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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서 어떻게 예수처럼참 하나님, 참사람, 니케아 공의회 교리를 거꾸로 읽어 본다
홍인식 대표(에큐메니안) | 승인 2023.02.26 05:25
▲ Icon depicting the Emperor Constantine and the bishops of the First Council of Nicaea (325) holding the Niceno–Constantinopolitan Creed of 381 ⓒWikipedia

기독교는 어떤 종교인가?

세상에 종교는 많습니다. 이름이 알려진 종교도 있지만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이름의 종교도 있습니다. 세계 인구가 79억 명인데 종교인구는 70억 명이라고 합니다. 이 중에서 가장 큰 종교를 중심으로 종교인구 분포를 살펴보면, 기독교 25억 명, 이슬람교 19억 명, 힌두교 10억 명, 불교 5억 명 등으로 나타납니다.

세계 인구 약 79억 명 중 기독교인이 차지하는 비율은 약 32.3%입니다. 이 중에 가톨릭 교인은 12억, 전통적 개신교인 6억, 정교회 약 3억 그 외 오순절-은사주의 5억 명 등으로 분포되어 있습니다. 기독교 내에서 교파 4만 5,600개에 달하며 교회(예배 처소) 440만 개로 알려져 있습니다. 대륙별 기독교 인구를 살펴보면 북반구 8억 3,272만 9천 명(유럽과 러시아 포함) 남반구 17억 명이며 아프리카(5개 지역) 6억 8,493만 1천 명, 아시아 (5개 지역) 3억 8,282만 9천 명, 중남미(3개 지역) 6억 명 등입니다.

세계에는 다양한 종교가 존재하고 있으며 기독교 안에서도 많은 다양성이 발견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통계를 보면 어느 누가 자신이 절대적 진리를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손쉽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다양한 종교 가운데 우리는 기독교인이라고 자처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개신교인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사실 생각해 보면 개신교도 그 안을 들여다보면 얼마나 많은 교파가 있는지요. 서로의 신학과 교리가 다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마치 내가 속해 있는 교파에서 가르치고 배운 것만이 올바르다고 생각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좁게는 개신교인 그리고 넓게는 기독교인으로서 그리고 더 넓게 세계 종교인으로서 우리의 정체성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요소를 크게 3가지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첫째는 예수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고 따르고 예수를 따르고 예수처럼 살기를 결단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예수가 누구인지, 그분의 삶은 어떠했는지? 그분의 가르침과 행위는 어떠했는지가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를 어떻게 바라보고 이해하고 해석하고 있는가는 핵심적입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의 신학과 교리 그리고 신앙의 행위를 결정짓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성경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다양한 사람이 다양한 역사적 배경과 문화에서 기록한 여러 책을 모은 것으로서 신앙의 정당성을 가늠하는 척도로 사용됩니다. 기독교인은 성경을 정경으로 인정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셋째는 기독교 역사입니다. 기독교는 2000년 동안 예수와 성경을 중심으로 다양한 해석을 했습니다. 그리고 역사를 통하여 다양한 신학과 교리를 생성해 왔습니다. 신학과 교리는 오직 하나로 고정되지 않고 다양하게 발전해 왔습니다. 문화에 따라서도 다양하게 해석되기도 하였습니다.

이 가운데서도 기독교인의 정체성을 결정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예수에 관한 생각입니다. ‘예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입니다. 마태복음 16장에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그대들은 나를 누구라고 합니까?”

우리는 예수가 누구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래서 이번 말씀 나누기를 통하여 우선으로 예수가 누구인가를 다루어 보려고 합니다. 예수의 정체성, 예수의 삶, 예수의 죽음, 부활 등 기독교 교리가 규정하고 있는 예수에 대한 이해를 오늘의 사회와 문화 그리고 시각에서 다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은 먼저, 예수의 정체성에 대하여 나누려고 합니다.

예수는 누구인가?

기독교 교리와 신학에서 가장 오래된 논쟁은 예수의 정체성에 대한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예수는 참 하나님인가? 아니면 참사람인가 이것도 저것도 아니면 참 하나님이며 참사람인가 하는 논쟁입니다. 결론적으로, 기독교 역사는 예수를 참 하나님이며 참사람으로 규정했습니다.

그래서 그 유명한 vere deo, vere homo(진짜 신, 진짜 인간)라는 교리가 결정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교리는 절대 진리가 되었고 그 누구도 이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면 이단으로 정죄합니다. 그런데 이 교리가 순조롭게 정해진 것은 아닙니다. 무수한 논쟁의 과정을 거쳐서 결정됩니다. 니케아 공의회를 통한 결정이었습니다.

니케아 공의회의 결정, vere deo, vere homo

니케아 공의회는 325년 6월 19일 니케아(Nicaea, 현재 터키의 이즈니크) 콘스탄티누스 1세의 니케아 별궁에서 열립니다. 공의회는 로마 황제에 의해 소집됩니다. 부활절과 삼위일체 등이 논의되었으며, 니케아 신경을 채택하여 아리우스파를 이단으로 정죄하면서 보편교회(공교회)의 정치적 외연이 확대되었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정치적으로는 하나지만, 신학적으로 갈라진 로마 제국의 통일과 화합을 위하여 기독교의 단결이 중요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교회 내부에는 많은 교리의 대립이 있어 수습이 곤란하였기 때문에 이 대립을 끝내기 위해 비티니아의 니케아에서 주교들을 소집하였고 318명이 참석합니다.

공의회에서는 예수를 피조물, 즉 예수는 인간이며 신은 아니라고 주장하는 아리우스와 예수를 진짜 하나님, 진짜 사람, 하나님과 예수는 동질이라고 주장하는 아타나시우스와의 교리 대립을 정리합니다.

공의회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개막 연설로 시작됩니다. 이는 공의회에서 황제의 의견과 영향이 지대하다는 것을 의미하였고 참석자들이 황제의 입장을 외면하거나 무시할 수 없는 분위기를 만들었습니다. 오랜 논쟁 끝에 결국 아버지와 아들을 동질(호모우시오스)로 보는 니케아 신조가 채택되어 아버지와 아들을 이질로 보는 아리우스를 이단으로 정죄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회의로 교리 논쟁이 해결된 것은 아니며, 오히려 그 후에 더욱 격화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 회의에 있어서 황제의 권력이 교회 내의 문제에 개입하는 나쁜 선례를 남겼다는 것입니다.

이후 공의회를 통하여 결정되는 교리들이 지배층과 권력자, 그리고 부자들의 이익을 해치지 않는다는 것, 다시 말하면 권력의 현상 유지 혹은 강화에 대하여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보다 객관적이고 냉철한 역사시각과 특히 아래로부터의 시각으로 교리 역사를 살펴보면 많은 경우 종교 교리가 권력층과 당시 지배체제의 생각과 의견을 반영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곤 합니다.

예를 들면,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대속론 혹은 속죄론 측면에서 바라보는 안셀름의 입장도 당시 지배체제였던 봉건주의 영주들의 이익을 반영하였다는 해석과 비판을 할 수 있습니다. 영주에 대한 반역 사건에서 반역의 죄는 용서될 수 있으나 그로 인하여 영주에게 끼친 손해 혹은 부채는 반드시 같아야 한다는 당시의 체제 유지 원리를 그대로 반영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에게 지은 죄는 용서 받을 수 있으나 죄의 빚은 갚아야 하는 논리가 성립됩니다. 그런데 빚이 너무나도 크기에 인간은 갚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기에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서 죽게 하여 죄의 빚을 갚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이 교리에서 중요한 것은 죄 용서가 아닙니다. 죄의 빚 갚음이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지배층들은 대단히 흡족했을 것입니다. 

예수의 참 하느님, 참사람, vere deo, vere homo 교리 확립도 당시 로마 제국과 황제의 이해관계와 이익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황제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로마 제국의 통일과 단결, 하나 됨입니다. 두 번째로 황제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위치를 유지하거나 강화하는 교리가 무엇일까였습니다. 당시 로마 황제는 신의 아들, 주님 (큐리오스)라고 불리면서 신과 동일시되곤 하였습니다. 그것이 로마 사람 위에 군림하고 황제로 권력을 누리면 살게 하는 매우 중요한 신학적 배경과 근거가 되었습니다.

황제는 예수가 누구인가에 관하여 관심을 가진 것이 아닙니다. 예수에 대한 어떤 교리가 로마 체제와 자신의 위치를 유지하고 강화하는가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황제에게 매력적인 가르침은 당연히 예수를 하나님과 동질로 보는 vere deo, vere homo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예수는 참 신이며 참 인간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예수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하면 우리는 니케아 공의회에서 결정된 vere deo, vere homo 참 하나님이며 참사람이신 예수라고 자동기계 같은 답변을 합니다. 저는 오늘 주어진 성경 말씀을 통하여 이 교리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오늘의 시각에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래로부터의 시각으로 새롭게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자기를 비우다, kenosis

빌립보서 2장 5-8절의 말씀은 기독교회에서 가장 오래된 예수 그리스도 찬가 중의 하나입니다. 바울은 예수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오래된 찬양시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 본문을 새롭게 읽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현존 방식으로 계셨으나 하느님과 동등함을 고수하려 탐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현존을 수용하면서 사람들과 똑같은 모습이 되었습니다.

본 찬양 시는 초기 기독교인들이 예수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으며 또한 예수에 관한 그들의 관심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를 보여줍니다. 이 찬가는 당시 사람들의 예수에 대한 신앙고백을 담고 있습니다. 과연 이들은 “그대들은 나를 누구라고 합니까?”라는 질문에 어떤 답변을 하는 것일까요?

당시 사람들은 찬양 시를 통하여 예수가 누구인가에 대하여 답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예수의 이 땅에서의 삶의 모습을 “사람들과 똑같은 모습이 되었습니다.”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이 예수에 대하여 생각한 것은 그가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예수가 하나님인가 하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비록 예수가 본래 하나님이었다고 하더라도 그들에게는 예수가 사람으로 다가왔다는 사실이 중요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들은 “그는 하느님의 현존 방식으로 계셨으나 하느님과 동등함을 고수하려 탐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현존을 수용하면서 사람들과 똑같은 모습이 되었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하느님의 현존 방식에서 사람의 현존 방식 그것도 종의 현존을 수용하였다고 말합니다. 당시 예수에 대하여 고백하고 있는 사람들은 다름 아닌 종의 현존 방식으로 살아가던 낮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래 사람의 시각으로 예수는 아래 사람, 종의 현존 방식을 택한 자신들과 똑같은 사람임을 고백했습니다.

이렇게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사람으로 고백했습니다. 그들은 예수가 사람이기에 그것도 종이기에 그를 신뢰할 수 있었고 다를 수 있었습니다. 예수가 신, 하느님이었기에 따른 것이 아니라 사람이었기에 따랐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사람으로 오신 예수에게서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그들은 비로소 예수를 통하여 멀리 계신 하나님을 그들 삶의 현장에서 경험합니다.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이 그들의 삶의 자리 한복판에서 그들과 동행하며 함께 살아가고 있음을 체험하게 됩니다.

또 사무엘하 7장 5절 이하에서는 하나님을 위해 집을 짓겠다는 다윗의 생각을 거부하면서 하신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살 집을 네가 지으려고 하느냐? 6 그러나 나는,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데리고 올라온 날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어떤 집에서도 살지 않고, 오직 장막이나 성막에 있으면서, 옮겨 다니며 지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본래 이런 분이셨습니다. 따로 살지 않고 사람과 함께 사람처럼 사시던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 그것도 높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람이 아니라 신으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다윗의 성전 건축 의도도 사람 가운데 사람처럼 사시는 신을 하늘로 보내고자 하는 것에 있었습니다. 이런 다윗의 의도를 하나님이 거부하고 계시는 장면이 오늘 구약의 본문입니다.

예수 당시의 사람들은 예수에게서 이런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통하여 그들 가운데 거하시는 진정한 의미의 임마누엘(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사람의 현존 방식 아니 그들과 마찬가지로 종의 현존 방식을 받아들인 하나님을 예수에게서 발견한 그들은 비로소 자신들 안에 하나님이 계심을 깨닫게 됩니다. 그들 자신이 하나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시천주(侍天主)임을 알게 됩니다. 그들 자신이 하나님임을 깨닫게 됩니다.

따라서 자신의 삶이 얼마나 고귀하고 소중한 것인가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모시고 살아갔던 예수를 보면서 상대방이 모시고 있는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예수는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의 모범이었습니다.

VERE DEO, VERE HOMO

이제 모든 것이 분명하고 명확해 졌습니다. 초기 사람들은 예수를 하나님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는 멀리(하늘에) 계셔서 사람들과 떨어져 사는 하나님을 사람이 사는 곳으로 오게 하신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보이지 않고 무서운 하나님을 함께 살아가는 친근한 분으로 알게 하신 분이 예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오심은 우리 모두에게 기쁜 소식, 복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는 진짜 하나님이며, 진짜 사람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합니다. 점차 사람들과 함께 지내는 하나님이 거북스러워집니다. 특히 자신들만이 신의 자녀라고 생각하고, 비천한 인간들로부터 존경을 받아야 했던 권력자들은 하나님이 인간에게서 떨어져 있는 것이 더 편안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권력자들이 필요할 때만 나타나시면 좋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러한 생각의 구체적인 표현은 크게 2가지로 나타납니다. 첫째는 성전을 화려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정하고 특정한 장소에 하나님을 묶어둡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삶의 현장으로부터 분리됩니다. 이제 하나님을 특정 장소로 찾아가서 만나야 합니다. 신전은 왕궁과 같은 규모와 화려함으로 지어집니다. 왕궁이 신전이고 신전이 왕궁입니다. 신은 왕이고 왕은 신입니다.

둘째, 신학적으로 인간과 신을 분리하는 것입니다. 신은 인간 안에 존재할 수 없고 또 인간과 함께 살 수 없습니다. 신은 다스리고 인간은 복종합니다. 신은 존귀한 존재이고 인간은 천하고 천한 죄인입니다. 철저한 이원론이 신과 인간 사이에 적용됩니다.

똑같은 논리로 로마 황제는 거룩하고 존귀한 존재이고 백성들은 천한 존재로서 황제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황제는 신의 아들이지만 백성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황제는 인간이 예수를 진짜 하나님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VERE DEUS, VERE HOMO의 교리를 받아들입니다.

이렇게 로마 황제의 입장에서 형성된 교리는 예수 안에서 사람이 되신 하나님을 다시 하늘의 하나님으로 돌려보내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신앙은 하늘에 계신 신을 바라보는 것으로 변질됩니다. 신앙은 땅의 일이 아니라 하늘의 일에 관심갖는 것으로 변하게 됩니다. 신앙과 신학의 변질이 나타났습니다.

이렇게 예수와 하나님은 점차 사람의 삶과 땅으로부터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런 과정을 걸쳐 6세기부터 시작된 vere deo, vere homo의 교리는 약 1500년 동안 기독교의 진리를 지배했습니다. 신앙은 이 같은 교리를 수긍하는 것으로 고착되었습니다.

하비 콕스는 이 같은 의미에서 기독교의 신앙의 개념을 3개의 시대로 구분하기도 합니다. 첫 번째 시대의 신앙의 개념을 fide(faith) 라고 표현합니다. 믿음 자체입니다. 예수를 따르는 믿음을 말했습니다. 두 번째 시대는 6세기 이후, 다시 말하면 교리가 확정된 시대 이후 믿음은 asensus(belief), 수긍으로 이해됩니다. 교회 체제 안에서 교리를 받아들이고 수긍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비 콕스는 이제 세 번째 단계가 이르렀다고 주장합니다. 그것을 fiducia(fidelity) 라고 부릅니다. 믿음을 신뢰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삶의 행위를 신앙으로 이해합니다. 돈 큐빗은 그것을 ‘일상적 삶의 종교’(religion of ordinary life)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메시지 회복과 전환

이제 우리는 또 다른 전환의 시대를 맞고 있습니다. 코로나 이후 전환의 시대에서 믿음은 다시 삶의 행위, ‘일상적 삶의 종교’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vere deo, vere homo 참 하나님, 참사람 교리의 원래 의미를 회복함으로써 가능합니다. 

예수는 참사람으로 오셨습니다. 그분 안에는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면서 참사람다운 삶을 사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예수를 통하여 참 하나님을 보게 되고 경험하게 되어 참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이르게 됩니다. 

참사람으로 오시고 참사람으로 사신 예수는 우리를 진리와 생명으로 이끄는 길이십니다. 참사람으로 오신 그분은 우리에게 참 하나님이 누구인가를 보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할 때 우리는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을 목격한 로마 백부장의 “참으로 이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라는 고백처럼 우리도 예수를 향하여 “참으로 예수야말로 참 하나님, 참사람이었다”라는 고백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참사람으로 살아가는 우리를 보고 세상 사람들도 같은 고백을 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진정한 의미의 ‘vere deo, vere homo 참 하나님, 참사람’을 알게 되고 사람으로 오신 예수를 경험하게 될 때 비로소 우리의 신앙은 하늘의 이야기가 아니라 땅에 사는 사람 이야기를 하게 될 것입니다. 하늘의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논하기 이전에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예수처럼 참사람으로 살아가게 될 것인가를 논하고 행동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는 참사람으로 오셔서 우리에게 참 하나님이 누구인가를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홍인식 대표(에큐메니안)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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