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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을 살자”여기에 계시지 않습니다
홍인식 대표(에큐메니안) | 승인 2022.04.16 16:03
▲ 부활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축복이다. ⓒGetty Image

믿음과 질문

저는 어렸을 때부터 교회에 다닌 사람입니다. 한국교회는 ‘왜?’라는 질문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진리는 왜라는 질문을 통하여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주어지는 그런 것이라는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질문은 용납되지 않았고 오직 복종만이 존재했습니다. 질문과 의심은 하나님에 대한 불경이며 불신앙이었습니다. 사실 이런 문제 때문에 교회를 떠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었습니까?

그래서 세상이 6일 만에 이루어진 것이며 인간은 지금부터 6000년 전에 이 땅에 그 모습을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을 의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드러내지는 못했지만, 저에게는 많은 질문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도마만 해도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매도당해 왔습니까? 도마는 불(不)신앙의 표본으로 상징화되었고 ‘의심 많은 도마’라는 별명도 갖게 되었습니다. 이런 한국교회의 풍조 속에서 오늘 우리는 예수의 부활을 기념하는 부활주일을 맞이합니다.

이 부활의 문제 또한 예수의 성령 잉태와 동정녀 탄생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이성과 지성을 괴롭혀 온 문제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는 이 부활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과연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성서에 의하면 야이로의 딸도 살아났고 나사로도 살아났는데 왜 바울은 예수를 부활의 첫 열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실로 수많은 질문이 쏟아져 나옵니다.

부활과 관련된 많은 질문에 대하여 다 훌륭한 답변을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어쩌면 우리의 이성을 초월하는 신비의 영역에 속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근본주의자들은 이에 대하여 이성적인 답변을 시도하려고 할 것입니다.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부활에 관해서도 성령잉태와 동정녀 탄생의 경우에서처럼 생물학적이거나 과학적인 언어를 사용하여 답변을 시도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신앙고백적 언어를 사용하여 부활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저는 먼저 누가 예수의 부활을 믿고 그것을 고백할 수 있는 사람들일까 하는 문제로부터 시작하려고 합니다. 두 번째, 주님의 부활이 우리 사회와 나의 삶에서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누가 주님의 부활을 고백할 수 있을까?

구약에는 부활에 대한 기록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부활에 관한 생각이 그렇게 강하게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부활에 관한 생각이 두드러지게 된 것은 약 400년 동안 계속되었던 신구약 중간시대입니다. 이 시기는 이스라엘의 역사 중 가장 어두웠던 시기입니다. 나라는 완전히 멸망당하고 강대국들에 의하여 유린되던 시대입니다. 박해가 심했던 시기입니다.

유대의 마카베오 가문을 중심으로 강대국에 대항하여 해방전쟁 벌였던 시기와 해방운동이 실패한 후 큰 박해를 받았던 시기입니다. 많은 사람이 엄청난 박해 속에서 유대의 해방을 위하여 죽어갔습니다. 고문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이들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이렇게 끝나는 것인가?’, ‘정의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고 던졌던 사람들이 이 죽음으로서 모든 것이 끝나고 마는 것인가?’, ‘그들의 고귀한 목숨은 이렇게 끝나고 마는 것인가?’,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이러한 질문 앞에서 그들은 ‘아니다. 이들의 죽음은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다시 생명을 되돌려 주실 것이다.’라는 고백을 합니다. 부활에 관한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형제들에게 생명을 다시 주실 뿐만 아니라 생명을 잃은 우리 공동체에도 생명을 부활시켜 주실 것이다.’라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부활에 관한 생각은 이런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유대 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중요한 진리로 가르쳐지게 됩니다. 부활 사상이 발생하게 된 역사적 배경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 누가 부활을 고백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은 누구를 위해 있는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우리는 단순하게 예수님의 부활의 사건을 접할 수는 없습니다. 중간적인 입장에 서서 아무런 입장표명도 없이 단순하게 그리고 객관적인 사실로 예수의 부활을 접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의 죽음에 대한 엄청난 슬픔을 경험하지 않고서는 주님의 부활을 고백할 수 없습니다. 이 역사 속에서 어쩌면 하나님의 나라가 실패하고 있다는 생각 속에서 예수와 함께 엄청난 고통을 겪지 않고서는 우리는 진정한 주님의 부활을 고백할 수는 없습니다.

다시 말한다면 예수를 진정으로 따르지 않고서 예수의 부활을 고백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우리의 몸을 매달지 않는다면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부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부활을 진정으로 고백할 수 있는 사람들은 바로 예수의 길을 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오직 그들에게만 예수의 부활은 의미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24:1-8에 여자 몇몇이 예수의 무덤을 찾습니다. 이레의 첫날 이른 새벽에, 여자들은 준비한 향료를 가지고 무덤으로 갔습니다. 그들은 무덤 어귀를 막은 돌이 무덤에서 굴려져 나간 것을 보고 안으로 들어가 보니, 주 예수의 시신이 없어졌음을 목격합니다. 예수 부활의 첫 번째 목격자들입니다. 이 여성들이 예수 부활의 첫 번째 목격자가 된 것은 그들은 항상 예수와 동행하고 예수와 함께 길을 가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 부활을 고백하게 됩니다.

예수와 함께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어떻게 부활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나의 죽음 없이는 부활은 없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고백하는 것은 반드시 주님처럼 살겠다는 신앙적인 결단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입니다.

민족의 위대한 스승이었으며 평생 예수의 고난을 몸소 자신의 삶을 통해 실천하셨던 문익환 목사님은 “부활은 사는 것이다. 부활은 죽음에 대한 생명의 승리를 선포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활에 대한 신앙고백은 ‘예수가 다시 사셨다.’라는 명제를 인정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실지로 우리를 위협하고 있는 모든 죽음의 세력과 싸워 이기는 것입니다. 우리의 풍성한 삶을 위협하고 있는 모든 죽음의 우상, 즉 물질 중심, 인권유린, 욕심, 시기 다툼, 증오, 경쟁심을 물리치는 작업입니다.

예수의 삶과는 관계없는 삶을 살면서 부활을 고백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책임 있는 신앙인으로서 예수의 고난과 가치를 실천하면서 살아갈 때 비로소 우리의 삶이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부활을 통하여 또 다른 형태의 존재적 삶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진심으로 깨닫게 될 것입니다.

부활의 사건은 이론적으로 혹은 생물학적으로 과학적인 이성을 가지고 해석할 사건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의 부활을 증명하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만족할 만한 설명을 하지 못했습니다.

부활은 이론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닌 체험하는 것으로서 정의를 위하여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예수의 십자가의 고난을 몸소 지고 예수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가는 사람들은 부활이란 이론적인 것이 아닌 구체적인 사실임을 알게 됩니다.

과연 오늘 우리는 담대히 예수의 부활과 우리와 역사의 부활을 고백할 수 있는 삶을 사는 것일까요? 

부활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혁명은 결국에는 승리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인류 역사에서 하나의 혁명(革命)을 시도하셨습니다. 혁명(革命)이란 뒤바뀜(Revolution)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을 바꾸어 놓으십니다. 높아지려는 자는 낮아져야 합니다. 섬김을 받으려는 자는 섬겨야 합니다. 높은 사람은 낮아질 것입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합니다. 안식일의 주인은 사람입니다. 다스림을 통해서가 아닌 섬김과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는 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예수를 통하여 우리의 가치관을 뒤집어 놓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죽음으로 인하여 이러한 혁명은 실패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부활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혁명이 결국에는 성취되었다는 것을 보여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꾸준히 어려움을 디디고 일어서는 것은 바로 이러한 부활을 통한 하나님의 혁명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기대 때문입니다.

여자들이 무덤 안으로 들어갑니다. 예수의 시신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서 당황하고 있는데, 눈부신 옷을 입은 두 남자가 갑자기 그들 앞에 나섰습니다. 여자들이 두려워서 얼굴을 아래로 숙이고 있는데, 그 남자들이 그들에게 말합니다.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찾고 있습니까? 그분은 여기에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는 실패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진리가 실패한 것처럼 보이는 장소인 ‘무덤’, 여기에 계시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가 죽음의 어두운 세력을 이기고 마침내 다시 사셨다는 선포는 예수를 통하여 시작된 하나님의 혁명이 실패하지 않았고 다시 살아서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부활은 하나님 나라가 실패하지 않았고 다시 시작된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는 죽음의 자리, 여기에 계시지 않고 살아나셔서 하나님의 혁명이 필요한 갈릴리로 가셨습니다.

오늘 예수의 부활을 고백하는 우리도 늘 좌절과 포기 낙심의 자리에서 일어나서 하나님 나라 혁명을 다시 시작하기 위하여 우리 역사의 갈릴리로 나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부활의 예수는 낙담과 실망과 포기의 자리, 여기에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향한 포기하지 않는 사랑을 증명합니다

예수는 십자가상에서 외칩니다.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마치 하나님이 그의 사랑하는 아들을 포기하신 것처럼 보이는 장면입니다. 아들의 고통을 외면하고 고개를 돌리시는 아버지의 모습이 연상되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예수의 부활은 이러한 생각을 단번에 몰아냅니다.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버리신 것이 아닙니다. 부활을 통하여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을 끝까지 돌보시겠다는 약속을 실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망각하지 않고 계십니다. 우리가 사는 현대를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우리 사회는 망각의 사회입니다. 사회 구석구석에서 들려오는 가난하고 헐벗은 사람들을 잊어버리고 사는 사회입니다. 정신적으로 마음의 상처를 가득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하나도 없는 것처럼, 그리고 이웃의 고통을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망각의 사회입니다.

‘개인소득 3만 달러, 4만 달러’라는 통계의 숫자놀음에 속으면서 아픔을 잊고 살아가는 사회입니다. 이러한 사회 속에서 부활을 고백하는 것은 잊어버린 형제들을 돌보는 행위입니다. 교회의 부활은 사회 구석구석에서 힘없이 살아가는 가난한 자들, 병든 자들, 직업 없는 자들, 이민자들을 돌보는 행위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은 결코 그의 자녀들을 포기하거나 잊어버리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부활을 통하여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는 분이심을 밝혀줍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부활의 주를 통하여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게 되며, 또한 잊어버린 이웃의 고통을 상기하면서 부활을 경험합니다. 

마지막으로 예수의 부활은 이름 없는 사람들의 부활입니다

예수는 유대 땅에서 한 이름 없는 유대인으로 살다 죽었습니다. 부활이 없었다면 그는 그렇게 살다가 이름 없이 이 역사 속에서 사라졌을 것입니다. 예수를 ‘예수’가 되게 한 것은 바로 이름 없음을 깨뜨린 부활을 통해서입니다. 예수는 부활을 통하여 한 이름 없는 유대인에서 이름을 회복한 주님이 되십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의 부활은 지금까지 권력을 잡은 자들에 의하여 무시되고 억압받아왔던 그래서 사람 취급을 받아보지 못했던 사람들이 주님의 부활로 인하여 비로소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한다는 의미입니다.

주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교의 한 작은 스승으로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부활은 그러한 모든 것들을 일시에 반전시켜 놓았습니다. 주님은 부활을 통하여 이 역사의 주인이 되심을 천명하였던 것입니다.

이름 없는 사람들이 역사의 주인입니다. 권력을 잡은 자들, 힘이 있는 자들이 이 역사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주님의 부활을 통하여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거의 모든 역사 기록들은 힘 있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강한 자들만의 역사입니다. 남을 누른 자들만의 역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그것도 떠돌이 ‘하비루’들인 히브리 민족을 선택하여 이 역사의 주인공으로 만드셨습니다. 이집트에서 힘 있는 자들에 의하여 인간의 존엄성을 빼앗기고 노예 생활을 하던 하비루(떠돌이라는 뜻으로서 히브리라는 말의 어원이라고 추정됩니다.)를 선택하신 이유는 이름 없는 자들, 힘없는 자들이 이루는 역사야말로 하나님의 선택된 역사라는 것을 몸소 보여 주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그 같은 사실은 이름 없는 조그마한 유대인이었던 예수의 부활을 통하여 다시 한번 확인되었습니다. 피해자들, 상처받은 자들, 천대받던 자들, 억눌린 자들이 부활을 통하여 회복되고 있습니다.

독일의 철학자 칸트는 “부활을 믿을 수 있는 동기는 바로 불의한 가해자들이 더 이상 정당성을 주장하지 못하게 되고 피해자들의 권리가 회복되는 데에 있다.”라고 말합니다. 부활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친 모든 이름 없는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희망입니다.

지난 13일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쳘폐연대(전장연) 대표와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 간의 토론이 진행되었습니다. 거기서 이제 집권당이 될 당의 대표가 장애인들의 이동권 주장을 위한 시위 행동에 대하여 비장애인들의 이동권을 방해한다는 의미의 말들을 쏟아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비문명적 행위라고 규정했습니다.

과연 우리나라는 비문명적 사회인가요 아니면 문명적 사회인가요? 장애인들의 이동권 주장을 위한 절규가 지하철 운행을 조금 지연시키기 때문에 그 행위를 비문명적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진정한 문명사회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살아가는 사회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비장애인이 장애인의 속도에 맞춰야 합니다. 결코, 장애인이 비장애인 속도에 맞출 수가 없습니다. 함께 살아가는 것, 비장애인이 장애인 속도에 맞추는 것이 진정한 문명사회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21년, 아니 수십 년 동안 계속된 장애인들의 외침을 통하여 우리는 이제 비로소 진정한 문명이 무엇인가를 보게 되었습니다. 이름 없는 장애인들이 그들의 권리를 꾸준히 외침으로써(부활함으로써) 우리가 문명사회를 향한 희망을 보게 된 것입니다. 부활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이름 없는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신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부활하신 주님 안에서 우리는 인간의 존엄성을 되찾게 되고 오직 물질로 인격을 판단하는 이 시대를 향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힘차게 외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이 있기에 오늘의 우리가 있습니다. 주님의 부활로 인하여 우리는 조금도 포기하거나 실망하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예수가 가신 길을 뒤따라 갈 수 있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고백하는 자는 주님이 가신 길을 가는 자들입니다. 주님 앞에 결단하고 그분의 뜻대로 살겠다는 각오 속에 우리는 비로소 주님의 부활을 확실히 알게 될 것입니다. 부활은 사는 것입니다. 예수는 살아나셨고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홍인식 대표(에큐메니안)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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