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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절입니다”(고린도후서 5:14-20)
이상중 목사(초도제일교회) | 승인 2023.04.09 22:58
▲ Luca Giordano, 「Resurrection」 (1665) ⓒWikipedia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나요?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나에게 벌어지는 외부의 상황이나 내가 지금까지 이루거나 가진 조건들로 인해 때로 평정심을 잃게 되어, 불안하거나, 두렵거나, 힘들어질 때가 있습니다.

‘내가 지금 두렵구나, 불안하구나.’라는 것을 스스로 알아차리실 수 있다면 그때마다 내 안에 주어진 평안을 찾고, 누리셔야 합니다. “하나님, 지금 제가 두렵습니다. 불안합니다. 평안 누리기를 원합니다. 도와주십시오.”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외부의 상황이 변화되지 않더라도,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또한, 이런 평안 속에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시각으로 나에게 주어진 상황들을 바라볼 수 있게도 됩니다. 그러니 언제나 내 안에 주어진 평안을 선택하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지난 종려주일 말씀을 통해 예수님이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은 당시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 수많은 유대인, 종교지도자, 권력자의 위선과 죄, 어두움이 폭로되는 사건이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이 걸으신 십자가의 길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위선, 죄, 어두움이 폭로되는 사건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빛으로, 삶이 조명될 때 나의 위선, 추악함, 어두움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어두움은 빛을 이길 수 없고, 드러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내 안에 위선, 죄, 추악함, 어두움을 발견함으로써 우리는 우리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습니다.

누가복음 9:23-24 “그리고 예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오려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하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나는, 부활의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성도는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새 삶을 살게 됩니다. 어떤 삶을 살게 되겠습니까?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휘어잡습니다. 우리가 확신하기로는,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으니, 모든 사람이 죽은 셈입니다. 15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신 것은, 이제부터는, 살아 있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들을 위하여 살아가도록 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을 위하여서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그분을 위하여 살아가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16 그러므로 이제부터 우리는 아무도 육신의 잣대로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전에는 우리가 육신의 잣대로 그리스도를 알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17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 것이 되었습니다.”

이 그리스도의 사랑에 휘어 잡힌 대표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도 바울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이들을 잡아들이고 핍박했던 사람입니다. 그런 바울이 어떻게 하나님, 예수님, 복음을 위해 기꺼이 목숨까지 내어놓는 사람이 되었습니까?

바울이 경험한 죽음과 부활 사건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9장의 본문을 읽어드리겠습니다.

“1 사울은 여전히 주님의 제자들을 위협하면서, 살기를 띠고 있었다. 그는 대제사장에게 가서, 2 다마스쿠스에 있는 여러 회당으로 보내는 편지를 써 달라고 하였다. 그는 그 ‘도’를 믿는 사람은 남자나 여자나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묶어서,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려는 것이었다. 3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마스쿠스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에, 갑자기 하늘에서 환한 빛이 그를 둘러 비추었다. 4 그는 땅에 엎어졌다. 그리고 그는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하는 음성을 들었다. 5 그래서 그가 "주님, 누구십니까?” 하고 물으니,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6 일어나서, 성 안으로 들어가거라. 네가 해야 할 일을 일러 줄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는 음성이 들려왔다. 7 그와 동행하는 사람들은 소리는 들었으나, 아무도 보이지는 않으므로, 말을 못하고 멍하게 서 있었다. 8 사울은 땅에서 일어나서 눈을 떴으나,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의 손을 끌고, 다마스쿠스로 데리고 갔다. 9 그는 사흘 동안 앞을 보지 못하는 상태에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다. 10 그런데 다마스쿠스에는 아나니아라는 제자가 있었다. 주님께서 환상 가운데서 “아나니아야!” 하고 부르시니, 아나니아가 “주님,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1 주님께서 아나니아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서 ‘곧은 길’이라 부르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사울이라는 다소 사람을 찾아라. 그는 지금 기도하고 있다. 12 그는 [환상 속에]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손을 얹어 시력을 회복시켜 주는 것을 보았다.” 13 아나니아가 대답하였다. “주님,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성도들에게 얼마나 해를 끼쳤는지를, 나는 많은 사람에게서 들었습니다. 14 그리고 그는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을 잡아 갈 권한을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아 가지고, 여기에 와 있습니다.” 15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가거라, 그는 내 이름을 이방 사람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가지고 갈, 내가 택한 내 그릇이다. 16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할지를, 내가 그에게 보여주려고 한다.” 17 그래서 아나니아가 떠나서, 그 집에 들어가, 사울에게 손을 얹고 “형제 사울이여, 그대가 오는 도중에 그대에게 나타나신 주 예수께서 나를 보내셨소. 그것은 그대가 시력을 회복하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도록 하시려는 것이오” 하고 말하였다. 18 곧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져 나가고, 그는 시력을 회복하였다. 그리고 그는 일어나서 세례를 받고 19 음식을 먹고 힘을 얻었다. 사울은 며칠 동안 다마스쿠스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지냈다.”

예수를 믿는 이들을 핍박하기 위해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 위에서 바울은 예수님을 만납니다. 사흘 동안 시력을 잃고 식음을 전폐하며 지냈습니다. 이 사흘 동안 바울은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아나니아를 통해 눈을 떴을 때 바울은 새로운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것처럼 바울은 “17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 것이 되었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된 바울은 이후에 어떤 삶을 살았습니까? 사도행전 9장의 계속된 내용입니다. “20 그런 다음에 그는 곧 여러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선포하였다. 21 그 말을 듣는 사람들은 다 놀라서 말하였다. “이 사람은, 예루살렘에서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이들을 마구 죽이던, 바로 그 사람이 아닌가? 그가 여기 온 것도, 그들을 잡아서 대제사장들에게로 끌고 가려는 것이 아닌가?” 22 그러나 사울은 더욱 더 능력을 얻어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증명하면서, 다마스쿠스에 사는 유대 사람들을 당황하게 하였다.”

이 일로 인해 사울은 예수님이 겪으신 것처럼 살해 위협을 당하게 되고, 예수님이 당하셨던 것보다 더한 고난의 길을 걷게 됩니다. 고린도후서에 나온 오늘의 말씀과 같이 바울은 살아갔습니다. “18 이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내세우셔서, 우리를 자기와 화해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해의 직분을 맡겨 주셨습니다. 19 곧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죄과를 따지지 않으시고, 화해의 말씀을 우리에게 맡겨 주심으로써, 세상을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와 화해하게 하신 것입니다. 20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시켜서 여러분에게 권고하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리하여 간청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과 화해하십시오.”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절이 되어 세상을 그리스도 안에서 화해하도록 하는 사명을 감당하며 살았습니다. 이 사명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주어졌습니다.

지금은 돌아가신 미국의 흑인 인권 운동가로 알려진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이 있습니다. 차별과 폭력에 저항하며 예수 정신으로 사셨던 목사님은 온갖 살해 위협과 고난 속에 살아가시다가 결국 암살을 당해 생을 마감했습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은 그리스도의 사절로서 불의와 차별로 가득한 세상이 하나님과 화해함으로 평화와 사랑을 되찾을 수 있도록 생명을 바쳐 살았습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이 자신의 생명까지 걸고 정의와 평화, 사랑을 위해 살아갈 수 있었던 이유가 있습니다. 

목사님과 관련된 한 기사를 읽어드리겠습니다.

“특히 1963년 9월 15일 백인폭력단체 KKK단의 교회 폭파로 4명의 흑인 소녀가 사망한 사건은 마틴 루터 킹 목사에게 큰 슬픔을 안겨 주었습니다. 소녀들의 장례식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추모사를 했습니다.

‘때 묻지 않고 아무 죄도 없는 어여쁜 이 아이들이 반인간적이며 사악하고 흉악한 범죄의 희생양이 되었습니다 … 아이들의 죽음은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은 악으로부터 선을 이끌어내는 방법을 알고 계십니다 … 이 아이들의 죽음은 비인간성의 천한 길을 걸어가고 있는 남부를 평화와 형제애라는 숭고한 길로 이끌 것입니다 … 여러분, 죽음은 끝이 아니라는 기독교적 확신으로 위안을 얻으시길 바랍니다. 죽음은 인생이라는 거대한 문장을 끝내는 마침표가 아니라, 보다 숭고한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 찍는 쉼표입니다.’”
- 마틴 루터 킹,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성도로 하여금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확신을 주셨습니다. 이 확신은 보다 숭고한 삶을 향한 용기를 줍니다. 힘을 줍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을 부인하고 흩어졌던 제자들이 결국 예수님처럼 십자가 처형 뿐만 아니라 복음을 위해 죽음을 불사할 수 있었고, 사도 바울도 자신의 생명을 걸고 이 세상을 하나님과 화해시키기 위해 살았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단순히 죽음의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도록 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 육신을 입고 살아가는 동안에 보다 숭고한 삶을 향해 살아가도록 하시려는 놀라운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그렇기에 오늘날 성도도 거룩한 비전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 비전을 향해 살아갈 수 있습니다. 

강남순 교수는 부활절인 오늘 자신의 SNS를 통해 이런 글을 썼습니다.

“‘크리스천’이라고 자신의 정체성을 지닌 이들이 무엇보다도 씨름해야 할 질문이 있다. 예수 부활의 의미를 “육체적 부활”로 받아들이든 또는 “은유”로 받아들이든 상관없다. 무엇보다 중요한 질문은 “그러한 부활 사건의 의미가, 자신의 구체적인 삶에 어떠한 의미로 자리 잡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 부활의 의미를 어떻게 매번 “새롭게 태어나는 자아” 사건으로 만들어 가는가라는 질문이다. “예수의 육체적 부활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면서, 자신의 구체적 삶에서 그 어떤 새로운 태어남의 경험을 만들어내지도 않고, 자신과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들에 대한 혐오, 배제, 폄하의 삶을 산다면, 그 육체적 부활에의 고백은 결국 아무런 의미 없는 공허한 외침일 뿐이다.”

오늘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이 주어졌음을 확인해 주셨습니다. 이 소망을 붙들고 우리가 발붙이고 있는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사절로서 하나님과 세상을 화해시킬 수 있는 성도로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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