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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의롭게 되었다, 그렇다면하나님의 공의와 우리의 의(이사야 5,1-7; 갈라디아서 2,15-21)
김상기 목사(백합교회) | 승인 2022.06.23 00:42
▲ 그리스도를 통해 맺어진 새계약 역시 하나님과의 계약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Getty Image

사람이 의롭게 된다는 것 내지 의롭다고 여겨진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 말을 둘러싸고 수많은 이해와 오해들이 존재하고 오용 내지 남용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말이 우리에게 중요한 만큼 그 말의 성서적 의미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갈 필요가 있습니다.

오해로부터 자유로워지고 깨달음으로 기쁨을 얻을 수 있기를 빕니다. 이를 위해 시편 82편의 다음 말씀을 출발점으로 삼고자 합니다.

가난한 사람과 고아
억눌린 사람과 없는 사람에게 ‘공의’를 베풀어라.
가난한 사람과 어려운 사람을 벗어나게 하라.
그들을 악인의 손에서 구해내라(3-4절)

이는 하나님이 법정을 책임지는 재판관들에게 요구하는 말씀입니다. 무엇보다 먼저 관심을 끄는 것은 가난한 사람과 고아를 재판하라는 명령입니다. 이 말이 의미 있으려면 가난한 사람이나 고아들은 자신들의 문제를 법정의 힘을 빌어 해결하고 싶어도 그렇게 하기가 어렵다는 것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요즘에도 힘없는 사람들은 억울한 일이 있어도 재판을 받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그 시대에도 그럴 수 있겠다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재판관들이 힘없는 사람들의 재판을 기피할 수도 있고 또 힘 있는 자들의 재판으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더 나아가 본문은 힘없는 사람들을 재판하되 그들에게 공의를 베풀라고 요구합니다.

공의를 베푼다는 것은 최소한 의롭다고 또는 무죄라고 선언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힘없는 사람들은 악인들로 일컬어지는 권력자들을 상대로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재판관들은 이들 앞에서 힘없는 사람들의 의로움 내지 무죄를 선언함으로써 그들의 빼앗긴 권리를 회복시키고 갖가지 위협으로부터 그들을 지켜내야 합니다. (율)법 준수 여부는 여기서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합니다.

성서에서 의롭다고 선언한다는 것은 이러한 맥락을 염두에 둘 때 비로소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이를 확인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갈라디아서 2,16에는 ‘의롭다고 하다/의롭다고 여기다’는 말이 수동태로 세 번 나옵니다. 그 말의 실질적 주어는 재판관 곧 하나님입니다. (율)법과 그에 따른 행위는 여기서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합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사람이 스스로 의롭다고 선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시편 기자가 고백하는 대로 “살아있는 사람은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 의로울 수 없습니다”(143,2).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심판을 하신다면 심판을 면할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에게 의롭다고 선언해주실 분이 있다면, 하나님 한분 밖에 더 있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 편이시라면…’이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여기서 ‘의롭다고 하다/의롭다고 여기다’는 말의 의미가 명확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그와 연관된 예수 사건을 간단하게나마 돌아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지난 날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계약을 맺으시고 그들의 하나님이 되셨고 이스라엘은 그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때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기로 서약했습니다. 하나님과 백성의 관계를 지속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은 법이지만, 그 시작은 ‘믿음의 계약’입니다.

이로써 하나님은 이스라엘 편에 서시기로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이스라엘은 그 계약에 충실하지 않았고, 결국 예레미야를 통해 믿음의 계약을 파기했다는 선언을 듣습니다. 이스라엘은 무늬만 하나님의 백성일 뿐 하나님 편에 서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깨진 계약을 갱신하고자 계획하셨고, 그 결과가 예수 사건입니다.

예수 사건은 이스라엘만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라는 점이 이전과 다릅니다. 예수 안에서 이스라엘과 비이스라엘의 경계가 허물어졌습니다. 예수를 통해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이 되고 우리는 그의 백성이 됩니다. 시내산에서 그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던 법이 예수 안에서 사랑의 법으로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이스라엘은 시내산에 이르는 출애굽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했고, 이것이 ‘믿음의 계약’의 토대였습니다. 예수 사건 역시 누가복음 4,18이 말하는 대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선포되고 굴레와 억압과 장애로부터 해방되는 은총의 사건입니다(사 61,1-2 참조). 그 사건에서 하나님은 그와 같은 이유들로 고통당하고 신음하는 자들의 편이 되셔서 그들에게 ‘자유’를 선언하십니다.

바로 이 자유의 선언이 의롭다고 하는 선언과 공속관계에 있습니다. 그 사건으로 모든 ‘불의한’ 힘들이 거부되고 최종적으로 죽음도 힘을 잃습니다. 믿음이란 예수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이 해방 사건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이고, 이에 따라 우리는 자유와 의로움을 얻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믿음은 앞서 말한 대로 그의 사랑의 법을 지키겠다는 약속을 포함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은 예수 안에서 하나님과 맺는 ‘계약’입니다. 계약 아닌 믿음은 없고 그렇지 않은 믿음은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는 우리가 세상에 대해 죽고 하나님에 대해 살도록 하려는 것이며, 이것이 ‘의롭다고 선언 받은’ 사람이 살아갈 삶의 방향입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그 힘들이 여전히 작동 중이고 우리가 그 영향에서 벗어난 것도 아닙니다. 바울은 그 힘들을 “환난입니까, 곤고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협입니까, 또는 칼입니까?”라는 말들로 나타내고 “죽음도, 삶도, 천사들도, 권세자들도, 현재 일도, 장래 일도, 능력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에 어떤 피조물도”라는 말로 그 배후를 지시합니다(롬 8,36-38).

그러나 이전과 달리 그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그 사랑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 모든 일들을 견디고 그 힘들을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그것들의 ‘종’이 아닙니다. 이것이 예수 안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선언 받는 것의 의미입니다. 바울의 말로 하자면, 그 힘들의 ‘종’이었던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 해방되었고, 그래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변화 아닙니까? 그렇다고 우리가 그 변화를 다 살아낸다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이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갈 5,24). 때문에 여전히 우리는 저 시편 143편 기자처럼 “살아있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 앞에서 의로울 수 없습니다”라고 고백하며 “주님은 나의 하나님이시니, 주님의 뜻을 따라 사는 길을 가르쳐 주십시오. 주님의 선하신 영으로 나를 이끄소서”라고 간구하게 됩니다.

이사야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기대를 포도원의 노래로 부른 적이 있습니다(5장). 하나님은 가장 좋은 곳에 최고의 정성을 기울여 포도원을 만드시고 최상의 포도나무를 심었습니다. 그러니 좋은 열매를 맺으리라는 기대는 누가 보아도 당연합니다.

그런데 막상 수확기에 보니 들포도를 맺었습니다. 하나님의 실망과 배신감이 얼마나 컸을지 상상이 갑니다. 하나님이 맺기를 바라셨던 좋은 열매는 정의(미쉬파트)였는데, 맺은 열매는 살륙(미쓰파흐)이었고, 공의(쩨다카)를 기대했는데 결과는 울부짖음(쩨아카)였습니다.

왜 이런 결과가 빚어진 것일까요? 앞의 말을 빌어 표현하자면, 이스라엘은 믿음의 계약을 위반한 것입니다.

공의와 의롭다고 선언하다/의롭게 하다는 어원이 같습니다. 의롭게 된 사람들이 이루어내야 하는 것이 공의와 정의입니다. 이를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열 번째 계명이 말하는 탐심을 억제하는 것인데, 그렇지 못했던 이스라엘은 살육을 자행했고 울부짖음을 만들어냈습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다는 고백이 무엇을 지향하는지 엿볼 수 있지 않을까요? 예수 안에서 믿음으로 의롭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의 정체성은 사람을 살리고 자연과 화해하는 공의와 정의에서 실현되고 드러날 것입니다.

우리를 의롭다 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시고 기대하시는 이러한 삶이 우리의 삶이 되기를 빕니다. 예수 안에서 우리를 의롭다 하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를 압박하는 모든 힘들에 맞서 넉넉히 이기는 삶을 살기를 빕니다. 우리를 우울하고 아프고 슬프게 하는 고통스런 사건들이 계속 되어도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에게서 희망과 미래를 발견하는 우리의 믿음이기를 빕니다.

김상기 목사(백합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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