부지런히 가르치라는 말씀입니다.

신명기 6장 5절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명령합니다. 이 말씀은 오랫동안 잘못 실천되어 왔습니다. ‘하나님 사랑’이 무엇인지 명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저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면 되는가 싶기도 하지만, 우리 신앙인들은 그 사랑을 표출하려고 노력해왔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이 애매했기 때문에 많은 신앙인은 교회를 사랑했습니다.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고 섬기면,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또 어떤 경우에는 목사님을 존경하고 섬기는 일이 하나님 사랑의 한 방법이라고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런 방법으로 하나님 사랑을 표현하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모든 규례와 명령을 지키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대부분의 규례는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요한복음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나누시던 때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팔 제자인 가룟 유다를 떠나보내신 뒤에 오늘 본문의 말씀을 전하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이 확정된 순간, 예수님께서는 이제 자신이 영광을 받으셨고, 이로 인해 하나님께서도 영광을 받으시리라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 이유는 자신의 목숨을 버리면서 세상 사랑을 실천하셨기 때문입니다. 가장 큰 사랑을 몸소 실천하셨기에 예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십니다. 또 예수님께서 사랑을 실천하시는 가운데 하나님께서도 함께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한일서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을 가장 강조하는 편지입니다. 주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사랑하자고 이야기합니다. 비록 세상이 우리를 미워할지라도, 세상은 여전히 악에 머물러 있을지라도 우리는 예수님과 같이 사랑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더 나아가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일도 마다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시편의 본문은 앞의 세 본문과 동떨어져 있어 보이지만, 사랑의 반대편에 있는 증오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세상에서 우리가 흔히 보게 되는 증오들, 욕하고 미워하고 놀리며 고통에 찬 사람을 더욱 고통 속으로 밀어 넣는 이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번 주간 우리에게 주어진 본문은 우리에게 사랑하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규례임을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 보이셨던 그 사랑을 우리가 본받아 세상에서 사랑을 전하며 살아가라고 이야기합니다. 또 사랑이 없는 증오로 가득한 세상에서 시편의 시인이 얼마나 고통 받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오늘은 교회에서 너무도 많이 들으셨을 것이고, 저도 여러번 전해드린 이야기이지만, 사랑에 대해서 함께 말씀을 나눠보려고 합니다. 요한일서 본문을 택하긴 했지만, 요한일서에 관한 자세한 해석보다는 사랑에 관한 포괄적인 이야기를 나눠보려고 합니다.

사랑의 방향

20여 년 전으로 기억하고 있는데, 여름성경학교 찬양 중에 이런 가사를 가진 곡이 있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 사랑하는 건 쉬운 일이죠. 미운 사람 사랑하는 건 어려운 일이지만” 꽤 오래전에 불렀던 찬양이라서 가사가 정확한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렇다고 이 찬양의 가사가 정확히 성경의 말씀과 일치한다고 말하기에도 어려움은 있습니다. 사랑의 대상이 꼭 나를 미워하는 사람에 한정될 이유도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원수도 사랑하라 말씀하셨기 때문에 나를 미워하는 이들도 사랑하려고 노력해야겠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의 대상은 원수에 한정되지 않습니다.

만약 성경이 우리에게 그저 ‘사랑하라’라는 가르침만 전해준다면, 우리는 무엇을 사랑해야 하는지 고민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무엇이든 사랑하면 된다는 결론을 내리게 될지도 모릅니다. 돈을 사랑하고, 권력을 사랑하고, 폭력을 사랑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뭐가 됐든 사랑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무엇이든 사랑하라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아무나 사랑하라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성경에서 세상의 부유한 사람들, 권력자들을 사랑하라는 말을 읽은 적은 없으실 것입니다. 비록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위에 있는 권세에 복종하라’는 말을 하긴 했지만, 이는 세상에서 불화를 만들지 않기 위한 방침이었을 뿐입니다. 세상 권세를 사랑하라고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의 대상은 약한 존재입니다. 포괄적인 의미에서 약한 존재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만, 구약성경에 나타난 사랑의 대상은 실제로 힘이 없는 약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오경을 읽으며 자주 보게 되는 고아, 과부, 나그네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예언자들의 선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소작농이나 노예에게 과중한 일을 시키지 말라는 선포나, 거짓 증언으로 가진 게 없는 이들을 착취하지 말라는 선포, 기울어진 재판으로 가진 자들을 옹호하지 말라는 선포들은 분명 사회적 약자를 도와야 한다는 하나님의 명령을 담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으로 오면서 예수님의 선포 속에서도 이런 말씀은 종종 읽게 됩니다. 특히 누가복음은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도우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강조합니다. 또 예루살렘 교회는 이를 교회의 가장 중요한 역할로 생각하며 실천했습니다.

이렇게 세상 속에서 실제로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도우며 사랑하라는 말씀과 함께 약한 존재 안에는 다른 사람들도 포함됩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참된 뜻을 알지 못하여 구원받지 못하고 죄악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도 예수님에게 있어서는 약한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참된 진리를 모르기에 우리를 괴롭히고 박해하는 이들도 사랑해야 한다고 전합니다. 그들은 아직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약한 존재일 뿐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회개하여 구원의 길에 이르게 하는 일이 참사랑의 실천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랑의 방향은 강한 존재에게서 약한 존재로 향합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힘을 얻은 이들이 그렇지 못한 이들을 사랑하라고 말합니다. 내가 하나님께 물질적으로 복을 받았다면, 물질적인 복을 누리지 못하는 이들을 돕는 일이 사랑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참된 뜻, 말씀의 의미를 깨닫고 구원의 길을 걷고 있다면, 아직 그 뜻을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함께 구원의 길로 나아가는 일이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슴에 품고 사는 이들은 하나님께서 힘을 주시기에 강한 존재입니다.

사랑이 없는 사회

최근 언론에서 장애인 단체의 지하철 시위에 관해 다룬 일이 있습니다. 어쩌면 한두 언론에서 짧게 다루고 끝날지 모르는 일이었지만, 한 정당의 대표가 이에 대해 언급하였고, 같은 정당의 장애인 의원이 직접 시위현장에 나가 이를 사과하면서, 모든 언론사가 이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뉴스를 통해서 이준석 대표의 발언을 보신 많은 분이 혀를 차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언론도 그 대표의 ‘갈라치기’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를 냈습니다. 대선 과정에서는 남성과 여성, 20대와 장년층을 가르더니 이제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가르고 있다고 말합니다.

사실 저는 이 발언을 보면서 ‘갈라치기’가 문제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편을 가르며 특정 집단으로부터 지지받는 일은 정치권에서 사용해온 고전적인 방식입니다. 요즘은 이런 방식이 옳지 않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여전히 정치권에서는 자신들에게 이익이 된다면 편가르기 방식을 사용합니다.

저는 오히려 언론이 이준석 대표의 발언을 ‘정치인’이 옳지 않은 ‘정치 행위’를 했다고 포장해주는 모습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준석 대표가 지금까지 해왔던 이야기들을 보면, 그가 하는 말이나 행동들은 편가르기를 위한 정치 행위가 아닙니다. 애초에 사고방식의 근간이 잘못되어 있습니다.

그가 해왔던 이야기 대부분은 인터넷 게시판 댓글이나 일부 유투버들의 입에서 똑같이 들을 수 있습니다. 그 이야기들의 핵심은 ‘내가 피해를 받았다’라는 데에 있습니다. 20대 남성이 20대 여성에게 무슨 피해를 받았습니까? 일부의 20대 남성들은 자신들이 실제로 피해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여성들의 권리가 향상될수록 자신들은 점점 피해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고 이에 대해 깊은 생각 없이 불만을 내뱉습니다.

이번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의 시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의 시위로 인해 지하철이 제대로 운행되지 못해서 ‘내가 피해를 받는다’는 생각이 기저에 깔려있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이동권을 누리지 못하며 살았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의 이동권은 나의 이동권보다 중요하지 않다고 여깁니다.

여기에서 문제는 나에게 피해를 준다고 지목되는 대상과 집단이 사회적으로 소수에 속하고 사회적으로 약한 계층이라는 점입니다. 지금 이 사회 속에서 우리 대부분은 힘들고 어렵게 살아갑니다. 지금의 사회가 이렇게 흘러가는 데는 힘 있는 자들, 부를 독점하고 있는 이들, 정보를 독점하고 있는 이들, 법을 만들고 집행하는 이들이 바르지 않은 방식으로 자신들의 부를 늘려왔던 이유가 가장 클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시대에 특정 사람들은 이런 이들을 향해 자신의 분노를 표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보다 약하고 가진 것이 없는 이들을 향해 분노합니다. 또 그들을 공격합니다. 약한 이들에게 도움을 주느라 내가 피해를 받았다고 말합니다.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건’ 때에 일본인들이 했던 방식과 똑같은 사고방식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인터넷에서 이런 이야기들을 계속 접하다 보면 그런 이야기에 혹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해보면, 모두가 함께 잘 사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약하고 소외된 이들을 공격할 게 아니라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을 보호하며 도와야 한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아무리 젊다고 하더라도 한 정당의 대표가 인터넷 댓글 수준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는 부분이, 제가 가장 우려스러운 점입니다.

성경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약한 이들을 보호하고 도우며 사랑하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요한일서는 나에게 피해를 주는 이들조차도 사랑하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이 그것이었다고 말합니다.

사랑이 없는 사회입니다. 성경과는 정반대로 가고 있는 사회입니다. 약자를 짓밟고 그들 위에 서려고만 하는 사회입니다. 나에게 조금이라고 피해를 준다고 생각하면 철저하게 분노하며 짓누르는 사회입니다.

이런 사회 속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우리가 됩시다.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가장 큰 사랑을 실천하셨던 예수님의 모습을 보는 사순절이 되시길 바랍니다. 로마의 폭력 앞에서도 끝까지 사랑하셨던 예수님을 닮아가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사랑을 실천할 때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사랑으로 품어주실 줄 믿습니다.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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