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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와 분노“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형제에게 내가 죄를 범하면”(마태복음 19:21-22)
이상중 목사(초도제일교회) | 승인 2023.03.13 01:18
▲ 개인적인 삶이든 공동체의 삶이든 용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절대적인 삶의 방식이다. ⓒGetty Image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나요? 하나님을 믿는 성도라고 해서 원치 않는 일이나 나쁜 일, 재난, 고통 등을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일을 다 똑같이 겪으면서도 성도가 평안할 수 있는 이유가 하나님께서 나에게 벌어진 일들, 외부의 상황들을 정리해 주시기 때문도 아닙니다. 평안할 수 있는 이유는, 완전한 평안이 우리 안에, 내면에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주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주는 것이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요한복음 14:27)

제자들이 앞으로 겪게 될 고난, 죽음의 위협, 죽음을 생각하면 제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이런 보이지 않는, 추상적인 마음의 평화가 아니라 상황을 변화시킬 힘이나, 전능자의 개입이라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것은 마음에서 경험할 수 있는, 내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평화였습니다.

놀랍게도 예수님이 평화를 주신 이후 제자들은 자신이 겪게 될 고난과 고통을 두려워하거나 도망치지 않고 담대하게 마주할 수 있었습니다. 마음에서 누리는 평화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지금까지 알고 또는 추구하던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기에 제자들은 이 모든 상황 속에서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에게 주어진 이 평화가 오늘 우리에게도 주어졌습니다. 나의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통제하고자 한다면 이 평화, 평안은 누리지 못합니다. 하지만 나의 안에 있는,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평안을 발견하고, 선택하고, 누리고자 한다면 온전한 평안을 경험하게 됩니다. 언제, 어디서나,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우리 안에 주어진 이 온전한 평안을 놓치지 않고 선택하며 누리시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오늘은 마태복음 18장을 통해 ‘용서’에 관해 함께 이야기 나누고자 합니다. 성경은 성도에게 용서하며 살아가라고 말합니다. 주일 설교 시간에 성도가 용서하며 살아야 하는 이유에 관해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첫째는 타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성도 자신을 위해서 용서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용서하지 못하고 살아갈 때, 미움, 분노, 상처가 계속해서 나 자신을 괴롭힙니다. 그렇기에 용서함으로 상처와 기억 등을 떠나보낼 필요가 있습니다.

예전에 사역하던 교회에서 한 집사님이 집안의 돈 문제로 상담을 청해오셨습니다. 형제가 너무 밉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돈을 포기하라고 말씀드렸는데, 그렇게는 못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시면서 계속 분노를 곱씹으며 괴로워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둘째는 온전한 사랑을 위해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용서하지 못할 때 분노, 미움이 마음에 계속 자리를 잡고 있으면 사랑하는 삶을 살 수는 있겠지만, 온전한 사랑을 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한 집사님은 형제에 대한 분노를 안고 사셨습니다. 이 분노가 일상에 영향을 미쳐 직장에서는 동료에게, 가정에서는 배우자와 자녀들에게 악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용서’는 성도의 삶에 굉장히 중요한 단어입니다. 그리고 성도가 가야 할 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용서에 관해 가르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진심으로 형제들을 서로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실 것이다.”(마태복음 18:35)

하지만 용서에 관해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성경은 무 조건적인 용서에 관해서만 말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만 보면 마치 무조건적으로 무제한적으로 어떤 일이든지 용서하며 살아야 할 것처럼 느껴집니다.

“21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하지만 이 본문은 마태복음 18장 전체의 맥락 속에서 읽혀질 때 의미가 온전하게 밝혀집니다. 마태복음 18:15-18의 본문을 먼저 보겠습니다. “15 어떤 형제가 너에게 잘못한 일이 있거든 단 둘이 만나서 그의 잘못을 타일러 주어라. 그가 말을 들으면 너는 형제 하나를 얻는 셈이다. 16 그러나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라. 그리하여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의 증언을 들어 확정하라는 말씀대로 모든 사실을 밝혀라. 17 그래도 그들의 말을 듣지 않거든 교회에 알리고 교회의 말조차 듣지 않거든 그를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18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도 매여 있을 것이며 땅에서 풀면 하늘에도 풀려 있을 것이다.”

‘잘못한 일’이 있거든 그의 잘못을 타일러 주라고 합니다. 그가 어떤 ‘잘못한 일’을 했는지 알려 주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가 말을 들으면’ 즉, 그가 그 잘못한 일을 깨닫고 인정하고 회개하면 형제로 받아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18장 23절 이하의 ‘용서하지 못하는 종’의 비유에서도 엄청난 빚을 진 종이 왕에게 “26 그랬더니 종이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참아 주십시오. 다 갚겠습니다' 하고 애원하였다. 27 주인은 그 종을 가엾게 여겨서, 그를 놓아주고, 빚을 없애 주었다.” 고 했습니다. 종은 가만히 있는데 왕이 그냥 빚을 탕감해 준 것이 아닙니다. 왕 앞에 무릎을 꿇고, 애원하였을 때 종을 놓아주고, 빚을 없애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엄청난 빚 탕감을 받은 종은 어떻게 행동합니까? 마태복음 18장 28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28 그러나 그 종은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나자, 붙들어서 멱살을 잡고 말하기를 내게 빚진 것을 갚아라 하였다. 29 그 동료는 엎드려 간청하였다.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 30 그러나 그는 들어주려 하지 않고, 가서 그 동료를 감옥에 집어넣고, 빚진 돈을 갚을 때까지 갇혀 있게 하였다.” 어마어마한 빚을 탕감받은 종은 자신이 탕감받은 것의 60만분의 1도 안 되는 정도의 빚을 동료가 엎드려 간청함에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오늘날 우리의 문제가 있습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의 교차 본문인 누가복음 17:3-4에서는 용서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3 조심하여라. 네 형제가 잘못을 저지르거든 꾸짖고 뉘우치거든 용서해 주어라. 4 그가 너에게 하루 일곱 번이나 잘못을 저지른다 해도 그때마다 너에게 와서 잘못했다고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는 ‘잘못했다고 하면’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오해할 수 있습니다만 마태복음 18:15-18의 내용과 18:23절 이하의 말씀에서 추론할 수 있듯이 용서는 가해자의 사과와 회개가 전제되어야 하는 본문입니다.

그러면 왜 오늘 본문과 같이 용서에 관해 강하게 표현하셨을까요? 여기에 오늘날 우리의 문제가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용서해야 할 때 용서하지 않기에 강하게 표현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타인이 죄에 대해 시인하고 사과하고, 책임을 다하면 반드시 용서해 주어야 한다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같은 죄를 범하면서 수도 없이 찾아와도, 그가 진실로 용서를 구하며 회개하면 용서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때로 나에게 죄를 지은 이가, 가해자가 사과하고, 회개하고, 죄에 대한 책임을 져도 용서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에서부터 깨끗하게 타인을 용서하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님은 무한대까지 진실한 용서, 마음에서부터 깨끗하게 타인을 용서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또는 나의 모습에서 용서했다고 하면서도 사실은 용서하지 않은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용서했다고 말은 했지만, 끊임없이 타인의 잘못을 들추고, 원망합니다. 용서는 피해자에 대한 가해자의 인정과 사과 책임이 우선 되어야 합니다. 용서하는 삶이 성도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긴 하지만, 용서하고 있지 못하는 타인이 있더라도, 그 책임은 죄를 인정하지 않고, 용서를 구하지 않고, 책임을 다하지 않은 타인에게 있지, 성도님에게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진실한 용서를 해야 한다는 것과 동시에 성도가 타인에게 죄를 지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본문이기도 합니다. 죄를 시인하고 사과하고 책임을 짐으로써 용서를 구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밀양’이라는 영화를 보면 피해자인 엄마가 자신의 아이를 납치해서 죽인 범인을 용서하기 위해 교도소로 찾아갔을 때 범인은 피해자인 엄마에게 자신은 이미 하나님에게 용서를 구하고 용서를 받아 마음이 편안하다는 말을 전합니다. 그러자 피해자의 엄마는 이런 고백을 합니다.

“나는 새삼스럽게 그를 용서할 필요도 없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어요. 하지만 나보다 누가 먼저 용서합니까? 내가 그를 아직 용서하지 않았는데 어느 누가 먼저 그를 용서하느냔 말이에요.

그의 죄가 나밖에 누구에게서 먼저 용서될 수 있어요? 그럴 권리는 주님에게도 있을 수 없어요. 그런데 주님께선 내게서 그걸 빼앗아 가버리신 거에요. 나는 주님에게 그를 용서할 기회마저 빼앗기고 만 거란 말이에요. 내가 어떻게 다시 그를 용서합니까?” _ <영화 밀양>

타인에게 죄를 지었다면 성도는 하나님에게 용서를 구하기 전에 먼저 피해자에게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어떤 죄를 지었는지 시인하고, 회개하고, 책임을 지는 태도를 통해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용서는 참 어려운 주제입니다. 용서를 하는 것도, 용서를 구하는 것도 어렵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도는 이 땅 가운데 본이 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마음을 다해 용서하는 삶 그리고 용서를 구하는 삶을 살아 가족과 이웃들이 성도님 삶의 모습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만날 수 있게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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