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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대에는 차별이 없다소돔의 죄와 환대의 신학(창 19:1-11)
허호익(전 대전신대 교수) | 승인 2023.05.27 02:55
▲ 「The Hospitality of Abraham」 (Icon) ⓒWikimediaCommons
이 설교문은 ‘국제성소수자혐오반대의 날’(5월17일)을 즈음해 새길교회(원장 홍인식 목사)에서 전한 것입니다. 설교문의 게재를 허락해 주신 허호익 교수님께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 편집자 주

오늘은 다소 논쟁적인 주제로 설교를 하는 것이라 조심스럽습니다. 한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저 역시 소돔과 고모라가 동성애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로 멸망했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럽에서는 2000년대 초에 이미 동성결혼을 합법화하고 심지어 영국 성공회에서는 동성애자를 주교로 임명했다는 보도를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동성애에 관한 논문과 책(<동성애는 죄인가>)을 쓰면서 제 자신이 동성애에 대해 무지했고 편견이 있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루터는 대학에 가서 희랍어를 배운 후 희랍어 원어로 신약성경을 읽다가 교회의 가르침과 성서의 가르침이 너무 달라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저 유명한 95개조 반박문 첫 부분에서 “우리 주님께서 회개하라고 가르친 것은 신부에게 고해하라는 교회의 가르침과 다르다”는 주장을 하고 성서로 돌아가자고 외쳤습니다. 고해 제도에 관한 잘못된 가르침이 중세교회의 부폐의 원인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렇다면 동성애 때문에 소돔이 멸망했다는 교회의 가르침이 과연 성서의 증언과 일치하는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소돔 사건을 동성애 사건이라고 처음 주장한 사람은 예수님과 동시대에 살았던 유대철학자 필로(Philo)라고 합니다. 일부 초대교부들도 소돔과 고모라의 동성 간의 성적 문란을 포함시켰고, 이러한 교부들의 가르침을 이어 받아  8세기 영국인 선교사였던 보니페이스(Boniface, 680-755)는 동성 간의 성행위를 소돔이라는 단어에서 유래한 ‘소도미(sodomy)’라 칭했습니다. 1869년에 와서 처음으로 동성애(homosexuality)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이전까지, 거의 1000년 이상  서구에서는 동성애자를 ‘소도마이트(sodomite)’라고 불렀으니, 소돔이 동성애로 멸망했다는 것이 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으로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은 것입니다.

그래서 오래 동안 서구에서는 동성애를 죄로 여겨 처형하기도 했습니다. 동성애자의 인권 문제가 새롭게 제기된 것은 히틀러의 동성애자 대량 학살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적어도 히틀러 치하에서 동성애자들이 2만 명에서 10만 명까지 구금 및 처형되었다고 합니다. 히틀러는 유대인이 동성애를 퍼트리고 있으니 유대인과 동성애자는 제국의 적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에게는 노란색 다윗의 별을 달게 하고 동성애자에게는 핑크색 별을 달게 했습니다. 전후에 단지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학살하는 것은 인권 침해라는 여러 권리 장전이 나오면서, 유대인들의 학살인 홀로코스트를 기념하듯 동성애자들의 학살인 ‘핑크 홀로코스트’를 기념하는 행사들이 열리기도 했습니다.

1970년대를 전후하여 동성애자들에 대한 인권과 차별 금지에 관한 여론이 확산되면서, 소돔 사건을 재조명하는 연구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먼저 왜 소돔 이야기가 동성애 사건으로 해석되었는지를 분석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는 소돔 사람들이 롯의 집을 방문한 낯선 두 남자(또는 천사)를 두고 “우리가 그들을 상관(yadha)하리라(5절)”고 롯에게 요구하였다고 합니다. 본문의 ‘상관’이라는 단어의 원어 ‘야다’(yadha)는 문자적으로 ‘알다, 상관하다’라는 뜻이지만, ‘성 관계의 완곡한 표현’으로도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소돔 남자들이 롯의 집 앞에 모여들어 낯선 남자들과 상관하겠다도 한 것을 성관계 즉 동성애 관계로 해석한 것입니다. 그러나 베일리(D. S. Bailey) 등 여러 학자들은 구약성경에 ‘야다’라는 단어가 총 948회 나오는데, 그중에서 성관계를 의미하는 경우는 약 10회 정도밖에 나오지 않으며, 더구나 이중에서 동성 간의 성관계를 의미하는 단어로는 한 번도 사용되지 않았다고 단언합니다.

‘야다’를 성관계로 해석하게 된 또 다른 근거는 “그들과 상관하리라”고 한 소돔 사람들의 요구에 롯은 “이것 보게, 나에게 남자를 ‘알지’(야다) 못하는 두 딸이 있네. 그 아이들을 자네들에게 줄 터이니, 그 아이들을 자네들 좋을 대로 하게.”라고 대응한 것이 성적인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왜 소돔 주민들의 행패에 대해 롯이 자신의 딸들을 대신 내어 준 것일까요? 창세기 12장에는 실제로 아브라함이 이집트로 내려갔을 때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고 바로 왕에게 보낸 것은, 자신을 죽이고 아내를 차지할 까 두려워서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시의 가부장적인 문화에서는 여성을 인격의 주체로 보기보다는 남편이나 아버지의 소유로 보았기 때문에, 아내나 딸을 내어 주고 자신의 안위를 챙기는 것을 당연히 여겼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롯의 경우는 “이 남자들은 나의 집에 보호받으러 온 손님들이니까, 그들에게는 아무 일도 저지르지 말게.”라는 호소한 것으로 보아 자신이나 자신의 두 딸 보다 나그네를 먼저 보호하려는 신념이 훨씬 강한 동기였다는 점을 많은 학자들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상관하다’를 성적의 의미가 아니라 남의 일이나 낯선 일에 상관하기 좋아하지만 외부인에게는 적대적인이었던 당대의 소돔 사람들의 정황에서 해석해 보면 소돔 사건의 실체가 새롭게 해석될 수 있습니다. 이른 아침 소돔 성을 방문한 낯선 나그네 두 사람을 롯이 자신의 집으로 초대합니다. 그 현장을 목격한 사람들에 의해 그 소문은 모든 마을 사람의 관심거리로 퍼졌을 것입니다. 그날 저녁 낯선 외부인에 대한 호기심이 많았던 소돔 마을의 사람들이 롯의 집 앞에 모여 들어 “오늘 밤에 당신의 집에 온 그 남자들이 어디에 있소? 그들을 우리에게로 데리고 나오시오. 우리가 그 남자들과 상관 좀 해야 하겠소.”라고 요구합니다.

소돔 사람들로서는 자기네 땅에 거류민으로 살아가는 롯의 집을 방문한 ‘낯선 이방인의 정체에 대해 알고 싶은 배타적 호기심과 텃세가 발동하여 밤늦게까지 행패를 부린 것이 소돔 사건의 실체라고 해석할 여지가 많은 이유입니다. 지금도 시골 조그만 마을에서는 여전히 낯선 손님은 마을 사람 모두의 관심거리가 되곤 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귀농 · 귀촌 가구 17%가 원주민의 지나친 관심에서 비롯된 간섭과 텃세 등으로 인해 다시 도시로 돌아갔다는 통계가 있을 정도이기 때문입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는 그의 저서 <환대에 대하여>를 통해 고대 세계에서 이방인에 대한 환대를 거부한 사례들을 집중적으로 분석합니다. 고대적 관점에서 특정 정치공동체에 들어온 소통 불가능한 익명의 낯선 방문자는 외국인 혹은 이방인(xenos)이 아니라, 야만인(barbaros)으로 여겨 환대를 거부했다고 합니다.

데리다는 성서에 나오는 소돔 사건을 ‘무조건적인 환대의 사례’로 제시하였습니다. 그는 당시 유대인들의 ‘환대의 관습’에 따르면 자신의 근친이나 가족이나 딸과 관련된 윤리적 의무보다 나그네의 환대와 보호를 더욱 중요하게 여겼다고 합니다. 그래서 롯 자신도 소돔인들의 지방에 체류하기 위해 온 이방인 거류민이지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기 집에 묵고 있는 낯선 손님들을 보호하려는 일념으로 그는 가장으로서, 전권을 가진 아버지로서 소돔의 남자들에게 처녀인 두 딸을 제의했다고 설명합니다. 데리다의 이런 분석을 통해 롯의 ‘자신의 손해를 감수하는’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환대’와 소돔 사람들의 ‘적대와 학대’가 극명하게 드러난다고 하였습니다.

본문을 더욱 집중하여 분석한 결과 소돔 이야기를 동성애 사건으로 해석하기에는 무리한 점이 아주 많다는 것도 밝혀졌습니다. 첫째로, 본문에는 “소돔 성 각 마을에서, 젊은이 노인 할 것 없이 모든 남자가 몰려와서, 그 집을 둘러쌌고,” 롯의 집을 방문한 두 남성과 ‘상관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의 요구를 성관계 즉, 동성애 요구로 해석한다면, 소돔 남자들이 노소막론하고 모두 동성애자들이었다고 추정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린이를 포함한 인근 마을 남자 모두가 집단적으로 2명의 낯선 남자에게 공개적으로 집단적인 동성애를 요구한 것이 되는데, 납득하기 어려운 정황이라는 반론이 충분히 가능하게 됩니다.

둘째로, 소돔 남자들이 낯선 남자 둘에게 ‘상관’하자고 요구한 것이 성관계 즉, 동성애의 요구라면, 동성애자들인 소돔 남자들에게 이성(異性)인 롯의 딸들이 성적 대상으로서 대안이 될 수 없다는 반론도 제기되었습니다. 배타적 동성애자들에게는 이성(異性)은 성적 대상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동성애 요구에는 동성(同姓)이 제공되어야 하기 때문에 롯의 딸들은 대안이 될 수 없다는 것이지요.

셋째로, 소돔 사건을 좀 더 자세히 분석해 보면 실제로는 상관하겠다는 요구만 있었고, 롯의 거절과 딸들을 대신 내어 주겠다는 대안을 제시하자, 소돔 사람들이 롯의 집 대문을 부수려고 하였고, 그 두 사람이 소돔 남자들의 눈을 어둡게 하여 대문을 찾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롯의 가족을 소돔에서 떠나도록 도웁니다. 더 이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전통적인 주장처럼 ‘상관하리라’는 단어를 동성애적인 의미로 해석하더라도, 소돔 사건은 ‘동성애를 행한 죄’가 아닙니다. 엄밀히 말하면 ‘동성애를 요구했다가 불발한 사건’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학자들은 본문의 전후 문맥과 핵심 교훈에 대한 분석을 시도하다가 중요한 사실을 새롭게 발견했습니다. 롯이 두 나그네를 환대한 소돔 이야기는 창세기 18장의 아브라함이 세 명의 나그네를 환대한 사건과 이어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브라함의 환대를 받은 천사들이 소돔을 향해 떠나면서 아브라함에게 “다음 해 이맘 때에, 내가 반드시 너를 다시 찾아오겠다. 그 때에 너의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며.”(창 18:10), 아브라함은 반드시 크고 강한 나라를 이룰 것이라는 약속을 합니다.

그리고 소돔의 죄가 커서 심판을 면하기 어렵다고 예고합니다. 아브라함은 소돔에 의인 50명만 있으며 멸하지 말아 달라고 간청합니다만, 여러 번 흥정 끝에 소돔은 의인 열 명이 없어 멸망할 것이라고 암시합니다(20-33절). 소돔은 동성애가 아니라 의인 열 명이 없어서 멸망한 것이라는 것이 창세기 18장에서 분명히 확인 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소돔 사건을 동성애로 해석한 유대 철학자 필로와 달리, 예수께서는 소돔의 죄에 대하여 ‘나그네를 학대하지 말라’(출 22:21 등)는 계명을 어기고, 제자들을 영접하지 않는 ‘냉대와 냉담의 죄’(마 10:5-15)로 이해하였습니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택하여 부르시고 그들을 양육하고 파송하면서, ‘어떤 성이나 마을’에서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 하는’ 등, ‘너희를 냉대하거나 복음에 냉담한 성이나 마을이나 집’이 있다면, 그들은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창세기 18장에는 낯선 나그네들을 귀한 손님으로 모시어 환대의 밥상을 대접하고 있는 아브라함의 모습을 통해서 ‘환대의 일곱 가지 특징’이 구체적으로 드러난다는 사실도 확인되었습니다.

① 아브라함이 낯선 나그네를 먼저 알아봅니다.
② 아브라함이 즉시 달려가 그들에게 환대의 인사를 합니다.
③ 아브라함이 그들을 자신의 집으로 기꺼이 초청합니다.
④ 아브라함이 우선 마실 물과 발 씻을 물을 그들에게 제공합니다.
⑤ 아브라함이 그들을 자신의 집에서 편히 쉬게 합니다.
⑥ 아브라함이 그들에게 음식과 음료를 대접합니다.
⑦ 아브라함이 손님들의 여정을 지연시키지 않겠다고 약속합니다.

이어서 창세기 19장에 나오는 롯의 환대는 창세기 18장의 그의 삼촌 아브라함이 낯선 나그네에게 베푼 환대를 상기시킵니다.

① 롯은 낯선 나그네를  먼저 알아보고 일어나 영접하고 땅에 엎드려 절합니다.
② 롯은 그들에게 공손히 환대의 인사를 합니다.
③ 롯은 그들을 자신의 집으로 초청합니다.
④ 롯은 발 씻을 물을 그들에게 제공합니다.
⑤ 롯이 그들에게 식탁을 베풀고 무교병을 대접합니다.
⑥ 롯은 손님들의 여정을 지연시키지 않겠다고 약속합니다.

창세기 18장의 아브라함의 환대 이야기와 달리, 19장에는 ‘롯의 나그네 환대’와 극명하게 대조되는 것으로 ‘소돔 사람들의 나그네 학대’가 자세히 묘사되어 있습니다. 소돔 사람들은 롯에게 나그네를 이끌어 내라고 요구하고, 악행을 그만 두라고 만류하는 롯에게 너를 더 해치겠다고 협박하고, 롯을 밀치고, 문을 부수고, 마침내 롯의 가족 모두를 성 밖으로 도망가게 만듭니다.

지프(Joshua W. Jipp)라는 신학자는 <환대와 구원>이라는 책에서 창세기 19장의 소돔이야기는 전후 문맥으로 볼 때 ‘성적 일탈’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그네를 환대하면 구원을 받고, 학대하면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는 ‘환대’에 대한 교훈이라고 결론지었습니다. 친절한 아브라함은 나그네를 환대하여 노년에 아들을 얻는 축복을 약속받았고, 그의 조카 롯은 같은 나그네에게 환대를 베풀었기 때문에 자기 가족과 함께 구원을 받았지만(19:12-17), 반면에 나그네를 학대한 소돔은 의인 열 명이 없어서(18:32), 유황불로 ‘멸하셨다’(19:24-25)는 것이 이 두 사건의 교훈이라는 것입니다.

지프는 ‘나그네를 학대하지 말고 환대하라’(출 22:21 등)는 수많은 ‘환대법’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음을 자세히 제시하면서 하나님은 환대의 하나님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낯선 사람들을 초청하여 대접하는 아브라함과 롯의 모습은 아무런 생각 없이 무조건적으로 환대하는 것이 아니라, 낯선 그들을 하나님의 선물로 여기고서 그들에게 신적인 환대로 지극정성으로 섬기고 봉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그의 조카 롯은 환대의 밥상으로 낯설고 생소한 사람들을 하나님을 섬기듯 섬기고 봉사한 것이었으니, 이는 결국 하나님을 섬기며 봉사한 결과가 된 것입니다. 이러한 성서적 배경으로부터 ‘신적 환대’라는 신학적 개념이 발전하였고, “환대의 신학”이 새롭게 대두되었습니다.

지프는 신약성서로 눈을 돌려 “예수의 사역은 주 하나님의 환대의 시행”이라는 관점에서 재조명합니다. 특별히 예수의 죄인과의 식탁 교제를 무차별적 환대의 사역으로 해석합니다. 예수는 심지어 당시 정치적으로 가장 죄인 취급받는 세리나 율법적으로 가장 죄인으로 취급 받는 창녀가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마 21:31)고 선언하여 바리새인들을 분노하게 하였습니다. 이런 예수라면 오늘 날 죄인으로 취급 받는 성소수자들도 차별 없이 환대했을 것이라는 가정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가 급속도로 발전하여 나간 이면에도 환대의 신앙이 있었기에 가능했으며, 여행자와 나그네에 대해 식사와 숙소를 제공하는 환대의 공동체’로서 자리매김했다는 주장입니다.

쾨니그(J. Koenig)라는 또 다른 신학자는 <환대의 신학>이라서 저서에서 비슷한 주장합니다. 무엇보다는 예수는 제자들이 전도 과정에서 환대를 받지 못하는 적대적 환경에 있는 것을 보고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마 10:4)고 한 것에 주목합니다. 하나님을 영접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환대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환대하는 자는 예수를 환대할 것이고, 예수를 환대하는 사람은 이웃을 환대해야 한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율법의 골자는 ‘하나님을 영접하고 이웃을 환대하라’는 의미로 재해석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은, “차별받는 낯선이들을 환대하라”는 뜻으로 수용합니다. 바울은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다”(골 3:11)고 했으니, 기독교는 긴 역사를 통해서 끊임없이 민족 차별, 인종차별, 노예차별, 남녀 차별 등 모든 종류의 차별 철폐를 과감히 실천하여 온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교회 주류는 최근 27개 항목의 차별금지법 중에 성소수자가 포함되어 있다고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현실입니다.

창세기는 소돔이 의인 열 명이 없어서 멸망했다고 밝혔고, 예수께서도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 원인이 낯선 나그네를 냉대하고 환대하지 않은 것(마 10:11-15)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보수적인 신앙인들은, 1세기 유대철학자 필로(Philo)가 소돔이 동성애 때문에 멸망했다는 잘못된 가르침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여, “동성애 때문에 가정도 교회도 나라도 망한다.”는 잘못된 프레임에 갇혀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무차별적 환대와 무차별적 사랑’을 가르쳤는데, 많은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배타적 차별과 적대적 혐오’를 가정과 교회와 나라를 지키는 지상 과제인 것처럼 외치고 있습니다. 루터가 깨달은 것처럼 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이 성서의 가르침과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우리 모두가 새롭게 깨달았으면 좋겠습니다. 항상 개혁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다시 성서로 돌아가서, 성서의 가르침을 통해 새 길을 찾는 ‘새길교회’가 한국교회를 성서가 인도하는 ‘새 길’로 선도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허호익(전 대전신대 교수)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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