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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지 않다“그들의 착각”(요한복음 12:12-19)
이상중 목사(초도제일교회) | 승인 2022.04.12 17:04
▲ Vyacheslav Schwarz, 「Palm Sunday procession in Moscow」 (1865) ⓒWikipedia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나요? ‘선택’에 대한 이야기를 주일 설교와 평일 보내드리는 문자를 통해 계속해서 하고 있습니다. 평안, 감사, 행복은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우리 안에 주어진 것들이기 때문에 전적으로 나의 선택으로 경험될 수 있습니다.

물론 외부로부터 오는 것들에 의해 잠시 잠깐은 평안, 감사, 행복을 느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계속해서 외부로부터 오는 것에 의지하게 되면 또 언제 평안, 감사, 행복을 느낄 수 있을지 알 수 없게 됩니다. 외부로부터 온 것은 빼앗기거나, 잃어버리거나, 깨지거나, 없어지기에 상실감을 느끼게 합니다. 그래서 불안, 두려움, 짜증, 결핍과 같은 좋지 않은 감정에 더 많은 시간 머물러 있게 합니다.

그렇기에 이런 상실감을 주지 않는 우리 안에, 내면에 주어진 평안을 선택하고 누려야 합니다. 돈이나 물건 등과 같은 이 세상이 추구하는 것들에 의한 것이 아닌 하나님에 의해 주어지는 평안과 기쁨을 선택하고 누려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로마서 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일과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와 평화와 기쁨입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시편 4:7 “주님께서 내 마음에 안겨 주신 기쁨은 햇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에 누리는 기쁨보다 더 큽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4:27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평화를 너희에게 남겨 준다. 나는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아라.”

기쁨에 대해서도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6:22 “이와 같이, 지금 너희가 근심에 싸여 있지만, 내가 다시 너희를 볼 때에는, 너희의 마음이 기쁠 것이며, 그 기쁨을 너희에게서 빼앗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시편 기자의 고백, 예수님의 말씀, 사도 바울의 고백을 살펴보면 ‘성령 안에서 누리는 평안, 마음에 안겨 주신 기쁨, 예수님이 주신 평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외부로부터 온 것입니까?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은혜로 이미 이루어져 주어진 평화, 기쁨입니다.

그래서 읽어드린 말씀 구절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우리가 선택하고 누릴 수 있는 평화, 평안, 기쁨, 행복은 이 세상이 주는 것과는 분명히 다른 방식으로 누릴 수 있다는 한 가지와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던 감정들과는 다를 수 있다는 한 가지를 어렴풋이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과 하나님에게서 오지 않는 것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같은 단어이지만 경험할 수 있는 내용이 다르기에 착각이 발생합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할 당시에 유대인들에게 있었던 착각이 그랬습니다.

오늘 본문에 있는 유대인들의 모습을 보겠습니다. “다음날에는 명절을 지키러 온 많은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신다는 말을 듣고,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들고, 그분을 맞으러 나가서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에게 복이 있기를! 이스라엘의 왕에게 복이 있기를!" 하고 외쳤다.”

많은 무리가 모인 이유는 오늘 본문 가운데 있습니다. “17 또 예수께서 무덤에서 나사로를 불러내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사람들이, 그 일어난 일을 증언하였다. 18 이렇게 무리가 예수를 맞으러 나온 것은, 예수가 이런 표징을 행하셨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많은 무리는 예수님이 죽은 사람도 살리고, 기적을 행하는 외적인 무언가를 변화시킬 수 있는 사람임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점들을 고려해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시는 소식을 듣고 ‘이스라엘의 왕’이 되시려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들이 생각한 이스라엘의 왕은 무엇입니까? 로마의 군대,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할 메시아를 말합니다.

예수님이 새끼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장면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성경 말씀 스가랴 9:9의 예언이 성취되는 장면이기도 했습니다. “도성 시온아, 크게 기뻐하여라. 도성 예루살렘아, 환성을 올려라. 네 왕이 네게로 오신다. 그는 공의로우신 왕, 구원을 베푸시는 왕이시다. 그는 온순하셔서, 나귀 곧 나귀 새끼인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죽은 사람도 살리고, 기적을 행하고, 말씀대로 나귀 새끼까지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오고 있는 예수님을 보니 당연히 ‘이스라엘의 왕’으로 자신들을 압제하고 있는 로마를 물리칠 수 있는 군주로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기득권을 가지고자 한 바리새파 사람들도 예수님 때문에 자신들의 욕망이 실현될 수 없음을 느끼고 절망에 찬 목소리로 말합니다. “19 그래서 바리새파 사람들이 서로 말하였다. ‘이제 다 틀렸소. 보시오. 온 세상이 그를 따라갔소.’”

하지만 이것은 예수님을 통해 그들이 보고자 하는 것을 보려 한 것뿐이었습니다. 이런 것과 같은데요. 부모가 아이를 보면서 조금만 자신들의 마음에 드는 행동을 하면, “얘 천재가 아닐까?” 남들은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부모는 “얘 천재가 아닐까?” 내 아이가 천재이기를 바라는 또는 천재여야만 한다는 부모의 잘못된 생각이 아이를 완전히 다르게 바라보게 되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보여주고자 하시는 모습이 아니라 그들이 보고자 하는 모습을 어떻게든 보고자 했습니다. 그들의 착각이, 이 세상을 가지고자 했던 그들의 착각이 예수님을 로마로부터 무력으로 자신들을 해방할 ‘이스라엘의 왕’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한 번도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부르신 적이 없습니다. 무력으로 당신들을 압제로부터 해방하겠다고 하신 적도 없습니다. 빌라도가 단도직입적으로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8:37 “‘아뭏든 네가 왕이냐?’ 하고 빌라도가 묻자 예수께서는 ‘내가 왕이라고 네가 말했다. 나는 오직 진리를 증언하려고 났으며 그 때문에 세상에 왔다. 진리 편에 선 사람은 내 말을 귀담아 듣는다.’ 하고 대답하셨다.”

예수님은 “진리를 증언하기 위해 났다. 그 때문에 세상에 왔다.”라고 빌라도에게 대답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따르던 수많은 사람은 예수님께 무엇을 기대했습니까? 진리였습니까? 아닙니다.

종려나무는 ‘풍요, 승리, 번영’을 상징합니다. 이런 기대로 종려나무가지를 예수님을 향해 열심히 흔들었습니다. 자신들의 어긋난 기대를 담아 예수님을 바라보며 환호하고, 종려나무가지를 열심히 흔들었습니다. ‘이 분이 우리의 외적인 모든 것을 바꾸어 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어떻게 대답했습니까? “나는 진리를 증언하기 위해 왔다.”

2천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무엇을 바라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놀랍게도 진리가 아니라 재물입니다. 외적인 변화를 원합니다. 진리는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고 재물은 눈에 보이고, 만져져서 의지하고 의존할 만하다고 여기기 때문일까요? 어쩌면 한 번도 진지하게 진리에 대해 고민하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진리는 신앙의 목적에서 애초부터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지금 제가 이렇게 말했음에도 “네, 알겠습니다. 그래서 제 돈 문제는 언제 해결됩니까? 제 아들 직장 문제는 언제 해결됩니까? 제 남편 승진은 언제 해결됩니까? 제가 가진 땅 또는 집값이 언제 오르겠습니까? 이런 것들로 평안 얻기를 원합니다. 이런 것들로 기쁨 얻기를 원합니다. 이런 것들로 행복해지기를 원합니다.” 이런 식의 신앙생활이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종려주일 때마다 종려주일을 상징하는 오늘 읽은 본문을 통해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시고, 말씀하신 것을 보지 않고 여전히 내가 보고자 하는 것을 예수님을 통해 보려 하는 것은 아닌가. 알지도 못하면서 우리도 종려나무가지를 흔들었던 어리석은 군중들과 같이 착각하며 살고 있지 않은가.’ 하고 말입니다.

한 주간 저의 가장 큰 관심사는 아내의 운전이었습니다. 매일 운전 연수를 했습니다. 초보이지만 운전을 잘해서 칭찬을 많이 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운전이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저는 가끔 “오우!!!!!! 오우!!!! 오우야!!!!”를 외쳐야만 했습니다.

여러 가지 주의사항을 알려주었지만, 아직은 한꺼번에 여러 가지를 고려하면서 운전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가장 큰 문제는 ‘이 정도면 괜찮겠지.’라고 알려준 대로가 아니라 스스로 판단할 때였습니다.

저도 섬기던 교회에서 담임 목사님이 “운전면허 바로 안 따면 전임 안 시켜 줄 거야!”라고 말씀하셔서 운전면허를 20대 후반에 취득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같이 있던 부목사님이 운전 연수를 시켜주겠다고 하셔서 같이 시내를 돌게 되었습니다.

차가 많이 다니는 시내(동대문 – 혜화)였기 때문에 차가 가까이 붙기도 했고, 멈추고 출발해야 하는 아슬아슬한 상황이 자주 발생했습니다. 한 번은 차를 멈추어야 하는데 부목사님이 알려주신 대로 멈추지 않고 ‘이 정도면 괜찮겠지.’ 싶은 정도에서 브레이크를 밟으려고 하는데, 옆에 계신 목사님은 이미 자기 오른쪽 무릎을 ‘접었다 폈다, 접었다 폈다.’를 반복하며 브레이크를 밟는 동작을 하시면서 ‘브레이크, 브레이크!’라고 다급하게 소리치신 일이 있습니다.

가르쳐준 대로 하지 않고, 스스로 판단하고 하려 할 때 또는 ‘이 정도면 괜찮겠지’라고 생각할 때 사고는 쉽게 날 수 있습니다.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욕망을 취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진’ 내 가치관과 경험과 기준을 가지고 말씀을 대하면 사고가 납니다. 

목회자도 끊임없이 고민해야 할 일이고, 성도도 마찬가지로 고민해야 할 부분이지만, 이런 가치관과 사상, 기준을 말씀에 투영하지 않고, 말씀이 오롯이 드러내는 뜻을 발견하고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종려나무가지를 흔든 무리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자신들의 욕망을 실현하고자 하는 자신들의 경험과 가치관과 지식으로 바라보고 판단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 저와 성도님들이 바라는 것이 이 세상의 재물이라면 얼마나 비참합니까. 여전히 재물이 평안, 기쁨,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여기고 있다면 얼마나 비참합니까. 언제까지 말씀 앞에서 세상을 쫓으려 하는 내 생각과 경험을 선택하겠습니까.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선택하십시오. 말씀을 선택하십시오. 그리하여 이 세상이 줄 수 없지만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평안, 기쁨, 행복을 경험케 되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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