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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게 하시는 은총하나님에게로(호세아 11,1-11; 누가복음 15,11-32)
김상기 목사(백합교회) | 승인 2022.08.17 22:47
▲ Bartolome Esteban Murillo, 「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c. 1667-1670) ⓒWikipedia

내일은 빛을 다시 찾은 광복절입니다. 지금 우리는 전례 없는 번영을 누리고 있어서 일제강점기가 아주 먼 옛날의 일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더군다나 그 시대를 살았던 분들이 이제는 얼마 안 계셔서 그 시대는 완전히 지난 과거가 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어린 시절이 어떤 것이었든 그때가 있어서 지금 우리가 있는 것처럼 그 시대가 감내하기 힘든 고통의 시대였고 흑암의 시대였지만 우리의 과거입니다. 그 시대를 마감 짓는 내일이 있어서 오늘 우리가 있습니다.

그날을 위해 목숨을 던진 이들이 참으로 많았고 무수한 사람들이 고초를 당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날이 올 것을 예상하고 준비한 이들은 많지 않았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어둠 속에 갇혀 아무 희망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날은 왔습니다. 갑작스러웠습니다. 이스라엘이 아무 준비도 못한 채 갑자기 이집트를 떠나야 했던 것처럼 우리는 일제강점기를 그렇게 ‘떠났습니다.’

빛을 다시 찾은 날, 그날은 빛을 찾아가는 여정의 시작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의 잔재를 말끔히 떨쳐버리고 빛을 온전히 누리기 위한 그 여정은 사실상 아직 마무리 되지 않았습니다. 부패하고 불의한 세력들에 의해 저지되기도 하고 지체되기도 했습니다. 그러한 세력들이 여전히 저항하고 있지만 그때는 가까이 와 있습니다. 그러한 세력을 청산하고 여정을 마감하는 그날 우리는 진짜 빛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날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우리는 기독교인으로서 그 날의 배후에 하나님이 계셨고 하나님이 그 날을 일으키셨고 그날의 완성을 향해 우리를 이끌어가신다고 고백합니다. 빛을 다시 찾은 그날이 하나님의 역사를 되새기고 정의와 자유와 생명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우리의 뜻으로 받아들이는 날이 되기를 빕니다. 그 뜻이 우리를 통해 이루지는 우리의 역사가 되기를 빕니다. 존립 자체가 불투명해진 지구에 희망을 주고 다음 세대의 미래를 활짝 여는 우리가 되기를 빕니다.

오늘의 본문들에서 우리는 그러한 우리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을 만납니다. 하나님이 시작하신 이스라엘과의 역사는 이스라엘의 일관성 없는 태도 때문에 심하게 뒤틀려진 역사입니다. 하나님은 아기를 돌보듯 정성을 다해 이스라엘을 보살폈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 대신 다른 신들을 찾기도 했고, 또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만들었고 또 만들고자 하는 사회를 끝내 거부했습니다.

하나님은 약자들이 존중받는 사회를 원하셨지만, 이스라엘 역사는 시간의 흐름과 함께 그로부터 멀어져만 갔습니다. 하나님은 예언자들을 보내 그들을 돌려세우려고 애쓰셨지만 허사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는 동안 분노하고 참고 용서하기를 반복하셨습니다.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끝까지 유지하고 싶으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은 한 마음으로 역사를 만들어갈 수 없는 것일까요?

호세아는 북이스라엘의 멸망을 몇 십 년 앞두고 활동했던 예언자입니다. 하나님은 멸망의 비극을 막고 이스라엘과의 역사가 계속되게 하려고 그를 보내셨고 이스라엘을 그에게 돌아오게 하려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시도는 위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그는 예언서를 남긴 최초의 예언자임에도 하나님이 북이스라엘에 보내신 거의 마지막 예언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은 여전히 이집트로 돌아가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광야에 있을 때도 위기가 닥치면 늘 이집트 타령을 했습니다. 거기에서 벗어난 지 수세기가 지났어도 그러한 행태는 계속되었습니다. 앗시리아의 위협 앞에서 이스라엘은 이집트를 찾습니다. 광야에서 숱한 위기를 만났지만 그때마다 그들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에 의해 그 위기가 극복되었음에도 그들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사사시대에도 그들이 위기에 처한 까닭은 그들이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인데 그들은 이를 깨닫지 못한 듯 하나님의 구원 이후에도 또다시 하나님을 떠나곤 했습니다. 왕정이 들어선 이후에도 이스라엘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위기가 다가오고 있음을 알려도 그들은 바뀌지 않습니다.

“그들은 위를 향해 그를 부른다. 그러나 그는 (그들을) 일으켜 세우지 않는다”는 7절 하반절은 의미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여기의 ‘그’가 누구를 가리키는지 불분명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이외의 다른 누구를 생각할 이유는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분노와 실망이 그만큼 컸음을 알려줍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에게는 과거와 같은 구원의 역사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외침을 외면한 하나님은 어떤 상태였을까요? 오로지 분노만 가득 차 있었을까요? 고통당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에도 꿈쩍 않는 모진 마음이었을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이스라엘을 향해 솟구치는 불쌍한 마음을 억누를 수 없었습니다. “에브라임아 내가 너를 어떻게 내어주겠냐? 이스라엘아, 어떻게 너를 버리겠냐?” 하고 통곡하시듯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을 심판에 넘기셨지만 이스라엘을 향한 안타까운 마음을 저버릴 수 없었던 하나님입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앞장서 인도하신 것처럼 이스라엘의 적들을 향해 사자처럼 포효하시며 이스라엘을 앞장서 인도하시려고 하십니다. 이스라엘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그에게 ‘돌아오게’ 하시고 그들을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징계하시지만 징계당하는 이스라엘을 끝내 다시 품으시는 분, 이스라엘이 자기를 버렸지만 이스라엘을 마침내 자기에게 돌아오게 하시는 분, 이스라엘에게 분노하셨지만 불쌍한 마음을 끝까지 감추지 못하시는 분, 그분이 우리 하나님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하나님의 모습을 탕자의 비유로 그려내십니다. 재산상속을 요구하는 작은 아들에게 아버지는 재산을 나누어줍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떠나 멋대로의 삶을 즐기지만, 그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아들을 떠나보낸 아버지는 아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으나 떠난 아들을 마음에 품고 있습니다.

아들을 향한 불쌍한 마음은 결국 기다림으로 나타났습니다. 떨칠래야 떨칠 수 없는 이 마음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이 마음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끝까지 이어줍니다. 사람들 보기에 또 그 아들 보기에 아들 자격을 상실한 자식이라고 해도 아버지는 그 자격을 박탈한 적이 없고 아들의 돌아옴을 기뻐할 수 있습니다.

불쌍한 마음의 아버지, 우리는 아버지에게서 희망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버지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고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기다리시고 우리를 기쁨으로 안아주시는 그분 안에서 우리는 새로운 존재가 됩니다.

우리는 어둠 속 우리 역사에 다시 빛을 비춰주시고 빛 가운데 온전히 들어가도록 이끄시는 분의 뒤를 떨림으로 따르며 빛으로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삶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으로 충만합니다. 그 사랑의 힘으로 공의의 새 세상을 만들어가는 우리가 되기를 빕니다.

김상기 목사(백합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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