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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다른 삶의 방향을 가리키다“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고린도전서 15:1-11)
이상중 목사(초도제일교회) | 승인 2022.04.19 00:46
▲ Matthias Stom, 「Le repas d'Emmaüs」 (1633-1639년경) ⓒWikipedia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나요? 지금 원치 않는 상황 속에 있든지, 또는 앞으로 어떤 원치 않는 상황 속에 있든지 상관없이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주어진 평안을 선택하기만 하면 됩니다. 주어진 평안을 누리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교회 사역자로 성탄절과 대림절 또는 사순절, 고난주간과 부활절을 준비하다 보면 각 교회 부 교역자들의 곡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시간상으로 성탄절이나 부활절 근처로 성도들이 기쁨을 경험할 수 있도록 또는 예수님의 극심한 고통과 고난을 조금이라도 성도들이 공감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행사를 기획하고, 준비하고, 사람을 동원하고, 진행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번 사순절, 고난주간, 부활절을 보내면서도 역시나 힘들어하는 동기나 후배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농담 삼아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무튼 교회 사역에서 예수님 탄생시키는 것하고 예수님 부활시키는 게 가장 힘들어.”

성탄주일과 부활주일을 위해 프로그램이든 뭐든 만들어 내야 했는데, 이런 프로그램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기쁨’이었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셨어!”, “예수님이 부활하셨어!”에서 기쁨이 빠질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진행되는 프로그램들을 보면 예수님과 전혀 상관도 없는 기쁨을 느끼게 한다거나, 때로는 부활절에 기쁨을 느끼게 하는 경우가 힘들어서 도리어 예수님이 고통 받는 영상, 사진, 말씀 등을 계속 노출 시켜서 성도로부터 슬픔의 감정을 강하게 느끼도록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코로나 이전에는 규모 있는 교회들에서 성가대가 교회음악으로 칸타타를 하는 경우 노래의 길이가 총 30분이라면 29분이 고통, 고난과 관련 있는 노래이고 단지 1분만 부활의 기쁨을 느낄 수 있는 노래를 부르는 장면을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사순절, 고난주간을 통해 충분히 고난에 관해 되풀이해서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기뻐야 할 부활주일에도 고난, 고통이 중심 주제가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예배를 마치고 교회를 나오면 손에든 달걀만 아니면 부활절이 아니라 고난주일 예배를 드린 느낌마저 들곤 했습니다.

왜 고난에 더 초점을 맞출까요? 여기에는 ‘기쁨’에 대한 오해가 있습니다. 갖고 싶은 것을 갖게 되었을 때의 기쁨, 이루고 싶었던 무언가를 이루었을 때의 기쁨, 승부에서 이겼을 때의 기쁨 등 욕구나 욕망이 실현되었을 때 드는 감정을 부활절에서도 느끼려 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와!” 이런 느낌입니다.

그럼 부활절에 우리는 어떤 기쁨을 느낄 수 있을까요? 성도님들 악몽을 꾸신 적이 있나요? 악몽을 꾸게 되면 기분이 어떠셨나요? 꿈이지만 현실처럼 느껴지기에 꿈에서 공포, 두려움 등을 고스란히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악몽을 꾸다가 잠에서 깨면 그 느낌이 좋지 않습니다. 막 잠에서 깼을 때는 꿈과 현실이 분간이 안 돼서 여전히 공포, 두려움의 감정이 남아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꿈이었음을 인지하게 되면 불안, 공포로부터 벗어 날 수 있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보통 “휴~” 하고 한숨을 쉬게 되는데요. 이때 우리는 안도를 하게 됩니다.

부활절에 느낄 수 있는 기쁨이 바로 이런 안도의 기쁨입니다. 오늘 부활절 본문 말씀을 통해 계속해서 이야기를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1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전한 복음을 일깨워 드립니다. 여러분은 그 복음을 전해 받았으며, 또한 그 안에 서 있습니다. 2 내가 여러분에게 복음으로 전해드린 말씀을 헛되이 믿지 않고, 그것을 굳게 잡고 있으면, 그 복음을 통하여 여러분도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사도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에 관해 다시 상기시켜 주겠다고 말합니다. 자신이 전해주었고 당신들이 받은 그 복음이 당신들 믿음의 기초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서 그 말씀을 헛되이 믿지 말아라, 굳게 잡아라, 그럼 그 말씀을 통해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저와 성도님들도 들은 말씀을 굳게 붙들어 구원받고, 또 구원받은 성도답게 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구원은 무엇으로부터의 구원을 의미할까요? 이 구원을 설명하기 위해 바울은 자신이 전해 준 복음이 무엇이었는지 다시 설명합니다.

“3 나도 전해 받은 중요한 것을 여러분에게 전해 드렸습니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과, 4 무덤에 묻히셨다는 것과, 성경대로 사흗날에 살아나셨다는 것과, 5 게바에게 나타나시고 다음에 열두 제자에게 나타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6 그 후에 그리스도께서는 한 번에 오백 명이 넘는 형제자매들에게 나타나셨는데, 그 가운데 더러는 세상을 떠났지만, 대다수는 지금도 살아 있습니다. 7 다음에 야고보에게 나타나시고, 그 다음에 모든 사도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8 그런데 맨 나중에 달이 차지 못하여 난 자와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베드로, 열두 제자, 오백 명이 넘는 형제자매, 야고보, 모든 사도 그리고 자격 없는 자신에게도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셨다고 설명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 예수님을 만난 이들이 어떻게 만났는지, 만나서 무엇을 했는지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예수님과 만난 사람들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증언합니다.

죽을까 고문당할까 두려워 예수님을 부인하거나, 뿔뿔이 흩어졌던 사람들, 예수님이 세상의 왕이 되시면 높은 권력을 차지하려고 했던 사람들, 입으로 들어갈 빵 때문에 예수님을 쫓았던 사람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는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을 위해서라면 죽음과 고통, 고난도 감내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이들에게 어떤 변화가 있었기에 전혀 다른 사람들이 되었을까요? 두 가지 변화가 있었습니다. 한 가지는 이 세상이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면서 생긴 변화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5:51-52 “내가 이제 심오한 진리 하나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죽지 않고 모두 변화할 것입니다. 마지막 나팔 소리가 울릴 때에 순식간에 눈 깜빡할 사이도 없이 죽은 이들은 불멸의 몸으로 살아나고 우리는 모두 변화할 것입니다.”

또 다른 한 가지는 이 세상에 살면서 목적이 달라진 변화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5:19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이 세상에만 해당되는 것이라면, 우리는 모든 사람 가운데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이 세상에 해당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늘 들어왔던 성공, 부유함, 권력, 힘, 건강 등과 우리가 생각하는 선한 목적이나 옮음, 정의까지도 포함됩니다.

이 두 가지를 합쳐서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8:36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오. 나의 나라가 세상에 속한 것이라면, 나의 부하들이 싸워서, 나를 유대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지 않게 하였을 것이오. 그러나 사실로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자신에게 어떤 극적인 변화가 있었는지를 간증하고 있습니다. “9 나는 사도들 가운데서 가장 작은 사도입니다. 나는 사도라고 불릴 만한 자격도 없습니다. 그것은,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했기 때문입니다. 10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의 내가 되었습니다. 나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는 헛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사도들 가운데 어느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한 것은 내가 아니라,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11 그러므로 나나 그들이나 할 것 없이, 우리는 이렇게 전파하고 있으며, 여러분은 이렇게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한 사람이었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을 만나 변화된 이후 오늘의 내가 되었다는 고백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변화된 바울은 전혀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고린도후서 6:10의 말씀에서 이런 변화된 바울의 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근심하는 사람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사람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사람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

앞에서 바울은 구원받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무엇으로부터의 구원인지에 대해 질문드렸습니다. 바로 ‘이 세상 자체’로부터의 구원입니다. ‘진짜라고 여기며 살아왔던 이 세상이, 삶이 실은 꿈처럼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이런 깨달음이 오면 다른 방향으로 살 수 있게 됩니다. 다른 방향의 삶이 있다는 것에 우리는 안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어진 삶에서 나의 역할은 다른 것에 있었구나.’ 이런 깨달음이 있을 때 비로소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도 실천할 수 있게 됩니다.

시편 30:11-12 “주님께서는 내 통곡을 기쁨의 춤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나에게서 슬픔의 상복을 벗기시고, 기쁨의 나들이옷을 갈아입히셨기에 내 영혼이 잠잠할 수 없어서, 주님을 찬양하렵니다. 주, 나의 하나님, 내가 영원토록 주님께 감사를 드리렵니다.”

새로운 삶의 방향으로 향하는 사람은 통곡이 기쁨의 춤으로 슬픔의 상복이 기쁨의 나들이옷으로 갈아 입혀지는 은혜를 경험케 됩니다.

4월이 되면서 기독교 각 교단에서 목사와 장로가 모여 회의하는 노회 또는 노회와 비슷한 모임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그러셨습니다. ‘목사들, 장로들이 모인 곳이 가장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곳 같다.’ 모임 장소에서 권력을 탐하고, 집단의 힘을 자랑하려 하고, 개인적인 이익을 취하려고 하고, 거짓과 술수가 오가는 모습을 쉽게, 너무 쉽게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일부터 1박 2일간 있을 강원노회를 위해서도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부활하시기 전의 제자들은 권력을 탐하고 힘을 탐했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는 이런 권력이나 힘을 오물처럼 여겼습니다. 이들에게 다른 삶의 방향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강원노회를 위해 모이는 저를 비롯한 모든 목사님들과 장로님들이 오늘 주일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이 세상에 속한 것을 구하지 않음으로, 세상에서 가장 불쌍하고 불행한 사람들이 되지 않도록 기도 부탁드립니다.

‘엠마우스’라는 빈민구호 공동체를 만들어 평생을 집 없는 가난한 사람들과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함으로써 ‘살아 있는 성자’로 불리며 전 세계 사람들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았던 피에르 신부님은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온갖 잔혹한 행위들이 우리 모두에게 상처를 입히지만 그럼에도 내 신앙생활의 핵심은 세 가지 확신에 토대를 두고 있다. 내 신앙의 첫 번째 토대는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확신이다. 두 번째 토대는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이다. 그리고 세 번째 토대는 하나님의 사랑에 우리도 사랑으로 응답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인간의 자유가 존재하는 이유라는 확신이다.”
- <단순한 기쁨>

그래서 피에르 신부는 예수님의 부활에 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대속이란 도둑맞은 자가 도둑이 벌을 받는 걸 바라지 않고, 오히려 강렬한 사랑으로 도둑이 훔친 것을 되돌려주도록 스스로를 내어주는 것이다. 사람의 아들은 자신의 생명을 내어줌으로써, 전원이 차단되어 실의에 빠진 인간에게 사랑하는 능력을 되찾게 해주는 것이다.”
- <단순한 기쁨>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확인시켜 주셨고 또한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부활하심으로 이 세상에 속한 것을 구하는 삶이 얼마나 무의미한지 알려주셨고, 다른 방향의 삶으로 안내해 주셨습니다. 부활하심으로 사랑이 없다고 생각한 우리에게 사랑을 주시고, 나보다 더 한 일도 할 수 있다며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능력을 주시고, 함께 하시며 인도하십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며 기뻐하십시오. 안도하십시오. 그리고 교회 밖으로 나가 당신도 얼마든지 지금과 다른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고 축복하며 기쁜 소식을 전하는 정와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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