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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훼의 날을 기다리는 사람은 누구인가영이 내릴 때(요엘 2:28-32)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 승인 2022.06.05 16:02
▲ John Martin, 「The Great Day of His Wrath」 (1851) ⓒWikipedia
28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29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30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31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 32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이번 주일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그리고 8월 마지막 주일까지 성령강림 절기가 계속됩니다. 성령강림주일에 사용되는 구약성경의 본문은 거의 한정적입니다. 그래서 혹시나 요엘 2장의 본문이 이번 주 본문으로 선정되진 않았을까 했는데, 역시 요엘 본문이 선정되었습니다.

구약성경에 나타나는 ‘영’과 신약성경에 나타나는 ‘성령’은 표면적으로 같은 표현이지만, 구체적으로 따져보면 의미가 약간 다릅니다. 구약성경 안에서도 예언서에서 사용되는 ‘영’과 다른 본문에서 사용되는 ‘영’은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 6장 3절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나타나는데,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때 하나님의 영은 사람을 창조하실 때 불어넣으셨던 하나님의 숨결을 의미할 것인데, 이는 생명의 근원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예언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은 생명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생명이라는 개념에서는 똑같이 볼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의 영을 받은 이들은 기존과 다른 모습을 갖게 됩니다.

이런 차이 가운데, 저희는 요엘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그것이 신약성경 시대에는 어떻게 의미가 확장되는지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또 성령강림주일에 우리는 무엇을 다짐하고 실천해야 하는지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요엘에서의 야훼의 날

본래 오늘 지정된 요엘 2장의 본문은 23-32절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하게 짚고 넘어가야 하는 점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성경에서 요엘은 3장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히브리어 성경과 헬라어 성경인 70인역에서 요엘은 4장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 성경에서 요엘 2장 28-32절로 되어 있는 부분은 본래 3장 1-5절입니다. 그리고 우리 성경의 3장은 4장이 됩니다. 히브리어와 헬라어 성경은 이렇게 4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라틴어 성경인 불가타 역본에서 3장을 2장 아래로 편입시킵니다. 현재 사용하는 대부분 성경은 불가타 라틴어 역본의 구성을 따르고 있고, 한글 성경 중에는 공동번역 성경만 히브리어와 헬라어 성경의 구성을 따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장절의 구분은 큰 의미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장절을 구분하지 않고 성경을 쭉 읽어간다 해도 가독성은 떨어지겠지만, 큰 문제는 없습니다. 그런데 요엘에서는 약간의 문제가 생깁니다. 우리 성경의 장절 구분을 따라서 말씀드리자면, 1:1-2:27과 2:28-3:21의 내용이 명백하게 구분된다는 점 때문입니다.

요엘에는 크게 두 가지의 상황이 나타납니다. 하나는 메뚜기 떼에 의한 재난 상황이고 다른 하나는 이방 국가에 의한 침략과 포로 생활입니다. 1:1-2:27의 본문은 메뚜기 떼에 의한 재난 상황을 말하고 있고, 2:28-3:21은 외세의 침략에 의한 재난 상황을 말합니다.

이 둘을 연결하는 고리는 심판과 회복의 주제이며, 조금 더 자세히 말하자면, ‘야훼의 날’이 두 본문을 연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두 본문에 함께 나타나고 있는 ‘야훼의 날’의 의미는 약간 다릅니다. 그리고 이 차이가 두 본문의 차이를 더 크게 만듭니다.

앞선 본문(1:1:2:27)에서 ‘야훼의 날’은 심판의 날입니다. 이스라엘은 이미 메뚜기 떼에 의해 심각한 피해를 입은 상태입니다. 2장 2-5절은 메뚜기 떼를 군대에 비유하며 그 끔찍한 피해를 설명합니다.

아프리카와 중동 지역에서 발견되는 사막 메뚜기 떼에 의한 피해는 인터넷에서 검색해보면 금방 찾을 수 있습니다. 이는 현대에도 큰 문제가 되고 있기 때문에 이를 방지하기 위한 연구도 계속 진행 중에 있습니다. 최근에는 중국 남서부의 원난성에서도 메뚜기 떼에 의한 피해가 있었습니다.

현대에도 국가적 재앙으로 불리는 재난이기 때문에 고대 사회에서는 더욱 큰 재난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이 피해로 인해 이스라엘 엄청난 식량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요엘은 이런 순간을 겪은 후에, 이것이 끝이 아니라고 선포합니다. 우리가 회개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는 더욱 큰 재앙을 내리실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이런 외침 속에서 나온 표현이 ‘야훼의 날’입니다. ‘야훼의 날’은 메뚜기 떼로 인한 재난보다 더욱 큰 재난이거나 메뚜기 떼로 인한 재난이 재현되는 순간입니다. 따라서 이 순간에는 오롯이 심판만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뒤의 본문(2:28-3:21)에서 ‘야훼의 날’은 심판의 날이면서 구원의 날이 되기도 합니다. 2장 32절을 보면,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3장은 이방 민족을 향한 심판을 이야기하면서 예루살렘은 굳건하게 서리라고 말합니다.

이 본문에서 ‘야훼의 날’은 이방 민족에게 심판의 날이지만, 이스라엘에게는 구원의 날이자, 온 세계에 우뚝 서게 되는 날입니다. 이 본문이 마치 모든 민족 중 하나님을 믿는 이들에게 구원의 길이 열려 있는 것처럼 보이긴 하지만, 요엘이 구원을 선포하는 이들은 분명 이스라엘 민족뿐입니다.

영을 받은 이들

앞의 본문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고 구원에 이를 수 있는 방법은 금식과 회개로 나타납니다. 옷이 아닌 마음을 찢고 하나님께 돌아왔을 때, 은혜롭고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인해가 크셔서 뜻을 돌이키시는 하나님께서 재앙을 내리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뒤의 본문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회개가 전제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두 본문의 상황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앞의 본문은 자연 재난에 의한 심판 상황이지만, 뒤의 본문은 이웃 국가에 의한 심판 상황입니다.

앞의 본문에서 이스라엘 민족은 메뚜기 떼가 지나간 폐허 위에 서서 재건을 준비하고 있지만, 뒤의 본문에서 이스라엘 민족은 전쟁으로 인해 폐허가 된 땅 위에 서 있지 않습니다. 나라가 폐허가 된 후에 그들은 침략자의 나라에 사로잡혀가 노예가 되거나 여러 나라로 팔려가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두 본문이 완전히 동떨어져 있다고 말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앞선 본문에 나타난 회개가 없다면, 뒤의 본문을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뒤의 본문에서 회개가 요구되지 않는 이유는 이미 2장 전반부에서 이스라엘에게 회개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선포 이후에 2장 18절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불쌍히 여기셨다’라고 말합니다. 개역개정 성경의 각주에는 이것이 과거형이라고 적혀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을 불쌍히 여기신 이유는 그들의 회개가 전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회개했고, 메뚜기 떼의 피해로부터 회복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또 다른 시련이 닥쳐왔습니다. 이웃 국가에 의한 침략입니다. 이스라엘은 회개했지만, 여전히 악한 이웃 국가에 의해 침략 당했고, 고통당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에게 필요한 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이때 하나님의 영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영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내려집니다. 자녀들은 예언을 하고, 노인들은 꿈을 꾸고, 젊은이는 환상을 봅니다. 이들의 모습은 마치 예언자의 모습과도 유사합니다. 예언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전하는 이들입니다. 즉 모든 이들이 예언자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듣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요엘의 선포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영을 받았으니 우리는 모두 구원을 얻는다로 끝나지 않습니다. 2장 32절에서 요엘은 하나의 단서를 더 붙입니다. ‘야훼의 이름을 부르는 자’라는 단서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자’로 바꿔도 큰 문제가 없다고 봅니다.

이런 하나님의 영에 대한 이해는 대예언서로 불리는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에서도 비슷하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마침내 위에서부터 영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리니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되며 아름다운 밭을 숲으로 여기게 되리라. 그 때에 정의가 광야에 거하며 공의가 아름다운 밭에 거하리니, 공의의 열매는 화평이요 공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이사야 32:15-17)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예레미야 31:33)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에스겔 36:26-27)

이 예언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점은 하나님의 영을 받은 이들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간다는 점입니다. 이사야는 그때에 정의와 공의가 펼쳐진다고 말합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법이 마음에 새겨진다고 말합니다. 에스겔은 하나님의 율례와 규례를 행한다고 말합니다.

요엘을 두 부분으로 나눠서 살펴보고 이를 다시 하나의 본문으로 엮어서 생각했을 때, 앞선 본문이 회개를 통해 죄를 씻어내기를 요구하고 있다면, 뒤의 본문은 이제 하나님의 영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라고 말합니다. 요엘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영은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능력입니다.

성령의 역할

요한복음 3장 5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보통 이 말씀은 요한복음을 기록한 공동체의 입교 예식으로 이해합니다.

지금도 우리가 행하고 있는 세례식과 마찬가지로 물을 통한 세례와 하나님께 성령을 받는 예식 두 가지가 존재했다고 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두 가지의 예식을 요구했을까요? 물에 의한 세례는 죄를 씻어내는 의식입니다. 성령에 의한 세례는 그리스도의 뜻에 따라 살아가기 위한 다짐의 의식입니다.

오순절 다락방에 모여 있던 제자들은 성령강림을 체험합니다. 성령이 이들에게 임하였을 때, 숨어있던 이들은 밖으로 나와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했습니다. 사도들도 더 이상 숨지 않았습니다. 성령강림 사건 이후 그들은 자신을 드러내고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예루살렘 교회가 구제 사업에 앞장섰던 점은 그것이 그리스도의 뜻에 부합된 삶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처럼 살고자 했고, 그래서 어려운 이웃에게 자신이 가진 것을 베풀려고 노력했습니다. 이런 베품에 인색한 이들은 공동체에서 제외되었습니다.

요엘 전체 본문이 회개와 실천에 의한 구원을 이야기하고 있다면, 요한복음은 물과 성령에 의한 구원을 이야기합니다. 또 사도행전에 나타난 성령의 모습을 보았을 때, 성령은 요엘에 나타난 실천하게 만드는 영과 연결됩니다.

다만 구약과 신약에서 실천이라는 부분에 차이는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구제에 힘쓰긴 했지만, 이들의 실천에는 복음 전파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는 구약에 나타난 영의 역할에서 확장된 부분입니다.

구약, 특히 요엘에 나타난 영은 오직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내려집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 이후 구원의 대상은 더욱 확장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뿐만 아니라 온 인류가 구원의 가능성을 품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이들에게는 새로운 사명이 생깁니다. 그리스도를 모르는 이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하는 일입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이익을 주는 어떤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가 갖지 못한 능력이나 힘, 세상에서 남들보다 잘 살게 하는 힘을 주는 존재가 아닙니다. 성령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세상에 하나님을 드러내며 살 수 있도록 힘을 주시는 존재입니다.

우리가 지금 하나님의 뜻대로 바르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성령을 간구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지금처럼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시면 됩니다. 그렇게 살아가고 계신 여러분은 이미 구원의 길을 걷고 계신 분들입니다.

하지만 때로 세상의 유혹에 흔들려 하나님의 뜻보다는 세상의 뜻을 따르게 된다면, 하나님의 영, 성령을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이 주는 작은 기쁨, 찰나의 기쁨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기쁨과 평안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성령이 함께 하시길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을 우리에게 내려주셔서 우리가 참된 구원의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이끄실 줄 믿습니다. 성령강림주일, 품고 계신 하나님의 영에 따라 계속 그 뜻을 실천하며 살아가길 다짐하시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에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 내릴 줄 믿습니다.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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