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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 속의 부활마가가 묻는 신앙(마가복음 16:6-8)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 승인 2022.04.17 14:05
▲ Annibale Carracci, 「Holy Women at Christ’s Tomb」 (1600년경) ⓒWikipedia
6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7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 8 여자들이 몹시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

오늘은 부활절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우리에게 부활의 소망을 품게 하신 예수님께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부활이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부활주일 성서일과에 따른 본문은 욥기 19장 23-27절, 시편 118편 14-24절, 마가복음 15장 42절-16장 8절, 고린도전서 15장 1-11절입니다. 올해 교회력에 따른 성서일과의 본문으로 말씀을 전하면서, 최대한 각 본문 사이의 연결점을 말씀드리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주간 구약성경의 본문은 예수님의 부활과 큰 연결점이 없다고 생각됩니다. 본문의 내용이 죽음을 이겨냈거나 죽음 이후에 관해 말하고 있기 때문에 선정되었다고 보입니다. 이런 본문을 예수님의 부활과 억지로 연결시킬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특히 욥기의 본문은 조금 더 신중하게 다뤄야 하기 때문에 이번 주일은 신약성경의 본문만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번 주간 복음서 본문인 마가복음 15-16장은 사실 작년 부활절에도 말씀을 나눴던 본문입니다. 당시에 마가복음 본문에 대한 해석은 충분히 전해드렸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번 주일에는 마가복음이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어떤 질문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마가복음의 부활 사건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고백 중에 가장 오래된 고백은 고린도전서 15장 3-8절에 나타난 고백일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편지가 복음서보다 먼저 기록되었기 때문에 고린도전서에서 사도 바울이 전하고 있는 부활 사건이 초대 그리스도인 사이에서 전해졌던 고백의 원형에 가장 가까울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 나타난 고백에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이후에 베드로에게 먼저 나타나셨고, 그 후에 열두 제자, 그 후에 나머지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고백에는 모든 복음서가 똑같이 말하고 있는 막달라 마리아가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물론 빈무덤을 발견한 여성 목록에는 막달라 마리아 뿐만 아니라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살로메 등이 나타나지만, 요한복음에는 막달라 마리아의 이야기만이 나타납니다. 그녀가 여성이었기 때문에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고백 속에서 배제된 것인지, 그녀가 부활의 최초 목격자였다는 이야기가 후대에 창작되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모든 복음서가 막달라 마리아에 관한 이야기를 자신들의 기록에 담았다면, 그녀가 부활의 목격자였다는 이야기 역시 특정 제자들 사이에서 전해졌고 교회 사이에서 전파되었을 것입니다. 그녀에 관한 이야기가 초기 복음서인 마가복음에 담겨있었다고 해서 나중에 복음서를 기록한 이들이 그 내용을 똑같이 옮겼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3-8절에 나타난 고백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누구에게 나타나셨는지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부활 사건 자체는 3절 하반절에서 4절까지에 짧게 나타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로 끝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부활 사건은 복음서가 말하고 있는 사건입니다. 이 사건이 얼마나 역사성을 띄고 있는지 분명하게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복음서가 전하는 부활 사건, 특히 마가복음이 전하는 부활 사건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는 엿볼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15장 42-47절에는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등장합니다. 아리마대라는 불명확한 지명이 문제가 될 수도 있겠지만, 이 이야기 속에서 그의 역할은 분명합니다. 그의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육체적인 죽음을 맞으셨음을 보여줍니다. 44-45절에 나타난 빌라도의 행동과 예수님의 시체를 넘겨주는 장면은 예수님께서 확실히 죽으셨음을 보여줍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의 부활 고백 다음으로 12절부터 죽은 자의 부활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당시 사람들이 죽은 사람의 부활에 대해 믿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설명을 덧붙입니다. 어쩌면 마가복음이 기록될 당시에도 이런 질문이 있었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실제로 죽음을 맞은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질문입니다.

그래서인지 마가복음은 예수님께서 확실하게 육체적으로 죽음을 맞으셨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증인으로 로마의 빌라도를 내세웁니다. 마가복음 이후에 기록된 다른 복음서들은 마가복음 15장 44절에 나타난 빌라도의 생각과 행동을 삭제합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께서 육체적으로 확실히 죽으셨다는 빌라도의 증언이 불필요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확실한 육신의 죽음을 맞으신 예수님의 이야기는 16장으로 넘어오면서 반전됩니다. 오늘 본문의 빈 무덤 사건을 통해서입니다. 여인들이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을 바르기 위해 갔을 때, 무덤의 문인 커다란 돌이 굴려져 있었습니다. 열린 무덤은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셨음을 상징합니다.

여인들이 무덤 안에 들어갔을 때, 그 안에는 흰옷을 입은 청년이 앉아 있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유대인들이 기록한 문서들을 보았을 때, 흰옷을 입은 청년은 천사를 의미합니다. 그는 여인들에게 말합니다. “그는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이후 천사는 여인들에게 명합니다.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그러나 여인들은 몹시 놀랐고 무서웠기에 도망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여인들이 예수님의 시신에 바르기 위해 가져간 향품은 14장에서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여인의 이야기와 연결됩니다. 베다니에서 예수님께 바른 향유가 죽음을 예비한다면, 오늘 본문에서 여인들이 가져간 향유는 예수님의 부활을 맞이합니다. 그리고 향유라는 소재를 통해 부활 이전과 부활 이후가 하나로 연결됩니다.

천사가 제자들에게 갈릴리로 가라고 명한 것도 그 이유가 가장 클 것입니다. 학자들은 왜 갈릴리라는 지역이 명시되고 있는지에 대해 이런저런 해석을 내놓았습니다. 갈릴리라는 지역이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동네였기에 그곳으로 가라는 명령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훗날 있을 예루살렘 파괴를 피해 갈릴리로 가라는 예언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왜 갈릴리였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생각할 수 있겠지만, 가장 핵심적인 점은 그곳이 예수님 공생애 기간 중 가장 중요한 활동지역이었기 때문입니다. 갈릴리는 부활 전후의 예수님을 연결합니다. 예수님께서 여전히 그곳에서 활동하고 계신다는 사실은 부활 이전의 예수님과 부활 이후의 예수님이 동일한 분임을 이야기합니다.

무덤이 비어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부활하셨음을 보여주기 때문에 갈릴리에 계신 예수님은 똑같은 육신으로 똑같이 활동하고 계신 분이심을 마가복음은 말합니다.

전하지 않는 이들

본래 마가복음은 16장 8절에서 끝납니다. 9절 이후의 말씀은 우리 성경의 각주에도 써 있지만, 후대에 첨가된 이야기입니다. 8절까지의 결말이 너무 이상하게 느껴졌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본래 마가복음이 8절에서 끝나버린다면 이 결말은 정말 이상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빈 무덤을 목격하여 예수님의 부활을 알게 된 여인들은 침묵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부활은 누구에게도 전해지지 않습니다. 마가복음은 이렇게 끝나버립니다.

이런 결말을 통해 마가복음은 우리에게 무엇을 던져주고 있는 것일까요? 그 점은 십자가 사건 이전에 예수님께서 명하셨던 말씀들 속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적을 행하신 이후에 항상 말씀하십니다. ‘아무 말도 하지 말라’, ‘나를 나타내지 말라’ 예수님께서는 항상 침묵을 명하셨습니다.

8장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고백하였을 때도 예수님께서는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경고하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자신의 수난을 예고하실 때에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막9:9) 수난 이후에 ‘복음을 만국에 전파하라’고 명하시기도 했습니다.(막13:9-10)

우리가 마가복음을 읽으면서 보아왔듯이, 예수님의 침묵 명령을 받은 이들은 침묵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이적을 사람들에게 전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침묵하지 않고 전해야 할 시기가 오자 그들은 침묵했습니다. 부활 전파의 명령을 침묵으로 대응했습니다.

마가복음은 애매한 결말, 부활하신 예수님이 등장하지 않는 결말을 통해 우리에게 질문합니다. 눈앞에 보이는 이적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부활을 믿고 전할 수 있겠는가 묻습니다.

모든 상황은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지만, 실제로 만나지 못한 예수님을 믿고 전할 수 있는지를 묻습니다. 그리고 이 전파의 사명을 제자들이 아닌 지금 마가복음을 듣고, 읽는 이들에게 맡깁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전할 수 있는지 묻습니다.

예수님께서 침묵을 명하셨을 때 사람들이 그것은 전했던 이유는 눈에 뚜렷하게 보이는 이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병든 사람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이적입니다. 확실하게 사람의 삶을 좋은 방향으로 이끄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은 어떻습니까?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시어 우리에게 구원의 징표를 보여주셨고 훗날 천국을 꿈꾸게 하셨다. 이 모든 것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입니다. 우리는 삶에서 구원을 느낄 수 없습니다. 죽음 이후 천국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마가복음이 던지는 마지막 질문은 그럼에도 부활을 믿고 전할 수 있냐는 질문입니다. 내 현실에서 뚜렷하게 무엇인가를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더라도, 눈에 보이지 않기에 믿기 힘든 사실일지라도, 그것을 믿고 전할 수 있냐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당시 초대교회 성도들에게만 던지는 질문이 아닙니다. 지금 부활주일을 보내고 있는 우리에게도 던져지는 질문입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복이 아니라 참된 구원, 부활의 소망을 품고 이를 믿고 따르는 신앙을 가지고 있냐고 마가복음은 묻습니다.

이번 부활주일은 삶에 복 주시는 하나님, 은혜 주시는 예수님이 아니라 부활의 소망을 품게 하신 예수님, 구원의 확신을 보여주신 예수님을 기억하는 주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죽음도 이기신 예수님이 함께 하시기에 어떤 순간에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희망을 품게 하심을 믿고 나아가는 주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가 원했던 눈에 보이는 복은 아닐지라도, 부활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참된 구원과 은혜를 내리실 줄 믿습니다. 결코 꺾이지 않는 부활의 소망을 우리가 품게 하시며 이를 세상에 전할 수 있는 힘으로 채워주실 줄 믿습니다.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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