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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성서해석은 서구의 성서읽기를 극복할 수 있을까?[서평] 『선맥과 풍류해석학으로 본 한국 종교와 한국교회』
한수현 박사(신약학자) | 승인 2022.12.31 17:00
▲ 한수현 박사

기이한 인연으로 쓰는 서평

평자가 전도사로 사역하던 한 교회에서 있었던 일이다. 새벽기도회를 마치고 뒷정리를 하던 중, 한 소책자가 눈에 띄었다. 기도회에 나온 신도가 놓고 나간 책자처럼 보였다. 무심히 첫 장을 읽기 시작했는데, 그 자리에서 단숨에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출판사의 이름도 표기 되지 않은 복사기로 만들어 이리 저리 기워 붙인 책자였다. 게다가 군데 군데 맞춤법이나 비문들이 있어서 제대로 된 글쓰기 교육을 받지 못한 이의 글로 느껴졌다.

그러나 그 내용은 이제 막 신약성서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한 평자가 보기에는 놀라운 것들이었다. 상식적인 내용으로 시작하여 성서의 이러 저러한 본문들을 논하면서 믿음과 구원에 관한 논증들을 시도하는 내용들이 평자가 평소 고민하던 질문이나 성서의 난제들을 돌파해나가는 부분들이 있었던 것이다. 불행히도 그 책자에는 현대의 연구서들이 갖추어야 할 각주나 참고도서 목록이 일절 없었다.

그래서 필자는 그 내용을 토대로 추적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책자를 발간한 곳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지만 그 곳은 보통의 교회에서는 이단이라 불리는 교단이었고, 그 교단의 설교 내용들을 들어 보았지만 책자의 내용을 깨달은 사람이라면 응당 펼쳐 내야 할 깊은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평소 알고 지내던 성서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재야의 고수들에게 물어 보면서 이전에는 모르던 중요한 몇 가지를 알게 되었다.

한국의 성서해석의 전통에 대한 것이었다.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온 이래로 서구에서 성서학을 배워 신학교를 열어 서구의 성서 읽기를 가르쳐 온 서구 전통이 있었고, 소위 민중신학이란 관점을 바탕으로 성서 읽기를 강조한 한국 신학대학교의 흐름이 있었으며, 토착화 신학이란 이름으로 감리교 신학대학의 학자들이 시도한 흐름이 유명한데, 위의 세 가지의 흐름과는 다른 성서를 해석이 필요한 하나의 경전으로 받아들여 나름의 독특한 사유 체계를 통하여 독자적인 성서 읽기를 시도한 전통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성서 읽기의 결과들은 서구의 분과 학문식의 논의에는 들어오지 못하고 성도들을 위한 성경 공부나 새로운 교회 운동을 위한 마중물로 사용되면서 그 명맥을 유지해왔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평자는 미국에서 성서학을 공부했지만 독자적인 관심을 가지고 여기 저기 분포되어 있는 성서에 대한 논의들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러한 공부는 평자를 쉽게 만족시켜 주지 못했다. 왜냐하면 각각의 논의들이 하나의 통합적인 전체를 형성하지 못하고 몇 가지의 중요한 번뜩임들이 파편적으로 분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한 사람이나 한 학파의 지난한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여기 저기 얻은 열매들을 이어 붙인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감리교신학대학교의 도서관의 서고에서 『성서의 원리』(상, 중, 하)라는 책을 발견했다. 들어본 적도 없었던 변찬린이란 사람이 쓴 책이었고, 평소 믿고 보던 한국신학연구소에서 출판되어서 펴들었는데, 이전에 보았던 번뜩임들이 대부분 책에 쓰여 있음을 알고 놀라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감신대에서 수행했던 특강에서 오늘 서평을 쓰게 된 책의 저자인 이호재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고, 이후 그분의 관심이 변찬린 선생에게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참으로 기이한 인연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그 인연으로 이 서평을 쓰게 되었다.

서구 신학의 틀을 벗어나 우리의 눈으로 성서를 읽자

나는 비대해진 거구를 자랑하는 현대의 신학(Theology)이라는 학문의 가장 큰 문제가 성서 읽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신학이라는 거대한 줄기는 역사, 윤리, 예배, 상담, 교육등의 분과 학문들은 나누어져 있는데, 이 모든 것들은 필연적으로 성서라는 책의 해석학적 체계와 내용들에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고 본다.

그러나 이천년이란 성서 해석의 역사는 19세기에 미국과 유럽에 등장한 모더니티(Modernity)라는 세계관, 즉 근대 철학적 인식론과 자본주의에 기반한 근대 국가론 속에 함몰되어 있다. 쉽게 말하면 성서를 읽는 눈 자체가 불과 삼백년 정도 유지해온 미국과 유럽의 가치관과 세계관 속에 갇혀 있다는 것이다. 근대의 분과 학문의 출현으로 나타난 각종 역사비평과 고등비평의 해석들과 이에 반대하여 문자적 성서 해석을 고집하는 보수주의 성서 해석들은 결국 두 개의 서로 다른 진보와 보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환상을 낳았다. 그로 인해 서구의 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마친 사람들이 한국인의 성서 이해에 대한 권위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급변하는 현시대에서 서구 성서 읽기의 여러 결과들은 더 이상 한국 사회 과학이나 문화 담론과 호응하지 않을 뿐 아니라, 사람들의 실생활과도 이어지지 않는다. 현실 사회과학 이론을 고민하는 신학자들은 이제 성서의 글들은 더 이상 즐겨 사용되지 않는다. 결국 서구의 그들을 번역하는 것에 그친 신학 교육은 현재 한국사회에서 한국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바를 비춰주지 못하고 힘겹게 스스로의 권위를 지키는 것에만 급급한 상황이다.

평자는 현재의 서구적 성서 읽기가 틀렸음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성서가 만약 성경이라면, 즉 신의 말씀이라면 누구나 그것을 읽고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가능성을 신이 열어 주었을 것이란 뜻이다. 처음 성서는 유대인의 책이었으며, 이후 로마인들의 책이 되었고, 그 이후 중세인들의 책이 되었고, 그리고 미국인과 영국인의 책이 되었지만, 한번도 한국인의 책이 된 적은 없었다. 우리의 책으로 읽으려고 한 시도들은 교단과 신학교의 장안에서 이단시 되거나 추방당했고, 몇몇 뜻있는 사람들에 의해서만 유지되었으며, 하나의 학문적 시도로 연구되기 위해서는 서구 신학의 세례를 받은 이들의 검열을 통과해야만 했다.

미국의 저명한 신약학자인 리처드 B. 헤이즈는 그의 저서인 『바울 서신에 나타난 구약의 반향』에서 한 신학생의 질문에 충격 받은 일화를 기록했다. 질문은 간단했다. 바울은 구약의 기록이 메시아 예수에 대한 예언이라 믿었는데, 왜 성서신학은 그것을 다루지 않느냐는 질문이었다. 근대의 이성주의를 바탕으로 한 서구 신학은 구약 이사야의 예언을 당시 다윗 왕가에 새로 태어날 성군에 대한 희망 정도로 읽는다.

그렇다면 바울의 믿음은 헛된 것인가? 다룰 필요가 없는 것인가? 서구의 성서학은 여기에서 한 발짝도 나갈 수 없다. 이는 서구 신학이 틀렸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성서학을 위해 선택한 과학적 이성 또는 오성이 구약과 신약을 통합하여 읽는 것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이는 성서를 이해하기 위해 서구라는 체계를 무조건 보편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의 종교전통인 선맥(僊脈)의 풍류성으로 성서를 읽은 변찬린

본서의 저자인 이호재는 변찬린이 이러한 역사적이고 사상적인 문제를 자신의 성서읽기로 합류시킨 사람이라 말한다. 변찬린은 단순히 계시적 기반에 입각해서 임의적으로 성서를 해석한 사람이 아니다. 서구 신학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느껴지는 시대에 그것을 벗어남으로 더욱 풍부한 성서 읽기의 기저들을 찾을 수 있었던 사람이 변찬린이다. 서구의 체계를 벗어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이나 삶의 경험에서 성서를 읽는, 즉 좁은 인간의 경험 안으로 성서를 우겨넣는 실수를 범했으나 변찬린은 그들과는 달랐던 것이다.

변찬린은 자신의 성서 읽기를 시작을 소위, 선맥의 풍류성에 둔다. 마치 데카르트가 인간의 사유 자체에 존재의 확실성을 두었듯이 변찬린은 최치원의 난랑비서(鸞郎碑序)에 등장하는 풍류라는 두 글자에 성서와 인간이 만나는 합류의 출발점을 둔 것이다. 서구 신학의 세례를 받은 현재의 성서 이해는 인간 이성의 보편성에 기대어 고대의 기록인 성서에 접근하려고 한 시도에서 시작되었다. 이성과 과학, 그리고 서구의 도덕의식을 통하여 재구성한 성서 이해는 중세의 교권과 교리적 성서이해와 화해와 충돌을 반복하며 인간의 구원과 부활이라는 원래의 목표를 도덕적이고 종교적 인간되기로 대치했다.

보통 풍류는 이두식의 한자어로서 원래는 불[부루(夫婁)]에서 나온 말인데, 부루는 단군의 아들의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그 의미를 흔히 광명, 태양과 관련지어왔다. 그렇다면 변찬린이 말하는 풍류란 무엇일까? 최치원은 풍류의 속성을 접화군생(接化群生)으로 표현하는데, 이는 만물이 서로 만나 조화를 이룬다는 뜻으로 이러한 풍류의 길(풍류도)의 전통 아래에서 우리 나라에는 유교, 불교, 도교등을 하나로 묶어 조화되게 하고 그 안에서 생명을 창조하는 길, 또는 종교적 전통이 있음을 말한 것이다.

이 풍류를 변찬린은 우리의 고유한 선맥이란 원류로 이해했다고 이호재는 말한다. 여기서 신선이란 말이 나오는데, 지금은 소설이나 무협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신선(神仙)이란 말이 바로 한국에서 발생한 풍류도와 연결된다는 것이다. 바로 이 풍류도, 즉 신선사상, 다른 말로는 빛의 가르침이 한국의 고유한 종교적 전통이며 결국 이 전통 아래에서 유교, 불교등과 같은 외래의 종교들은 인간이 신의 세계에 접하는 가르침들로 한국인들에게 받아들여져 왔다는 것이다.

변찬린은 이러한 종교성이 성서를 이해하는 해석의 본류가 되어야 함을 역설했다. 여기에 저자가 덧붙이는 신선 사상이 태동된 도교의 중심지는 지금의 중국 땅이 아니라 고구려임을 말하는 최근의 자료들을 보면, 죽음의 길을 넘어 영생의 세계를 경험하는 종교적인 빛의 길에 대한 전통이 바로 한국 종교의 전통임을 알 수 있다.(이호재, 42)

서구 근대적 세계관을 탈피하여 한국의 풍류(도)에서 찾은 성서 해석의 길

20세기 한 무리의 신약성서 복음서 연구가들은 복음서의 저자들이 당시 영웅신화의 구조를 이용해 예수를 헬레니즘적 영웅으로 묘사하려 했다고 주장했다. 최근의 미국을 중심으로 나타난 역사적 예수연구의 결과들을 살펴보면, 예수를 당시 견유학파의 영향을 받은 철학자, 귀신을 쫓아내는 고대의 귀신 축출자, 유대 종교를 개혁하려 했던 종교 개혁가, 또는 하층민들의 염원을 등에 입은 사회 개혁가로 그리고 있다.

왜 그럴까? 그들의 복음서 해석의 전통이 바로 근대적 인간관에 기대고 있기 때문이다. 근대라는 눈으로 보기에 복음서의 예수는 혁명가이거나, 개혁가로 보이기 때문이다. 변찬린은 예수를 바로 죽음을 넘어 부활의 첫 열매가 된, 신선의 길을 연 신의 아들로 본다. 과연 무엇이 신의 말씀이라 고백하는 성서 이해에 더 가까울까?

여기서 변찬린의 중요한 개념인 선맥(僊/仙脈)을 살펴보아야 한다.

선(僊)이란 무엇이고 선(仙)이란 무엇인가? 변찬린은 선과 선을 엄격하게 구별하여 사용하고 있다. 선(僊)이 앞선 글자이고, 선(선)은 후대에 형성된다. 변찬린의 언어 맥락에 의하면 선(僊)은 현존하는 인간이 죽지 않고 우화등선하는 변화의 신체 변형을 지칭하는 종교적 언어이고, 선(仙)은 선(僊)의 길을 망각한 후 인간이 한 번 죽음을 경함한 후 살아나는 시해선(屍解仙)적 신체 변형을 지칭하는 종교적 언어이다.(이호재, 33-34)

구약성서를 보면 에녹을 비롯하며, 멜기세덱이나 엘리야와 같이 죽음을 경험하지 않는 영원한 인간에 대한 기록을 찾을 수 있다. 변찬린은 바로 이러한 사람들이 선(僊)의 삶을 산 사람들이라 말한다. 그러나 인간은 선악과를 먹고 영원의 길을 잊고 말았다. 그래서 죽음을 넘어 부활하는 새로운 길, 즉 선(仙)의 길을 열기 위해 예수께서 성육신하신 것이다. 선맥과 풍류를 기반으로 성서 전체를 조화롭게 읽고 그 안에 여러 개념들을 맺어 쓴 책이 바로 변찬린의 성서의 원리이다.

저자는 변찬린의 성서 해석을 일곱 가지의 해석 체계로 설명한다. 도맥 해석, 언어상징재현 해석, 풍류 해석, 화쟁 해석, 유기체 해석, 실존적 암호 해석, 관조 해석 등으로 구성된다.(이호재, 176) 일곱 가지의 체계가 지향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성서에는 해석의 길이 있으며 그 길은 인간의 삶에 대한 구원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 이 길을 온전히 찾기 위해서는 풍류도를 통한 신선의 사상과 부활 신앙이 '이해 지평'의 융합을 이루어 동서양을 잇는 화해와 회통의 관점으로 성서를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변찬린의 해석 체계는 한국의 고유한 종교 전통의 맥락에 분명 구원의 길을 열기 위한, 즉 성서 해석을 위한 씨앗들이 심겨졌을 것이란 믿음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마치 유대교의 위대한 사상가인 필론이 플라톤의 철학을 바탕으로 구약성서를 이해한 것과 같이, 또는 서구 신학의 체계를 만든 어거스틴이 당시의 철학적 도구들로 성서의 세계를 구축한 것과 같이, 중세의 스콜라 신학자들이 인간의 이성을 바탕으로 중세교회라는 거대한 체계를 세운 것과 같이, 근대 시대에 독일의 관념론과 이성에 대한 철학적 이해를 바탕으로 근대 성서학의 체계를 세운 것과 같이 말이다.

변찬린은 사라지지 않고 면면히 흘러운 한국의 종교 전통인 풍류도를 바탕으로 성서 해석의 길을 찾았던 것이다. 풍류도는 이후 한국에 들어온 여러 외래 종교와 조화를 이루어 끊임없이 인간 구원의 길을 확장해 갔으며, 성서 또한 서구의 해석이 아닌 풍류도를 기반으로 한 선맥 신학의 관점에서 읽을 때, 비로소 숨겨왔던 신의 길을 배태한다는 것이다.

서구적 성서읽기를 뛰어넘는 풍류도맥론으로 읽는 성서는 구원의 텍스트가 될 수 있는가?

저자는 변찬린의 성서 해석의 근거와 틀, 그리고 이해를 소개하면서 변찬린의 성서 해석이야말로 한국 교회 역사에서 재발견 되어야 할 진정한 토착화 신학이자 한국인의 신학이라고 평가한다. 평가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저자는 한국 토착화 신학의 뿌리 깊은 문제를 지적한다. 바로 한국인의 종교 전통을 무교적 또는 샤머니즘적 종교에서 찾으려 하는 것이다.(이호재, 165) 무교의 기반은 신들림의 체험이며 자칫 기복적이고 세속적인 가치에 매몰될 우려가 있다. 게다가 무교에는 참된 인간, 영원한 신적 인간에 대한 추구가 부족하다. 게다가 현대의 우리는 세속적이고 기복적인 신앙이 교회를 더욱 세속적인 장소로 만들고 있는 것을 보고 있다.

과연 무교적 전통을 한국인의 고유한 신앙으로 인정할 수 있을까? 저자는 한국인의 종교적 심성을 무교가 아닌 풍류성에 두고 인간 존재의 새로운 변화에 역점을 둔 풍류적 세계관으로 바탕으로 능동적이고 실천적인 신앙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이호재, 348) 바로 이러한 담대한 계획이 변찬린의 ‘풍류 도맥론’을 통한 성서 읽기에 나타난다는 것이다. 플라톤과 헬레니즘을 바탕으로 해석된 성서가 아니라 한국의 종교적 심성으로 시도된 변찬린의 성서 읽기는 분명 작금의 서구적 성서 읽기가 가지고 있는 한계를 넘어 새로운 인간 존재의 지평을 여는 힘이 있다고 할 것이다.(이호재, 376)

저자는 변찬린의 성서 읽기의 해석체계와 목표를 종교 학자의 눈으로 재해석하여 급변하는 세계사 속에서 새로운 문명을 열 수 있는 열린 가르침으로 소개하고 있다. 후기 자본주의와 인공지능의 효율성이 열어가는 새로운 세계는 아마도 유토피아가 아니라 디스토피아가 될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다. 몇 사람의 천재나 강력한 국가가 여는 미래를 바라만 볼 것인가?

이천 년전 로마 제국의 발달된 경제와 효율성과 여러 종교적, 민족적 담론들이 갈등을 일으키고 있었던 팔레스타인 지역에 예수라는 주변인은 새로운 인간, 부활한 신의 자녀들이란 깨달음을 선포하며 새로운 시대를 열고자 하였다. 그의 기록이 담겨진 성서 텍스트는 다시금 한국 종교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풍류와 선맥 담론과 어울려 새로운 시대 문화를 이어갈 구원의 텍스트가 될 수 있을까? 여러 독자들과 학자들의 관심과 연구가 필요하다 여겨진다.

보론: 서구의 성서학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본서를 읽으면서 미국에서 신약성서학을 공부한 필자는 유학 생활 중 새로 발견한 서구의 성서학의 변화가 많은 부분 변찬린의 성서해석이 말하는 내용과 호응을 이루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몇 가지만 말해본다면 다음과 같다.

1. 바울신학자 E. P. 샌더스는 그의 저서 『바울과 팔레스타인 유대교』에서 바울 신학의 중심이 믿음을 통한 구원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으로부터 나타난 새로운 사상이라고 말했다. 과거 서구 개신교 신약 성서 이해를 지배했던 율법을 행하지 못하는 죄책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믿음으로 해방된다는 시각이 근본적으로 잘못 되었음을 지적하면서 샌더스는 서구의 성서이해가 1세기 유대교만이 아니라 그리스도교의 구원론을 오해하고 있다고 역설한다.

샌더스는 바울이 부활 사건을 통해서 구약성서를 새롭게 재해석한 것이 바울 서신에 내용이라 말한다. 즉, 부활이란 인간 변화의 사건을 중심으로 성서가 재관통된 사건이 기독교의 시작이라 본 것이다. 샌더스는 이를 뒷바침하기 위해 ‘종교의 패턴’(the pattern of religion)이란 개념을 사용했는데, 그에 의하면 바울 이전의 유대교의 구원관과 바울 이후는 극명하게 다른데, 그것은 바울의 신학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인 ‘부활’의 개념이 그 이전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필자가 보기에 이러한 샌더스는 신약학자의 입장에서 바울의 구원론만을 다루었지만 변찬린은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성서 전체의 해석은 부활을 풍류도와 연결시켜 시도했다고 볼 수 있다.

2. 위의 서평에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변찬린의 구약에 대한 해석 중에 성서에 나타나는 야훼라는 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신과 다르다는 내용이 있다.(이호재, 335) 비슷한 생각을 개진한 사람들은 기독교 역사 속에 있었다. 예를 들면 마르시온은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은 다르다고 말하며 구약성서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와 달리 변찬린은 구약 성서속에 야훼라는 신을 천사의 자리로 격하하고 질투와 전쟁의 신 야훼는 보편적 구원의 아버지 하나님과는 다른 존재임을 주장하고 있다. 또한 이 주장은 그의 선맥 신학적 해석에 중요한 축이다. 서구 구약성서 연구에서 이스라엘의 신, 또는 신들에 대한 연구는 1990년대 이후로 활발히 이루어져 왔다. 학자들은 고대 이스라엘이 야훼, 아세라, 바알, 엘이라 불리는 신들을 믿었을 것이라 보고 있다.

하나의 신, 즉 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아마 바벨론 포로기 전후에 확립되었을 것이라 보는 학자들도 많다. 전쟁의 신 야훼, 또는 풍요의 신 바알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하나님, 그리고 모세에게 소명을 준 신으로 그 신앙의 중심이 모아지는 과정들이 구약성서에 나타나 있다고 학자들은 보고 있다. 그 궤를 달리하긴 하지만 변찬린이 야훼 이해는 이러한 학문적 과정들을 미리 내다 본 해석이라 여겨진다.

3. 이른바 유대교의 ‘미드라쉬’는 유대인들이 성서를 통전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사용한 방법인데, 이는 변찬린이 말하는 ‘도맥 해석’과 매우 유사하다. 미드라쉬란 유대인들이 거룩한 말씀을 해석하는 방법이며 또한 신약 성서의 많은 부분이 기록된 방법이다. 미드라쉬란 성경 속 어떤 구절의 의미를 결정 짓기 위해서, 다른 구절들, 다른 단락들의 맥락과 연결지어 확장시키는 방법이다. 이 방법을 통해 복음서의 저자들과 바울은 예수를 구약에서 찾았으며, 수많은 여러 구약 성서의 미드라쉬를 통해 이해한 것이다.

이는 해석자의 자의로 몇 개의 구절을 연결시키는 근대 성서학이 배격하는 알레고리적 해석과는 다르다. 성서 저자들의 해석 세계가 이러한 미드라쉬를 바탕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변찬린은 도맥 해석의 방법으로 근대의 한계를 극복하고 성서의 원리에 가까이 갈 수 있었을 것이다.

4. 다니엘 보야린은 저명한 유대학자로서 예일과 하바드 대학에서 가르쳐왔고, 현재 캘리포니아 버클리 대학에서 고대근동/수사학 분과 교수로 있다. 그는 기독교 신학자들이 간과해온 성서의 여러 역사와 고대의 해석들을 소개해 왔다. 보통 서구의 성서해석은 하나님과 그 아들, 즉 신의 특별한 아들에 대한 개념이 초대 기독교에서 나타난, 즉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믿음으로 부터 생겨난 것이라 보아왔다.

이러한 신약의 예수 사건을 통해 구약을 소급적(retrospective)으로 해석해 온 것이 서구 신학이었다. 쉽게 말하면, 구약성서는 하나님의 아들이나 부활이나 거듭남 등의 개념이 없다고 말해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보야린은 이미 번역된 그의 저서 『유대 배경으로 읽는 복음서』에서 이미 구약성서에 여러 신인 사상, 즉 변찬린의 표현으로 보면 신선 사상이 나타나 있다고 말한다.

멜기세덱이나 에녹, 엘리야, 그리고 다니엘서의 ‘인자와 같은 이’와 같은 기록을 증거로 제시한다. 그리고 아마 예수 또는 예수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그런 기록을 바탕으로 이미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란 확신을 가졌을 것이라 말한다. 이는 서구의 기독교가 예수 사건의 특별함만을 강조한 나머지 성서 전체의 영원을 사는 인간에 대한, 즉 변찬린의 표현으로는 선맥 사상을 간과했음을 지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평자 한수현은 감리교신학대학교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시카고 Chicago Theological Seminary에서 신약학으로 박사학위를 마쳤다. 이후 감신대, 한신대, 기독연구원 느헤미야 등에서 강의하고 있으며 현재 청수감리교회에서 목회 사역중이다.

한수현 박사(신약학자)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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