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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의 전복(顚覆), 태양신이 태어난 것이 아니다황량한 곳에서 들려오는 아우성을 외면하지 않는 성탄절이기를
홍인식 대표(에큐메니안) | 승인 2022.12.24 15:27
▲ 「Sol Invictus in the Planetarium mosaic」 ⓒGoogle Arts & Culture

오늘 우리가 지키고 있는 성탄절 날짜는 예수님의 정확한 생일일까? 사실 12월 25일은 원래 인도와 지금의 이란인 페르시아인들의 태양신인 미트라(Mitra)의 축제일이었으며 또 다른 한편 ‘솔 인빅투스(Sol Invictus, 무패-무적의 태양)’의 축일로서, 로마 율리우스력으로 동지이며 따라서 죽었던 태양이 소생하는 날이었다, 이것이 서기 4세기를 기점으로 서유럽 지방에서 예수의 생일로 인식되기 시작해서 오늘날 크리스마스로 굳어져 버렸다는 주장이 흔히 알려져 있다.

물론 다른 주장들도 분명히 존재한다. 이런 배경 속에서 어떤 이들은 기독교가 태양신 종교와 혼합되어 버렸다는 비판을 하기도 한다. 과연 기독교는 이들이 주장하는 대로 로마의 태양신 종교에 혼합되어 버린 것일까? 형식적으로만 보면 그런 반응이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좀 더 성탄절 날짜가 결정된 그 내용과 의미에 대하여 새로운 접근(사실 그리 새롭지는 않습니다마는)으로 해석해 보면 어떨까? 예수는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말구유에서 비참하고 초라한 모습으로 태어났다. 그의 탄생은 누가 그의 생일을 기억하고 기록을 남길 만큼 화려하지 않았다. 그러기에 초대 교회는 예수의 탄생 시기에 대한 아무런 역사적 기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당연히 날짜를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그러나 로마제국과 교회 권력은 12월 25일을 예수 탄생의 날로 정했다. 어떤 이유에서였을까? 이유는 분명하다. 자신들의 권력 강화와 현상 유지를 위한 목적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12월 25일을 예수 탄생의 날로 규정했던 당시 로마 황제들과 교회 권력층들의 목적과는 별개로 민중들은 태양신의 축일이 기독교 축일로 변경되는 것을 보면서 다른 감정으로 해석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로마제국과 교회 권력이 바라는 것과는 정반대의 이해였을 것이다.

민중들은 예수 탄생일을 미트라 혹은 무적-무패의 태양신의 생일과 일치시키는 현상을 보면서 오히려 예수가 태양신 종교를 향하여 도전장을 내민 것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이러한 상상은 미트라와 태양신의 모습과 예수의 모습을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다.

가난하고 초라하게 태어난 예수 탄생의 모습이 백마가 끄는 전차에 올라타 빛나는 은(銀) 창을 들고 각종 무기가 둘려있는 금 갑옷의 미트라와 태양신을 전복시키고 있는 형국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칼과 총 화려함에 눌려 있던 민중들은 로마제국의 군인들이 신봉하는 태양신 숭배의 날을, 말구유에서 태어난 하나님의 아들 인간 예수의 탄생을 기념하는 날로 바꾸고자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칼과 창으로 세계를 정복하고자 하는 태양신 종교를 향하여 사랑과 섬김으로 세상을 하나 되게 만드는 예수 사랑의 승리 선포를 보지 않았을까? 화려함과 힘의 정복이 아니라 사랑의 약함으로 세상을 구원하는 예수를 보지 않았을까?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가치관의 전복(顚覆)을 의미했다. 예수의 탄생은 총과 칼의 강압적이고 폭압적인 폭력의 힘을 사랑과 섬김 그리고 서로 돌봄의 힘으로 뒤집어 놓는다. 그것이 이사야 예언자가 말했던 칼이 보습으로 창이 낫으로 바뀌는 사건이다. 그것이 예수 탄생일의 의미가 아니겠는가.

이런 측면에서 오늘 우리에게 예수 탄생은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있는가? 그런데 혹시 태양신을 향하여 승리를 선포하였던 성탄절의 의미가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 또 다시 향락과 화려함을 추구하는 태양신 종교에 의해 점령을 당한 것은 아닌지 살펴보아야 한다. 성탄절의 의미가 사랑과 섬김을 위해 초라한 말구유에 탄생하신 예수님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것으로 변하고 또 기독교도 태양신 미트라처럼 백마에 은(銀) 창을 들고 강력한 힘으로 세상을 정복해 보겠다는 욕심을 내보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살펴보아야 한다.

예수의 탄생은 황폐한 곳에 사는 사람들로 기쁨의 함성을 외치도록 한다.(사 52:9) 예수의 탄생은 하나님이 황폐한 곳의 사람들을 위로하시고 또 그들을 구원하셨다는 의미이다.

나는 출근하기 위하여 매일 전철을 이용한다. 매일 아침 삼각지에서 6호선으로 갈아탄다. 어느 날 삼각지역에서 내렸을 때 마침 장애인 지하철 타기 선전전을 접하게 되었다. 장애인을 위한 예산 마련을 촉구하면서 오래전부터 해 오던 시위이다. 장애인들이 휠체어에 타고 지하철을 타려고 하지만 그들은 시이를 막는 경찰들에 휩싸여서 어쩔 줄을 몰라한다.

거동이 불편한 이들이 외치는 소리는 정말 가슴 아픈 소리이다. 이들의 삶의 자리는 정말 황폐한 자리이다. 비장애인으로 살아가는 우리가 알 수 없는 황폐함이 그들의 삶의 현장이다. 이런 황폐한 곳에 거하는 사람들의 외침을 기쁨의 환성으로 만들기 위해 예수는 오늘도 이 땅으로 오신다, 황폐한 곳을 향하여 오신다. 황폐한 곳의 사람들 외침 안에 예수는 거한다. 오늘 우리 귀에 항페한 곳의 사람들의 외침이 들려오는가?

“함박눈이 펄펄 내리는 날 그는 떠났다. 19991년 12월27일 입국해서 만31년, 온갖 궂은일 감당하며 보냈던 미등록 이주노동을 마치고 그는 떠났다. 이제 더이상은 이주노동의 무게를 감당 할수 없게 망가져 버린 무릎을 절룩이며 낡은 가방 두 개와 지난 시간 그와 함께했던 고양이를 들고 그는 떠났다. 그의 낡은 두 개의 가방 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을까? 그의 가슴속에는 또 무엇이 들어 있을까? 누군가 서러운 게 인생이라 했던가?”

31년 동안 한국에서 미등록 노동자로 31년을 살고 몸이 망가질대로 망가져서 이제 더이상 노동을 할 수 없게 된 필리핀 노동자를 배웅했던 목사님이 남긴 글이다. 필리핀 노동자는 황폐한 곳에서 31년을 살았다. 그의 황폐한 삶의 자리에서 외치는 음성을 우리는 듣고 있는가?

황폐한 자리에서 외치는 이주 노동자들, 난민들 그리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황폐한 삶의 소리를 기쁨의 환성으로 바꾸기 위해 오늘도 예수님은 황폐한 삶의 자리로 오신다. 세월호와 10.29참사 유가족들의 삶의 자리는 황폐한 자리이다. 오늘도 예수님은 그 황폐한 삶의 자리로 오신다. 그리고 이들의 외침 안에 함께 하신다. Sol Invictus 무패-무적의 태양의 모습이 아니라 작고 낮은 모습으로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

예수의 탄생은 하나님이 멀리 계신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과 우리 안에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요 1:14) ‘3개 종교노동연대’(NCCK정의평화위원회, 대한불교조계종 사회노동위원회, 천주교 서울대교구 노동사목위원회)가 공동으로 20일(화) 오후 6시30분 국회 앞 농성장에서 기도회를 주최하고 “노조법 2조, 3조 개정을 촉구”하고 나섰다. 국회 앞에 마련된 농성장은 공전만 계속하는 국회 상황을 주시하며 노동자들이 노조법 2, 3조 개정을 촉구하며 단식에 들어간 곳이다. 농성장에서의 단식은 20일이 지나고 있었다. 나는 분명히 보았다. 예수가 오늘 그 농성장으로 오시는 모습을 보았다. 성탄절은 진정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보여 준 사건이다.

2022년 NCCK 인권상 수상자 김혜진 집행위원장을 만났다. 그녀에게 물었다. “교회가 연대한다고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기도회만 하고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행동과 도움을 드리는 것 같지 않아서 무기력함을 느끼기도 합니다. 여러분에게 교회의 연대가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자괴감이 들 때도 있습니다.”

김혜진 집행위원장이 답변한다.

“아닙니다. 기독교회의 연대는 그 어떤 단체의 연대보다 우리에게 힘을 줍니다. 진정 교회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무조건 함께 연대하는 곳으로 받아들이고 있기에 우리에게는 무한한 용기와 격려가 되고 있습니다. 교회의 연대를 통하여 거기에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믿음을 갖게 되고 용기를 얻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어디에서 태어나실까? 그는 오늘도 우리와 함께하시기 위하여 고난의 삶의 현장으로 오신다. 그는 우리 가운데 사신다. 평화 운동가 송강호 박사의 출판기념식에 참가한 평화운동을 지원하는 한 여성의 증언을 들었다. 그 여성은 무종교인이다. 그분이 이렇게 말한다.

“나에게는 송강호와 그의 부인 조정래가 하나님입니다.”

오늘 예수 안에 오시는 하나님은 어디서 볼 수 있을까?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세상을 향하여 하나님을 보여 줄 수 있을까? 하나님은 예수로 탄생하시면서 우리와 함께 사심을 보여 주었다. 우리도 오늘 우리 사회에서 가장 어렵고 살아가고 있는 이들과 함께 살아가는 모습을 보일 때 그분들이 우리 교회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사신다.”라고 고백하게 될 것이다. 그러할 때 진정한 성탄절의 의미는 회복될 것이고 태양신을 향하여 도전장을 내밀었던 초기 성탄절 규정의 민중-역사적 의미가 회복될 것이다.

홍인식 대표(에큐메니안)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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