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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을 넘어선 욕망생명의 성령의 법(에스겔 20,21-26; 갈라디아서 5,16-26)
이경훈 목사(백합교회) | 승인 2023.06.01 00:00
▲ 법은 욕망을 정죄하지만 성령은 욕망을 넘어선다. ⓒGetty Images

오늘 신약 본문에서 바울은 율법과 성령을 서로 대립시키고 우리가 성령의 인도를 따른다면 율법 아래 있지 않다고, 더 이상 율법의 종이 아니라고 말하지만 그렇게 성령의 인도를 따른 삶의 결과는 율법이 본래 요구하는 내용과 결코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율법 안에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여기 바울이 말하는 것처럼 사랑과 평화와 자비와 진실과 절제이고, 타인을 자기 이익을 위한 도구로 만들고 수단화하려는 욕망과 싸우는 것에 다르지 않습니다.(5,13)

따라서 이는 바울이 비판하고 있는 율법이란 것과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 또는 법 자체라고 할 수 있는 그것, 이 양자 사이에 큰 간격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 아닐까요? 다시 말해, 쉽게 생각해 볼 수 있듯이 우리가 당연히 법에 대해 기대하는 것은 정의와 공평입니다. 이런 법의 목표를 법 자체라고 부른다면, 우리가 실제로 경험하게 되는 실정법이나 법의 집행은 이런 법 자체와 큰 간격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바울이 비판하고 거부하는 대상은, 법 자체가 아니라 법 자체와 어긋나 있는 법, 정의의 요구를 담아내지 못하는 그런 법이 아니었을까요?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을 유대교의 전통, 특히 할례 관습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려고 온 힘을 다했습니다. 그 때문에 박해도 감수했다고 바울은 적습니다(5,11). 할례는 그저 하나의 전통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과 율법을 상징하고 유대인의 정체성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를 받아들인 유대인들이 여전히 그 전통을 고수하면서 동시에 비유대인들, 이방인들에게도 그것을 강요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단지 종교적인 굴레를 씌우는 차원만이 아니라, 인간을 억압하는 모든 것이 그 안에 응축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를 가로지르고 있던 분리장벽을 허물고, 모든 사람, 모든 생명을 하나님 앞에 동등한 존재로 세웠습니다. 하나님이 율법 안에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바를 보여주고 그것을 이뤄 냈습니다.

그것은 로마라는 거대한 제국의 억압적 질서 한가운데 철저히 새로운 사회와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는 사건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렇게 예수 안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법 그 자체와 유대인들이 동일하게 하나님의 법이라는 이름으로 고수하고 있는 전통 사이의 큰 괴리를 보았던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바울은 갈라디아서의 다른 곳에서 “율법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고 정의를 세우는 것”이지만, 불행히도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고 지적한 것으로 보입니다(3,21-22).

그러나 이러한 바울의 인식이 그만의 것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구약과 신약 본문을 잘 이해할 수 있는 사회 상황 속에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불행히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법질서 안에서 정의와 공평과 생명 살림을 기대하지만, 너무도 오랫동안 법은 우리의 그런 기대를 저버려 왔습니다.

수많은 무고한 이들이 합법의 이름으로, 정의의 이름으로 죽임을 당하고 고통을 받았고 여전히 수많이 이들이 그 고통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예수 당시의 법이 예수를 죽였듯이, 오늘날도 법이 그 본래의 목적을 거부하고 권력과 이익 유지의 도구가 되어 죽음을 양산해 왔다고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법의 현실은 결코 우리를 법의 무용함이나 폐기라는 결론에 이르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지금의 법 그 너머를 바라보게 하고, 우리의 법이 진정한 정의와 일치할 수 있도록 우리로 하여금 요구하고 외치게 만듭니다. 또한 그런 우리의 요구와 열망이 서서히 관철되어 온 것이 우리의 역사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결코 역사를 거슬러 전에 정의를 담아내는 데 실패했던 법으로, 사회로 되돌아갈 수 없습니다. 바울도 역시 예수를 처형했으며, 지금 이방인들을 차별하고 배제하는 수단으로 남아 있는 율법과 전통을 결코 인정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바울은 온갖 모진 시련과 박해 속에서도 바울은 온 힘을 다해 그 복음을 지키며, 하나님의 역사를 향해 나아가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그가 거부하는 율법의 자리에 성령을 놓습니다. 이 성령 아래, 성령의 인도에 따라 우리의 삶은 사랑과 평화와 자비와 정의와 선을 낳고, 따라서 다름 아닌 법이 요구하는 바를, 하나님이 율법 안에서 진정 요구하시는 뜻을 이루게 될 것이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인도에 따른다는 것은 어떤 기이하고 비밀스러운 현상이 아니라 이처럼 율법의 진정한 요구를 깨닫고, 우리 인간의 여전한 한계 속에서도 그 뜻을 향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희망과 힘을 발견하는 일일 것입니다. 우리의 한계에 좌절하지 않고 그 한계 너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이루어진 참된 정의와 평화의 세계를 꿈꾸며 그 세계를 향해 하루하루 달음질하는 용기일 것입니다.

우리는 에스겔서에서도 이와 다르지 않은 것을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본문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회고하는 긴 이야기의 일부입니다. 여기 야훼의 말씀은 이스라엘의 배반과 모독의 역사에 대한 야훼의 분노와 당혹스러움과 항변을 담고 있습니다. 야훼는 실천하면 살 수 있는 생명의 법을 이스라엘에게 주었지만, 이스라엘은 야훼가 주신 생명의 법을 죽임의 법으로 뒤바꾸었습니다.

또한 18절에서 말하듯이 야훼의 법 위에 조상들의 법을 더해 야훼의 법을 가리고 굽히고 거부했습니다. 야훼는 그것이 이스라엘의 역사이므로 그 역사를 돌이키지 않고서는 이스라엘의 어떤 요구도 들어줄 수 없다고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야훼의 거부는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회고함으로 이스라엘이 과거를 반성하고, 현재를 그 과거를 극복하고 새로운 미래를 시작하는 계기로 삼도록 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새로운 역사를 시작할 수 있는 동력은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그 동력은 배반과 모독으로 일관한 이스라엘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그 곁에서 구원의 역사를 계속 이끌어 오신 야훼의 자비와 은총이고, 그런 야훼에 대한 응답으로서 생명의 법을 따르는 것입니다.

성서가 역사를 살림의 법과 죽임의 법이, 야훼의 법과 조상들의 법이 싸우는 전장으로 이해한 것처럼, 오늘날의 역사도 여전히 그런 싸움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앞으로도 우리의 역사는 이스라엘의 역사처럼 많은 반동과 부침을 거듭할지 모릅니다. 온전한 정의와 평화의 나라는 먼 미래의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그 나라를 보았으며, 성령의 능력 안에서 이미 하루하루 여기서 그 나라를 살고 있음을 믿습니다.

바울이 암울한 법적 현실 가운데서도 그 현실에 굴하지 않고, 그 너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이루어진 하느님의 법 가운데 머물며 그 뜻을 오늘 여기서 이루기 위해 달음질쳤듯이 우리 또한 그럴 수 있기를 간절히 빕니다. 성령이 연약한 우리 안에서 일하시고, 성령의 능력으로 그 뜻을 더 크게 이루시기를 간절히 빕니다.

이경훈 목사(백합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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