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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열하게 고민하고 살아내는“하나님의 법을 섬기는 성도”(로마서 7:14-25)
이상중 목사(초도제일교회) | 승인 2023.02.27 00:27
▲ 우리가 치열하게 고민하고 싸워서 이겨내고 살아야 하는 대상은 바로 나 자신이다. ⓒGetty Image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나요? 평안은 하나님이 성도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입니다. 돈이나 물질 같은 소유, 육신의 건강함, 외부 상황의 안정은 우리에게 완전한 평안을 줄 수 없습니다. 이런 평안은 일시적이며, 언제라도 성도를 두려움과 절망 가운데로 내몰 수 있는 불완전한 평안일 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주신 평안은 세상이 주는 이런 불완전한 평안과는 다릅니다. 완전하고 온전한 평안입니다. 우리 안에 주어졌기에 잃어버릴 염려도 없고, 빼앗길 염려도 없습니다. “하나님, 평안 누리기를 원합니다. 성령님 나를 인도하소서.”라고 요청하시면 됩니다. 그러면 언제든, 어디서든, 어떤 상황에서든 주어진 평안이 우리 자신을 충만하게 합니다. 내 안에 주어진 완전한 평안을 선택하고 누리실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지난주 ‘영과 진리’로 예배드려야 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언젠가부터 ‘영과 진리’로 예배드린다는 이 말씀을 저 자신을 포함한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질문에서 비롯된 말씀이었습니다. 특히 코로나 이후부터 모이지 못하기 때문에 장소와 예배형식이 지나치게 강요된다거나 반대로 장소와 예배형식이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여기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사실 이 모든 과정이 불안과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성도를 잃게 될까 봐, 재정적인 어려움을 당할까 봐서였습니다. 전부는 아니었지만 지극히 사람 중심, 나 중심적인 사고로 발생한 방편들처럼 보여졌습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드린다는 것은 나 편할 때, 내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시간이 되는 장소에서 예배드려야 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드림은 성령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더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으로 예배드려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어떻게든 예배만 드리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찝찝함을 해소하기 위한 예배가 되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 예배, 하나님이 중심이 되는 예배, 온 삶을 드리는 예배를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중심이 된다면 그때는 장소도, 형식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 순서가 바뀌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기에 끊임없이 질문해야 합니다. 지금 내가 드리는 이 예배가 과연 하나님이 중심되시는 예배인지 아니면 내가 중심되는 예배인지를 말입니다. 말씀을 이용해 자신을 속이는 예배를 드리지 않고, 말씀을 통해 더욱 진실하게 하나님 중심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처럼 믿음대로 살고 싶지만, 온전한 예배를 드리고 싶지만, 방해가 되는 건 언제나 우리의 마음인 것 같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나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비추어보고,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22 나는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나, 23 내 지체에는 다른 법이 있어서 내 마음의 법과 맞서서 싸우며, 내 지체에 있는 죄의 법에 나를 포로로 만드는 것을 봅니다. 24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

이런 고백을 사도 바울이 했지만 사도 바울이야말로 하나님이 중심이 되는 삶,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며 순종한 사람이라는 것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런 바울이 이런 고민을 한다는 것이 놀랍기도 하고, 고민 없는 우리 자신이 부끄러워지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은 끊임없이 자신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할 수 있도록 노력한 사람입니다. 자신의 고칠 수 없는 질병,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고, 힘들게 하는 질병마저도 하나님을 향한 도구로 삼고 감사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2:7의 말씀입니다.

“내가 받은 엄청난 계시들 때문에 사람들이 나를 과대평가 할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내가 교만하게 되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내 몸에 가시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사탄의 하수인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으로 나를 치셔서 나로 하여금 교만해지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질병은 치료되어야만 하고, 하나님은 이런 나의 기도에 응답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이고, 원하는 대로 안 될 때는 원망도 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요? 그런데 바울은 이런 자신의 질병 때문에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고 감사하기도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하나님의 법,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르고자 하는 이런 바울의 고민과 갈등이 담겨 있습니다. 이러한 바울의 고민과 고백이 오늘날 우리의 고민과 고백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이 “24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무엇 때문에 바울은 이리도 고통스러워하고 있습니까?

14-15절의 말씀입니다. “14 우리는 율법이 신령한 것인 줄 압니다. 그러나 나는 육정에 매인 존재로서, 죄 아래에 팔린 몸입니다. 15 나는 내가 하는 일을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성도님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중요하다는 것,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이 된다는 것을 믿으십니까? 말씀 전할 준비를 할 때면 이런 고민을 하게 됩니다. 우리의 고민과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 특히나 바울의 이런 고민과 간극이 너무 큰 건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성도(목사를 포함)라면, 어떻게 하면 말씀대로 살 수 있을까? 말씀대로 살기 위해 내 삶에서 끊어내야 할 것은 무엇이고, 조정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지금 이 상황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실 선택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등의 치열한 고민이 삶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하지만 과연 우리가 종일 고민하고, 걱정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방금 읽은 14-15절의 말씀, “14 우리는 율법이 신령한 것인 줄 압니다. 그러나 나는 육정에 매인 존재로서, 죄 아래에 팔린 몸입니다. 15 나는 내가 하는 일을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바울과 같은 이런 고민을 하고 계십니까? 이 구절을 읽고, 들으면서 입술로 ‘주여 ...’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이 고백이 나와 먼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나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주여 ..’라는 고백이 입술을 통해 저절로 나오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지향점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입니다. “16 내가 그런 일을 하면서도 그것을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곧 율법이 선하다는 사실에 동의하는 것입니다. 17 그렇다면, 그와 같은 일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 죄입니다.”

‘자리를 잡고 있는 죄’라고 표현했습니다. 죄가 자리를 잡았다는 것은 어떤 표현이겠습니까? 우리가 허락했던 작은 틈새, 이 작은 틈새로 어느새 죄가 들어왔고, 결국 틈새 사이로 쏟아져 들어와 이제는 자신이 주인인 것처럼 행세하게 된 죄를 의미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종종 때로는 쉽게 죄에 자리를 내어줍니다. 그 결과로 더 자주 죄에 자리를 내어주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18절 이하의 말씀을 통해 이렇게 고백합니다. “18 나는 내 속에 곧 내 육신 속에 선한 것이 깃들여 있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나는 선을 행하려는 의지는 있으나, 그것을 실행하지는 않으니 말입니다. 19 나는 내가 원하는 선한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원하지 않는 악한 일을 합니다. 20 내가 해서는 안 되는 것을 하면, 그것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 죄입니다.”

“20 그런 일을 하면서도 그것을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결국 그런 일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들어 있는 죄입니다.” 죄가 삶을 이끌어 갑니다. 치열하게 죄와 싸우지 않으면, 죄가 삶을 이끌어 갑니다.

이렇게 되는 이유에 대해 사도 바울은 바로 다음 구절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21 여기에서 나는 한 법칙을 발견했읍니다. 곧 내가 선을 행하려 할 때에는 언제나 바로 곁에 악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22 나는 내 마음 속으로는 하느님의 율법을 반기지만 23 내 몸 속에는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여 싸우고 있는 다른 법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읍니다. 그 법은 나를 사로잡아 내 몸 속에 있는 죄의 법의 종이 되게 합니다.”(공동번역)

시인과 촌장의 하덕규씨가 쓴 <가시나무>라는 노래의 가사가 방금 읽어드린 본문의 의미를 아주 적합하게 표현하고 있지 않아 싶습니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 당신의 쉴 곳 없네
내 속엔 헛된 바램들로 / 당신의 편할 곳 없네
내 속엔 내가 어쩔 수 없는 어둠 / 당신의 쉴 자리를 뺏고
내 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 / 무성한 가시나무 숲 같네
바람만 불면 그 메마른 가지 / 서로 부대끼며 울어대고
쉴 곳을 찾아 지쳐 날아온 / 어린 새들도 가시에 찔려 날아가고
바람만 불면 외롭고 또 괴로워 / 슬픈 노래를 부르던 날이 많았는데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 당신의 쉴 곳 없네

죄와 악의 실체는 무엇입니까? 바로 ‘나’라는 에고가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이 세상에 물들어버린 ‘나’가 문제입니다. 죄와 악은 어떤 환상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바로 ‘나’가 문제의 중심이 됩니다. 나는 언제나 하나님과 다른 방향으로, 하나님과 대립하며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백합니다. “24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건져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니 나 자신은,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기고,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고 있습니다.”

바울은 질문과 동시에 감사를 드린다고 고백했습니다. 지금은 그렇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죽음의 몸에서, 자아(나)로 가득한 나로부터 건져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한 우리는 결국 그렇게 될 줄 믿습니다.

포기하지 마십시오. 죄의 법이 아닌 하나님의 법, 생명의 법, 말씀을 따르기를 원하는 성도가 되십시오. 비록 지금은 여전히 말씀대로 살려 할 때 바로 곁에서 악이 유혹하며 이기고 질 때가 있지만, 언젠가 우리는 말씀에만 순종하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게 될 줄 믿습니다.

그 날을 향하여, 오늘 하루도 좌절하지 않고 말씀 가운데 머물고, 말씀에 순종하며 치열하게 고민하고 살아내는 성도가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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