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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는 귀와 보는 눈, 테오 순더마이어의 선교신학선교와 미술: 테오 순더마이어를 중심으로 (5)
채수일(전 한신대 총장) | 승인 2022.12.06 15:44
▲ 선교와 미술의 상관성에 대해 학문적 성취를 이룬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테오 순더마이어 명예교수. ⓒ이정훈

테오 순더마이어(Theo Sundermeier)는 독일어권은 물론 세계선교신학계에 잘 알려진 신학자이다. 경건한 루터교 신자로서 YMCA 활동에도 적극적이었던 부친의 영향을 받은 순더마이어는 고향인 베스트팔렌의 뷘데에서 열린 큰 규모의 선교대회로부터도 깊은 인상을 받는다. 베텔과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신학 수업을 받은 후, 1962년에 목사안수를 받았다.

1964년 봄, 라인 선교회(Rheinische Missionsgesellschaft)의 파송을 받아 서남 아프리카로 향한다. 그 곳에서 구약신학과 실천신학을 가르쳤다. 1972년에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이주, 나탈/움푸물로(Umpumulo/Natal)에 있는 루터교 신학교에서 실천신학, 종교학, 선교학을 가르친다.

1975년 독일 보쿰 대학에서 종교사 신학 교수로 부름을 받고 귀국, 1983년에는 그의 은사인 겐시헨 교수의 뒤를 이어 하이델베르크 대학 교수로 부임, 지난 2000년 은퇴할 때까지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선교학, 종교학, 에큐메니칼 신학을 가르쳤다.(1)

선교와 미술의 대화

테오 순더마이어는 매우 열정적인 저술활동을 한다는 것(2)과 선교학자로서 탄탄한 성서신학적, 종교학적, 철학적 기반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근본적으로 에큐메니칼 시각을 견지한다는 점에서 특히 제3세계 혹은 비유럽 신학운동과의 대화를 위해서 주목받는 선교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선교와 미술의 대화를 위해 순더마이어가 주목을 받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가 지금 독일어권은 물론 세계 선교신학계에서 이 주제에 대하여 오래 전부터 관심을 가지고 논문을 발표한 신학자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의 개인적 선교사 체험, 다양한 에큐메니칼 만남, 작품 이해를 위한 탄탄한 해석학적 방법론을 기초로 한 작품과의 실제적인 신학적 대화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술에 대한 신학적 해석을 위한 순더마이어의 작업은 1963년에 간행된, ‘화가들이 본 그리스도’(Maler sehen Christus)라는 저서에서 처음으로 등장한다.(3) 이 책에서 순더마이어는 11세기 쾰른에서 발견된 성체화에 그려진 ‘십자가상의 그리스도’, 12세기 스페인의 벽화에 그려진 그리스도 상에서부터, 14세기 지오또(Giotto)의 ‘나자루스의 부활’, 15세기 한스 히르츠(Hans Hirtz)의 ‘벌거벗은 그리스도’, 슈미트-로트루프(Schmidt-Rottluff)의 ‘고기 잡는 베드로’(1918년 작), 파울 끌레(Paul Klee)의 ‘그리스도’(1926년 작), 루오(Georges Rouault)의 ‘그리스도의 얼굴’(1933년 작), 마르크 샤갈(Marc Chagall)의 ‘하얀 십자가’(1938년 작),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의 ‘묵화소묘’(1959년 작) 등을 중심으로 작품과 작가의 역사적 배경, 주제의 신학적 배경, 작품 자체에 대한 분석, 그리고 작품에 대한 신학적 명상의 형식으로 전개하고 있다.

작가 개인의 연작을 신학적으로 해석한 작업도 있는데, 시그후리드 앙거뮐러(Siegfried A. G. Angermueller, 1945 - )의 ‘주기도문 연작’에 대한 신학적 해석이 그것이다.(4) 빛과 색깔로만 구성된 매우 추상적인 작품을 색깔이 내포한 신학적 의미와 빛과 어둠, 원과 각의 충돌과 교차 형태의 신학적 의미를 해석함으로써 오늘 매우 부정적 이미지로 채색된 ‘아버지’로서의 하느님, 하느님의 나라, 죄, 악 등 종교적인 개념을 우리 시대를 위하여 재해석 한 것이다.(5)

▲ Siegfried A. G. Angermueller, 「무제」

순더마이어는 하이델베르크 화가 시그후리드 앙거뮐러(Siegfried Angermueller)의 한 작품을 선택하여 설교를 위한 명상대상으로 활용하기도 한다.(6) 요한계시록 5장 1절에서 13절까지의 택스트를 중심으로 대림절 설교를 준비한 순더마이어는 제목도 없고 내용에 대한 아무런 규정도 하지 않는 마름모꼴의 이 작품을 분석한다.:

“오목한 모양의 마름모꼴은 마치 우리를 포옹하려고 다가오는 것 같다. 두 가지 색이 한 쪽씩을 지배하고 있는데, 푸른색은 거리와 차거움을 나타낸다. 그러나 동시에 푸른색은 하늘과 하느님의 세계를 나타낸다. 중심을 향하여 작품은 점점 더 어두워지고, 푸른색은 깊은 검은색으로 넘어간다. 오른편은 붉은 색으로 형상화되었는데, 가로로 놓여진 줄들은 마치 창살처럼 서있다. 빛의 움직임에 따라 창살은 보이기도 하고 보이지 않기도 한다.... 붉은 색은 사랑과 불의 색이다. 붉은 색은 마치 불타고 있는 것같이 우리를 따뜻하게 한다. 그러나 불은 우리를 태울 수도 있다.”(7)

순더마이어는 먼저 이 두 가지 색을 일상의 우리의 삶을 규정하는 차거움과 따뜻함으로 해석한다. 삶의 차거움은 다른 사람이 줄 수 있지만 따뜻함도 타인으로부터 나올 수 있다. 그러나 붉은 색도 중심으로 향하여서는 점차 검은 색으로 변한다. 어둠과 우울함을 확산시키면서. 마치 검은 색은 푸른색과 붉은 색 모두를 질식시키고 봉인할 듯이 보인다.

순더마이어는 이 작품과 설교 텍스트가 공유하는 어둠과 봉인을 해석한다. 작품은 인간의 삶과 세계, 역사가 그 중심에서 분명하지 않고 어둡다는 것,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낯설고 적대적이라는 것, 닫혀져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밧모 섬에 있던 계시록의 저자가 처했던 상황과 같다. 그런데 작품 한 가운데 어둠의 한 복판을 헤치고 작은 빛이 보이기 시작한다. 아주 가늘지만 이 빛은 작품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 하얀색은 가장 능동적이고 강한 색이다.

그러나 어두운 콘택스트 안에서 비로소 하얀색은 모든 능력을 갖게 된다. 하느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하얀색은 봉인을 열고 빛나기 시작한다. 빛을 보기 위해서는 먼저 밤이 어두워져야 한다는 것이 바로 대림절의 비밀이며, 십자가와 부활직전의 밤의 비밀이다. 설교 택스트는 모욕을 당하고, 매를 맞고 고문을 당한 이의 손만이 생명과 세계를 위해 그 봉인을 열 수 있다고 증언한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기도 하지만, 순더마이어는 역사를 아래에서부터, 다시 말해 희생자의 시각에서 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한다.(8)

순더마이어의 해석학

작품 선정과 해석의 시각이 아직은 유럽적 콘택스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왜 그가 선교신학자로서 미술에 관심을 가지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순더마이어는 교회가 선포하는 말씀이 더 이상 들어지지 않을 경우, 교회는 그 기초부터 위협받게 된다고 지적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생명을 주는 성서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져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하느님의 위대한 행동을 볼 수 있는 눈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림은 우리의 신앙의 선조들이 말로 할 수 있었던 것보다 더 많이 마음으로 알고 있었던 것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선포할 수 있었던 매체이기 때문이다. 그림이 말씀보다 더 깊고 폭넓은 차원을 포괄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9)

문제는 낯선 예술작품과의 만남인데, 순더마이어는 파노프스키(E. Panofsky)의 작품서술과 해석론에 많이 의지하고 있다.(10) 파노프스키는 작품을 다양한 방법론적인 접근과 태도에 상응하는 세 차원에서 해석하는데, ‘사실적 차원’, ‘의미의 차원’, ‘본질의 차원’이 그것이다. ‘사실적 차원’에서는 작품의 형태와 형상화원리가 파악된다. ‘의미의 차원’에서는 작가의 표상세계와 유형들의 비교가 포함된다.

‘본질의 차원’에서는 작품의 의미를 직관적으로 파악하려고 해석자가 시도한다. 이런 해석과정에서 해석자는 작가가 작품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넘어선다.(11) 순더마이어는 파노프스키의 이런 해석차원이 문화적으로나 미학적으로 낯선 예술작품을 만날 때, 꼭 고려되어야 할 것으로 제시하면서, 이 세 차원의 접근방법을 미술의 신학적 해석과정에도 적용하려고 한다.

순더마이어는 ‘사실적 차원’이 종교현상학에서 ‘시기’ 혹은 ‘시대’(epoche)라고 칭해지는 태도를 요청한다고 한다. 다시 말해 모든 판단을 유보하고, 현상에 대해서만 엄격하게 집중하는 태도를 요청한다는 것이다. 이 차원에서는 그림의 색, 형식과 구성을 매우 객관적으로 파악해야 한다. 여기에서는 해석이 아니라, 분석과 서술이 요청된다. 중립적 거리두기가 필요하다.(12)

두 번째 차원인 ‘의미의 차원’에서는 작품이 생성된 종교적, 미학적, 역사적, 사회적 콘택스트를 파악한 후, 작품의 주제와 상징적 내용들을 이해한다. ‘상황화’(Kontextualisierung),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재상황화’(Re-Kontextualisierung)가 필요하다. 다시 말해 작품을 그것의 원래적인 콘택스트에로 다시 되돌리는 작업이 그것이다. 이 차원에서 필요한 것은 해석자의 예술사, 인류학, 종교사적인 지식이다. 그러나 관찰자에게 더욱 필요한 것은 ‘참여적 관찰’ 태도이다. 관찰자는 더 이상 중립적일 수 없다. 필요한 경우 관찰자는 작품의 본래적인 의미와 기능을 이해하기 위해서 해당 민족의 제의적 삶에도 참여해야 한다.(13)

끝으로 ‘본질의 차원’에서는 본래의 콘택스트 안에 있는 작품의 기능을 초월하는 의미를 해석자가 작품과 온전히 관계 맺을 때에만 이해할 수 있다. ‘동일화’(Identifikation)의 자세가 필요하다. 이 과정에서는 작품 자체가 해석자에게 말을 걸면서, 자신에게 초대하면서, 거리를 해소할 때까지 해석자는 기다릴 수 있어야 한다. 이 차원에서 진정한 이해가 성공할지 않을지가 결정된다.(14)

작품에 대한 신학적 해석의 세 차원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순더마이어는 낯선 작품과의 만남이 완성되는 것은 이해가 실천과 결합되어 자신의 삶이 변화되는 데까지 나아갈 때라고 말한다. 해석자는 더 이상 이전의 해석자가 아니다. 만남은 해석자와 해석자의 기준을 변화시켰기 때문이다.(15) 낯선 것과의 만남을 통해 자기 자신의 변화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순더마이어의 선교신학의 에큐메니칼한 성격이 드러난다.

미주

(1) Theo Sundermeier, 『선교신학의 유형과 과제』, 채수일 편역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9), 5-6 참조.

(2) 순더마이어의 활발한 저술활동과 그의 선교신학적 관심의 폭과 깊이를 측정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그의 60회 생일 기념으로 출간된 논문집 끝에 그의 제자 폴커 퀴스터(Volker Kuester)가 정리한 저술목록을 참고하기 바란다. Theo Sundermeier, Konvivenz und Differenz(Erlangen: Verlag der Ev.-Luth. Mission, 1995), 237-247. 이 목록에는 1960년부터 1994년까지 나온 책과 논문들이 실려있다. 그 후 1999년까지의 연구목록은 순더마이어의 65회 생일축하 기념문집, Dieter Becker(hrsg.,), Mit dem Fremden leben, Bd. 2, (Erlangen: Erlanger Verlag fuer Mission und Oekumene, 2000), 269-283에 실려있다.

(3) Theo Sundermeier, Maler sehen Christus(Wuppertal: Aussaat Verlag, 1963).

(4) S. A. G. Angermueller u. Theo Sundermeier, Das Vater unser in Bildern, Zeichen, Sprachen(Stuttgart: Calwer Verlag, 1993).

(5) 위의 책, 22-30 참조.

(6) Theo Sundermeier, Wenn Fremdes vertraut wird: Predigt im Gespraech mit anderen Religionen und Kulturen(Erlangen: Verlag der Ev.-Luth. Mission Erlangen, 1994), 192-203 참조.

(7) Theo Sundermeier, Wenn Fremdes vertraut wird: Predigt im Gespraech mit anderen Religionen und Kulturen(Erlangen: Verlag der Ev.-Luth. Mission Erlangen, 1994), 195.

(8) Theo Sundermeier, Wenn Fremdes vertraut wird, 200.

(9) Theo Sundermeier, Maler sehen Christus, 7.

(10) Theo Sundermeier, Bild und Wort: Hermeneutische Probleme der christlichen Kunst in der Dritten Welt, in: Ders. und Volker Kuester(hrsg.,), Die Bilder und das Wort: Zum Verstehen christlicher Kunst in Afrika und Asien(Goettingen: Vandenhoeck & Ruprecht, 1999), 19-23 참조.

(11) Theo Sundermeier, Den Fremden sehen: Kunstgeschichtliche Perspektiven, in: Ders., Den Fremden verstehen: Eine praktische Hermeneutik, (Goettingen: Vandenhoeck und Ruprecht, 1996), 45. 참조.

(12) Theo Sundermeier, Den Fremden sehen: Kunstgeschichtliche Perspektiven, in: Ders., 위의 책, 46.

(13) Theo Sundermeier, Den Fremden sehen: Kunstgeschichtliche Perspektiven, in: Ders., 위의 책, 47.

(14) Theo Sundermeier, Den Fremden sehen: Kunstgeschichtliche Perspektiven, in: Ders., 위의 책, 47.

(15) Theo Sundermeier, Den Fremden sehen: Kunstgeschichtliche Perspektiven, in: Ders., 위의 책, 48.

채수일(전 한신대 총장)  sooilcha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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