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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향“하나님은 이처럼, 사람이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시니”(전도서 5:15-20)
이상중 목사(초도제일교회) | 승인 2023.01.15 22:41
▲ Jan Saenredam, 「Plato’s allegory of the cave」 (1604) ⓒWikipedia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나요? 원치 않고 마주하고 싶지 않은 상황을 마주하게 되더라도, 괜찮습니다. 두려움과 불안이라는 감정에 휩쓸리고 있을지라도, 괜찮습니다.

괜찮을 수 있는 이유는, 우리 안에 상황과 감정 등에 떠밀려 가지 않도록 중심을 잡아 주는 평안이라는 닻이 있기 때문입니다. 상황과 감정에 휩쓸려 그대로 떠밀려 갈 것처럼 느끼지만 그렇지 않을 수 있습니다.

진심으로 하나님 안에서 평안 누리기를 원한다면, 바로 그 순간 평안은 주어집니다. 성난 파도가 잦아들고, 삶의 배는 언제 그랬냐는 듯 제자리를 찾게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선물인 평안을 선택하고 누리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새벽기도 시간에 전도서 말씀을 통해 성도님들과 은혜를 나누고 있습니다. 2022년 끝과 2023년 시작점에 개인적으로 성도님들과 함께 전도서로 말씀을 나눈다는 게 얼마나 큰 은혜인지를 매일 느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전도서의 말씀이 삶을 바라보는 시각과 삶을 대하는 태도를 바꿔주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목적이 무엇이어야 하는지, 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 어떤 태도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하고, 삶을 점검하게 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새벽기도 시간에 말씀을 묵상하면서 전도서의 말씀에 뭔가 전도서와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행복’이라는 단어가 나와서, 성도님들과 함께 전도자가 자주 표현하는 ‘하늘 아래에’ 살면서 행복한 삶이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말씀을 통해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방금도 말씀드렸지만, 전도서의 말씀은 행복과는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왜냐하면, 전도자가 가장 많이 쓰는 표현이 ‘헛되다.’이기 때문입니다. 전도서 말씀 중 많은 구절에서 반복적으로 ‘헛되다.’라는 표현을 찾을 수 있습니다.

“전도자가 말한다. 헛되고 헛되다. 헛되고 헛되다. 모든 것이 헛되다. 사람이 세상에서 아무리 수고한들, 무슨 보람이 있는가?”(1:2-3), “세상에서 벌어지는 온갖 일을 보니 그 모두가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다.”(1:14)

“나는 혼자서 이런 생각도 해 보았다. "내가 시험 삼아 너를 즐겁게 할 것이니, 너는 네 마음껏 즐겨라." 그러나 이것도 헛된 일이다. 알고 보니 웃는 것은 '미친 것'이고, 즐거움은 '쓸데없는 것' 이다.”(2:1-2)

“그러나 내 손으로 성취한 모든 일과 이루려고 애쓴 나의 수고를 돌이켜보니, 참으로 세상 모든 것이 헛되고,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고, 아무런 보람도 없는 것이었다.”(2:12)

“그러니 산다는 것이 다 덧없는 것이다. 인생살이에 얽힌 일들이 나에게는 괴로움일 뿐이다. 모든 것이 바람을 잡으려는 것처럼 헛될 뿐이다.”(2:17)

“돈 좋아하는 사람은, 돈이 아무리 많아도 만족하지 못하고, 부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리 많이 벌어도 만족하지 못하니, 돈을 많이 버는 것도 헛되다.”(5:10)

오늘 본문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15 어머니 태에서 맨몸으로 나와서, 돌아갈 때에도 맨몸으로 간다. 수고해서 얻은 것은 하나도 가져가지 못한다. 16 또 한 가지 비참한 일을 보았다. 사람이 온 그대로 돌아가니, 바람을 잡으려는 수고를 한들 무슨 보람이 있는가? 17 평생 어둠 속에서 먹고 지내며, 온갖 울분과 고생과 분노에 시달리며 살 뿐이다.”

‘뭐하러 사나~’ 싶은 생각이 드는 말씀들입니다. 반복되는 ‘헛되도다’라는 표현, 전도자가 전하는 말씀의 내용에서 삶을 허무하게 대해야 할 것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전도자가 전하는 말씀과 ‘헛되도다’라는 표현은 성도들이 ‘하늘 아래서’ 살아가는 동안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도록 장애물을 제거해주는 역할을 한다는 점입니다.

‘인생 그냥 대충 살아, 태어났으니까 그냥 살아’가 아니라 헛된 일, 바람을 잡는 것과 같은 일을 제거함으로써 지향해야 할 삶, 무엇이 진정 누려야 할 삶인지를 가르쳐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님들이 생각하는 행복이란 무엇입니까? 행복한 삶은 무엇입니까? ‘내가 생각하는 행복은’으로 시작하는 각자의 대답을 들어보면, 그 대답을 통해 신앙생활을 하는 목적을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신앙생활을 하는 많은 성도에게서 안타깝게도 많은 시간 성경을 읽고 듣고 묵상하고, 또 많은 시간 기도하며 신앙생활을 함에도 삶의 무게 중심, 삶의 가치, 행복이 세속적인 추구에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전도자가 말하는 헛된 일에 삶의 무게 중심을 두고 살아갑니다.

신앙생활이 개인적인 세속적 추구, 즉 자신의 욕망과 뜻을 이루기 위한 도구와 수단으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성도(목사인 저를 포함한 모든 신앙인)가 이런 목적을 의식하지 못한 채 신앙생활을 합니다.

만약 “성도/목사님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누리려 하기보다 성도/목사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신앙생활을 하는 것 같습니다.”라고 이야기를 하면 백 명이면 백 명이 “저는 그렇지 않습니다.”로 대답하지 않겠습니까?

골로새서 3:9b-10 “여러분은 옛 사람을 그 행실과 함께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십시오. 이 새 사람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형상을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져서, 참 지식에 이르게 됩니다.”

에베소서 4:22-24 “여러분은 지난날의 생활 방식대로 허망한 욕정을 따라 살다가 썩어 없어질 그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마음의 영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참 의로움과 참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십시오.”

‘옛사람’을 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고 권면합니다. 이런 말씀들에는 단순하게 ‘착하게 살아라.’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온 삶의 방향을 달리하라는 말씀입니다. 말씀은 성도에게 완전하게 다른 삶의 길을 제시하지만, 익숙해 있는 삶의 습관, 가치로부터 돌아서기가 쉽지 않습니다.

많은 성도가 회개한다고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겠다고 고백하지만, 도대체 어떻게 다르게 살고 있는지를 전혀 확인할 수가 없습니다. 확인할 수 없는 이유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똑같은 것을 욕망하며 살아갈 뿐입니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 이야기가 있습니다. 플라톤이 쓴 책의 내용을 요약해 놓은 블로그의 글을 성도님들께 읽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동굴 안에 죄수들이 갇혀 있다. 이들은 오직 맞은편 동굴 벽에 있는 그림자만 볼 수 있도록 온몸과 목이 사슬에 묶여 고정된 상태이다. 죄수들의 뒤에 있는 장벽 위에서 사람들이 모닥불을 피워놓고 그 앞에서 그림자놀이를 하고 있다. 죄수들이 보고 있는 그림자의 정체가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평생 벽만 보고 살아온 죄수들은 등 뒤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고, 심지어 자신들이 묶여 있다는 사실조차 느끼지 못한다. 그리고 자신들이 보고 있는 그림자들이 이 세상의 전부라고 믿는다.

그런데 한 죄수가 사슬에서 풀려나 동굴 밖으로 끌려나간다. 그 죄수는 지금까지 보아온 그림자들이 모두 실물이 아니라는 것도 깨닫는다. 동굴 밖 세상을 보고, 모닥불이 아닌 진짜 태양 빛도 느끼게 된다.

그 후 그가 다시 동굴 안으로 돌아온다. 그가 아직 묶여 있는 죄수들에게 장벽 뒤의 세상 이야기를 해준다면, 그의 말을 선뜻 받아들이기보다 오히려 그를 조롱할 것이다.”

- [김흥일 쌤의 서양철학 여행] (6) 플라톤(중) 동굴의 비유
(https://sgsg.hankyung.com/article/2017060924891)

오늘날 성도의 모습이 이 비유에 나오는 동굴 안에 묶여 있는 죄수들과 같습니다. 사실 많은 성도가 ‘이것이다’라고 하는 자신만의 방식 그러나 사실은 세상이 가르쳐주고 강요한 방식을 쉽사리 포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저만해도 집으로 돌아가서 저의 아들이 공부가 조금이라도 뒤처지는 느낌이 들면 저도 모르게 아이를 다그치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두렵기 때문입니다. 공부를 못하면 좋은 대학에 못 가고, 좋은 대학에 못 가면, 이렇게 못 하면, 저렇게 못 하면 등등 계속 이어지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세상이 주입한 생각과 세속적인 가치들이 불안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살지 못하면 내 아이가 실패와 불행한 삶을 살지 않을까 싶은 겁니다.

공부하지 말라거나, 공부 못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세상이 가르쳐준 방식대로 살아야 한다! 소유와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고 이루라! 그 밖의 것은 불안과 두려움만 키울 뿐이다. 거짓된 이야기일 뿐이다! 추상적인, 정신 승리하는 우스운 이야기일 뿐이다! 라고 하는 방향, 헛되고 헛된 일에서 벗어나야 함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방향에서 벗어나야 하나님이 가르쳐주시는 방향으로 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방향으로 향할 때 오늘 전도자가 말 한 ‘행복’을 경험할 수 있게 됩니다. 누가 보더라도 세속적인 추구, 그 추구로 인한 행복을 누리기 위해 애쓰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지만 인정하지 않고, 부인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깨어있어야 합니다. ‘아차!’ 하는 순간에 휘몰아치는 급류에 휩쓸려 가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여러 교회에서 사역하면서 목회자로서 고통스러운 순간들이 많았습니다. 좋은 대학에 들어갈 수 있게 해달라는 기도, 직장에서 승진하게 해달라는 기도, 건물이 잘 팔리게 해달라는 기도, 자신의 개인적인 욕망을 위해 기도해 달라는 이들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그런데 초도에 오니 성도님들의 기도는 일용할 양식을 위한 기도뿐이었습니다. 오늘 하루의 안녕을 바라는 기도뿐이었습니다. 어떤 성도님들은 기도 제목조차 없었습니다. 네, 오히려 그것이 더 반갑고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로 삶을 돌이킬 가능성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직접 가르쳐주신 기도에도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는 기도를 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전도자는 ‘헛되도다.’ 그 모든 일은 헛될 뿐이다. 그 일들을 통해서는 참 행복을 경험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오늘 본문에서 전도자는 “하나님은 이처럼, 사람이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시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신다고 전도자는 고백합니다. ‘아니 지금까지 다 헛되다고 말해놓고서 그럼 어떻게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신다는 거야?’라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전도자는 행복한 삶을 위한 단서들을 본문 곳곳에서 이미 이야기했습니다. “사람에게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 자기가 하는 수고에서 스스로 보람을 느끼는 것,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알고 보니, 이것도 하나님이 주시는 것, 그분께서 주시지 않고서야, 누가 먹을 수 있으며, 누가 즐길 수 있겠는가?”(2:24-25)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마다 알맞은 때가 있다.”(3:1), “사람이 애쓴다고 해서, 이런 일에 무엇을 더 보탤 수 있겠는가? 이제 보니,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수고하라고 지우신 짐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 제때에 알맞게 일어나도록 만드셨다.”(3:9-11)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도 이렇게 고백합니다. “18 그렇다. 우리의 한평생이 짧고 덧없는 것이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이니, 세상에서 애쓰고 수고하여 얻은 것으로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요, 좋은 일임을 내가 깨달았다! 이것은 곧 사람이 받은 몫이다. 19 하나님이 사람에게 부와 재산을 주셔서 누리게 하시며, 정해진 몫을 받게 하시며, 수고함으로써 즐거워하게 하신 것이니, 이 모두가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선물이다. 20 하나님은 이처럼, 사람이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시니, 덧없는 인생살이에 크게 마음 쓸 일이 없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주목했던, 세상이 요구하고 강요했던 덧없는 가치와 일들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덧없는 가치와 일을 위해 오늘 하나님이 주시는 것, 오늘 누려야 하는 하나님의 선물을 외면하지 말아야 합니다. 제때에 알맞게 일어나는 일들 속에서 감사하기보다는 부인하고 절망했던 삶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덧없는 인생살이에 크게 마음 쓸 일이 없다.’는 전도자의 고백을 주목해야 합니다. 육신을 입고 살아가는 이 짧은 생에 대하여 크게 마음 쓰지 않는, 삶을 좀 더 가볍게 경험하는 저와 성도님들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이렇게 삶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어야, 욕망과 세속적 가치에서 벗어나야, 오늘 하루의 진정한 행복을 발견하고 누릴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에 주어지는 각 사람의 몫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성도는 앞서 이야기한 플라톤이 비유로 말한 동굴 속의 죄수들처럼, 선택하기를 배워야 합니다. 엄청난 저항을 느끼게 될 말씀이지만, 다른 삶의 길을 선택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이 알려주시는 행복과 그릇된 욕망(거짓 행복) 중에서 양자택일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하여 감옥에 갇혀 있던 우리의 사고와 마음이 오랜 세월 끝에 마침내 해방되게 할 방법을 말입니다.

크고 작음, 많고 적음에 갇히지 마십시오. 자족하며, 감사함으로 오늘 하루를 보내며 행복하게 사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19 하나님이 사람에게 부와 재산을 주셔서 누리게 하시며, 정해진 몫을 받게 하시며, 수고함으로써 즐거워하게 하신 것이니, 이 모두가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선물이다. 20 하나님은 이처럼, 사람이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시니, 덧없는 인생살이에 크게 마음 쓸 일이 없다.”

이상중 목사(초도제일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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