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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렵다고 센 척할 필요 없다감정을 포용하는 신앙 1(로마서 8:31. 요한1서 4:18)
김현주 목사(한성교회) | 승인 2023.06.13 00:14
▲ 두려움에 사로잡힐 때와 스트레스를 받을 때 우리의 뇌의 작용은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로마서 8: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요한1서 4: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주일예배에 참여하신 한성교회 모든 성도 여러분을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지금 여기 나 있는 곳에 함께 계신 우리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믿음의 확신, 소망의 열정, 사랑의 신비를 가득 부어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원합니다.

저는 앞으로 7주간 ‘감정을 포용하는 신앙’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전하려 합니다. 신앙의 성숙은 정서적 성숙을 포괄합니다. 이런 분들 있지 않나요? 믿음은 좋은데 그리 행복해 보이지 않는 분, 믿음생활에는 적극적이긴 한 것 같은데 가까이하기에는 왠지 거북스럽고 불편한 분, 꽤 오래 믿은 것 같은데도 삶에는 그리 큰 변화가 없거나 정체된 분들 말입니다.

왜 그럴까요? 기독교 신앙에 대한 지적 이해는 깊어지고 믿음의 연륜은 쌓여가는데, 그것이 실제 인격의 성숙과 성숙한 생활신앙로 이어지지 못하는 까닭이 무엇일까요? 우리 내면의 정서적 측면, 정서적 차원을 간과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감정적으로 미성숙하면, 달리 말하자면 신앙에 기초해 감정을 다루는 데 서툴고 미숙하면 신앙적으로도 성숙하다 말할 수 없습니다. 건강한 신앙은 건강한 정서를 포괄하고, 신앙의 성숙은 정서적 성숙을 포괄합니다.

신앙생활이 형식적이고 표면적인 수준에 그치는 건 신앙으로 자기 내면의 문제들을 깊이 탐색하지 않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늘 괴로워하면서도 정작 그 괴로움들의 실체인 분노, 두려움, 외로움, 슬픔 같은 감정들을 무시하고 그것을 신앙적으로 진지하게 다루지 않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정서적 괴로움의 근본 원인으로 작용하는 과거의 아픈 기억들, 그 기억들의 영향력을 무시하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내적 갈등, 상처, 약점 같은 것들을 드러내는 게 아니라 가리는 데만 힘쓰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감정을 포용하는 신앙’이라는 주제는 반복적으로 깊이 숙고해 볼만한 가치가 있는 주제일 것입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시간으로 ‘두렵다고 센 척할 필요 없다’ 라는 제목으로 은혜 나누겠습니다.

오늘 다루려고 하는 감정은 두려움입니다. 두려움은 우리 삶에 가장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 가장 억압된 감정이기도 합니다. 어린아이일 때 흔하게 썼던 ‘무섭다’, ‘겁난다’는 말들을 어른들의 입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자라면서 이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입니까?

그렇지는 않지요. 자기감정을 솔직하게 직시하고 세심하게 살피기 시작하면 진실은 정반대라는 사실을 쉽게 알아챌 수 있습니다. 두려움은 하루 하루 전쟁과 같은 우리 삶 곳곳에 그 마수를 펼치고 있지 않습니까? 물론 여기서 말하는 두려움이란 절벽을 마주했을 때 나타나는 순간적 공포를 말하는 게 아니라 심리내적 동인에 의한 두려움을 말합니다.

이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뭔가를 손에 넣고도 항상 불충분하다고 느끼고, 뭔가를 성취하고도 여전히 부족하다고 느끼며, 끊임없이 남들과 비교하며 질투심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이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때로 완벽주의적 성향을 보이기도 하고, 자신이나 타인에 대해 가혹하다 못해 잔혹한 비판과 비난을 쏟아붓기도 합니다. 이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늘 분주하고, 이것 저것 바쁘게 하는 일은 많은데 지루하고 헛헛한 느낌에 사로잡힐 때가 많습니다. 이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정처없이 방랑하기도 하고 별 것 아닌 것들에 집착하기도 합니다.

실상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두려움에 대한 표현을 기피하는 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나요? 우선, 이 사회가 두려움을 잘 용인하지 않습니다. 이 사회가 바라고 요구하는 인간상은 어떻습니까? 강하고 능력있고 독립적이고 자율적이고 경쟁력 있는 사람입니다. 두려워하며 주저하는 사람이 아니라 적극적이고 진취적이고 능동적인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회에서 살아남고 성공하려면 두려움을 드러내기보다 오히려 잘 감춰야 합니다. 소위 말해 센 척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닐텐데 우리는 그 두려움을 어떤 방식으로 처리할까요? 임상심리학자인 로버트 마우어 박사는 현대인들이 두려움이라는 말 대신에 스트레스라는 말을 즐겨 사용한다고 지적한 바가 있습니다. 이것은 현대인들이 두려움을 주로 스트레스로 치환하여 받아들인다는 의미입니다. 마우어 박사는 스트레스를 받을 때의 신체 반응 상태와 두려운 감정이 일어났을 때의 신체 반응 상태에 큰 차이가 없다는 점을 그 근거로 제시합니다.

예를 들면, 둘 다 편도체가 활성화된 상태입니다. 편도체는 위험 요소를 파악하고 싸울 것인가 도망할 것인가를 판단하여 발빠른 행동을 이끌어내는 역할을 하는 뇌의 영역입니다. 이 편도체의 신경 시스템이 활성화된 채 오래 지속되면 그것이 우리에게는 스트레스로 경험됩니다. 스트레스가 곧 두려움은 아니지만 두려움을 스트레스로 받아들이고 스트레스로 표현하는 게 현대인들의 특징이라는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런데 두려움을 스트레스로 간주하고 처리할 때 흔히 발생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스트레스 유발 상황과 환경에만 주의를 기울이기 쉽다는 게 그것입니다. 스트레스 상황에서 우리는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외적 대상을 회피하거나, 스트레스를 주는 과제들을 해결하는 데만 신경을 곤두세울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정말로 중요한 건 스트레스 이면에 작용하는 두려움을 다루는 일입니다. 스트레스가 아니라 두려움에 주목하기 시작하면, 두려움 그 자체를 어떻게 진정시키고, 어떻게 잘 처리할 수 있을지에 주의를 기울이고 힘을 쏟을 수 있게 됩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저도 설교를 준비할 때 간혹 이게 스트레스가 될 때가 있습니다. 설교 준비가 스트레스가 되는 때를 가만히 정직하게 성찰해 보면 그 이면에 두려움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어떤 두려움이요? ‘본문을 잘못 고른 것 같은데, 잘 완결지을 수 있을까? 제대로 완결짓지 못하면 어떡하지? 이렇게 이야기를 전개하면 성도들이 수용하기 어려울 것 같은데? 이거 너무 뻔한 소리를 쓸 데 없이 하나?’

이런 생각들과 함께 실패에 대한 두려움, 성도들을 실망시킬지 모른다는 두려움, 무능하게 보일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일어난 것이지요. 그러면 저는 그 두려움의 문제를 다루는 데 먼저 집중합니다. 스트레스를 준다고 생각하는 설교 준비에 짜증을 내거나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대충 마무리하는 건 핵심을 비켜간 대응법이니까요. 핵심은 두려움에 있으니 그 두려움의 문제를 직접 다루어야 스트레스를 극복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우리는 스트레스를 일으킨 외부 상황과 환경에만 신경을 쓰느라 정작 그 이면에 작용하는 두려움의 문제를 놓치고 살 때가 많습니다. 헨리 나우웬은 하나님 없이 사는 이 세상이 우리를 통제하고 지배하는 방식을 통찰한 바 있습니다. 그 방식이란 건 끊임없이 두려움을 양산하는 질문들을 제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두려워하는 대상에 예속당하기 쉬우니까요.

예를 들면, 이런 질문들입니다. ‘직장에서 밀려나거나 해고를 당하면 어떡하지? 결혼생활에 실패하면 어떡하지? 큰 사고를 당하거나 병이 들면 어쩌지? 이 험한 세상 자녀를 어떻게 잘 키우지? 성공할 수 있을까? 좋은 평판과 이미지를 계속 유지할 수 있을까? 노후 준비는 어떻게 하나?’

지극히 현실적인 질문들입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별다른 문제 의식 없이 지나칠 정도로 반복하는 질문들입니다. 이미 직장생활 성실하게 잘 하고 있는데, ‘직정에서 밀려나거나 해고당하면 어떡하지?’ 계속 이런 질문에 사로잡히니 직장생활이 보람이 아니라 고역이 되고 스트레스가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더 나아가 직장의 노예가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미 자녀 키우는 데 총력을 기울여 수고하는 데도, ‘이 험한 세상 내 자녀를 어떻게 잘 키우지?’ 계속 이런 질문에 사로잡히니 자녀 키우는 일이 행복이 아니라 때로 스트레스가 되는 것 아닐까요? 더 나아가 각종 사교육 시장의 노예가 되는 것 아닐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즘 어떤 스트레스에 시달리는지 확인해 보십시오. 그리고 그 스트레스의 이면에 과연 어떤 두려움이 작용하고 있는지도 확인해 보십시오. 그 두려움들을 강화시키는 마음속 질문들은 무엇인지도 확인해 보십시오. 스트레스를 이렇게 두려움으로 재명명할 수 있어야 두려움을 다룰 기회가 열리고 그 두려움을 극복하는 길을 찾게 되는 법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로버트 마우어 박사는 일, 건강, 인간관계 분야에서 성공적인 삶을 살아낸 사람들에 대한 추적 조사를 통해서 놀라운 사실 하나를 밝혀냈습니다. 소위 말해 좋은 삶을 영위하고 있는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두려움에 솔직하고 자기 두려움을 오픈하는 것을 꺼려하지 않으며 두려움의 문제를 매우 진지하게 다루며 그 두려움에 지혜롭게 잘 대응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의 저서, “두려움의 재발견”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을 찾고 두려움을 통해 하나님을 깊게 만나고 체험한 사람들의 이야기들로 가득합니다. 두려움만큼이나 하나님께로 주의와 시선을 전향하라는 강력한 사인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임재하시는 이야기들로 가득합니다.

성서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성경에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이 무려 366번 등장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두려움이 강력하고도 파괴적인 힘으로 우리 삶 곳곳에 만연해 있다는 것을 방증하기도 하지만, 두려움으로 가득찬 우리 삶 구석구석에 하나님을 영접할 기회 역시 차고 넘친다는 것을 확증해 주기도 합니다.

우리가 두려움을 하나님께 주의를 기울이라는 신호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두려움이 우리의 불완전함과 유한성을 자각하고 수용할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두려움이 완전하시고 무한하신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고, 하나님을 의지할 명백한 이유를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두려워하는 자기 자신을 직시하고 그 두려움을 억압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드러내며 하나님을 의식할 때에라야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그 두려움을 매개로 우리에게 나타나시고 우리를 당신에게로 더 가까이 인도하십니다.

그러나 반대로 두려움을 억압해서라도 자기 강함이나 자기 완전성을 주장하거나 입증해 보이는 데만 관심을 기울인다면, 두려움은 만성 불안 장애가 되고, 만성 스트레스가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애써 부정하거나 하나님께 불평만 늘어놓는 미성숙한 신앙에 고착될 수가 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에서의 모습이 딱 그랬습니다.

그들은 사실 광야생활 내내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을 것입니다. 당연한 일이죠. 광야는 우리의 가장 근원적인 두려움들을 촉발시키는 곳이니까요. 무엇 하나 제대로 통제할 수 없는 현실, 한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상황, 확인할 수 있는 것 하나 없는 불확실한 미래, 그런 현실과 상황 한복판에 있지만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자신, 이것들이 촉발하는 두려움을 스스로 이길 장사가 어디 있겠습니까?

문제는 그런 두려움을 알아차리고 주의를 기울여 직시하고 신앙적으로 다루지 않는 데 있습니다. 출애굽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려움에 압도당할까 두려웠던 것인지 갖가지 두려움들을 억압하고 그 두려움들을 분노와 불평으로 치환하여 처리했습니다. 그들은 광야생활 내내 모세를 향해 ‘왜 우리를 이렇게 곤경에 빠뜨렸느냐’ 불평했습니다. ‘애굽에 있었으면 우리가 알아서 잘 살았을텐데, 왜 우리를 광야로 내몰아서 이렇게 비참하게 만들었느냐?’ 불평했습니다.

애굽의 노예로 고통받았을 때는 울부짖기라도 했는데, 광야생활에서는 센 척만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불평의 이면에는 불신앙적 매커니즘이 작용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온전히 수용하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삶을 거부하고 자기 능력과 강함과 노력에 근거해 주인 노릇, 왕 노릇 하는 삶을 욕망하는 마음의 성향 말입니다.

만약에 이들이 두려움을 불평과 불신앙으로 치환하지 않고, 두려움을 신호 삼아 하나님께 주의를 기울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 더 깊이 머물며,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 더 깊이 참여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두려움에 얽매이지 않고, 두려움을 유발하는 상황들에 굴복되지 않으며, 하나님이 이끄시는 더 나은 삶, 하나님 나라의 삶으로 전진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갈렙과 여호수아처럼 말입니다.

민수기 13장, 14장에는 하나님의 명을 따라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대표하는 이들 12명이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와 보고하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정탐한 자들 중 열 사람은 광야생활에서보다 더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이렇게 불평했습니다. “우리 가나안 땅에 절대 못 들어갑니다. 이미 터 잡고 살고 있는 이방민족들은 우리보다 훨씬 크고 강합니다. 우리 그 사람들 절대 못 이깁니다. 어디서 이런 말도 안 되는 땅에 들어가 살라고 우리에게 강요합니까?” 두려움에 사로잡힌 말을 쏟아내면서도 정작 이들의 이 불평속에 두려움이란 단어는 한 마디도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함께 정탐한 자들 중 갈렙과 여호수아는 이와는 전혀 다르게 반응했습니다. 그들이라고 왜 두렵지 않았겠습니까? 하지만 그들은 그 두려움을 불평이나 원망이나 불신앙으로 치환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담대하게 선언했습니다. 민수기 14장 8-9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갈렙과 여호수아는 두려움을 직시했습니다. 솔직히 오픈했습니다. 그리고 신앙으로 대응했습니다. 두려워 떠는 자기 자신의 약함과 무능력을 감추거나 한탄하는 데 그친 것이 아니라 두려움을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고 의지하라는 신호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었던 본문에서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라고 선언합니다. 갈렙과 여호수아의 선언과 일맥상통합니다. ‘우리는 약하지만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강하시고, 우리는 무능하지만 우리를 붙드시고 이끄시는 하나님은 전능하시며, 우리 홀로는 백전백패하지만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싸우시니, 두려워하고만 있을 게 아니라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자’는 신앙고백이요 담대한 선포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이 고백에 근거해 두려움에 구애받지 않고 하나님이 지시한 땅을 향해 담대한 걸음을 이어갈 수 있지 않았겠습니까?

요한일서 기자는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는다’ 확언하고 있습니다. 두려움에 대응하고 두려움을 다루는 가장 현명한 방법은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일입니다. 바다 위를 걸어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두려워하는 제자들을 향해 예수님은 ‘나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말씀하시는 주님의 사랑 속에 터를 잡고 뿌리를 내려야 두려움에 구애받지 않고 두려움에 얽매이지 않고 두려움을 뛰어넘어 살 수 있습니다.

헨리 나우웬은 두려움 대신 주님의 사랑 안에 터잡아 사는 삶의 특징을 세 가지로 꼽습니다. 친밀함, 풍요함, 기쁨이 그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5장 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주님의 사랑 안에 터잡아 산다는 것은 주님과 친밀한 교제 속에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친밀한 교제를 서로의 안에 거하는 상태로 표현한 것에 주목해 봅시다. 우리가 누군가를 가슴으로 받아들일 때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솔직하게 자기를 개방합니다. 편견없이 상대방을 용납하고 허용합니다. 주님과 우리 사이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과 우리가 친밀한 교제를 나눌 때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주님께 우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토로하고, 주님은 우리를 있는 그대로 당신 안에 품어 주십니다.

요한일서 기자는 오늘 본문에서 두려움의 근원에 형벌, 곧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고 말합니다. 나라는 존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나라는 존재가 거부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나라는 존재가 잊혀지고 소외되고 배제될지 모른다는 두려움, 이런 두려움들은 원초적이고 본원적인 두려움입니다. 모든 두려움들을 가로지르는 두려움입니다. 이 두려움으로터 우리를 해방시켜주는 것은 오직 우리를 무한히 용서하시고 허용하시고 관용하시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 속에서만 이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요한복음 15장 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주님과 친밀한 교제 속에 살면 풍성한 열매를 경험한다는 의미이겠지요. 여기에서 열매란 두려움을 뚫고 하나님이 부여하신 자기 가능성을 실현하는 일에 가깝습니다. 어린아이들은 부모의 면전 앞에서, 부모의 사랑의 시선 속에서 안심하고 머물러 있을 때 비로소 놀이를 시작합니다.

두려움에 얽매여 있지 않을 때 비로소 고유한 자기 자신의 빛깔과 향내를 드러낼 수 있습니다. 두려움 때문에 강박적으로 행하던 일들은 멈추고,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들을 이루고 경험하기 위해 행동할 수 있고, 그 행동에 몰입할 수 있습니다. 두려움의 대상들을 피하는 데만 급급한 삶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원하고 바라는 삶을 향해 담대히 걸음을 내딛을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요한복음 15장 1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주님의 사랑 안에 터잡아 사는 삶은 기쁨으로 충만한 삶입니다. 여기서 기쁨은 참만족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어떠한 형편에서도 긍정적 태도와 자세, 감사와 여유로움을 유지하는 마음상태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 터잡아 산다는 것은 그 무엇도 끊을 수 없는 주님의 사랑을 붙잡고 그 무엇에도 정신을 놓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도바울의 확신에 찬 고백을 다시 들어 보십시오. 로마서 8장 38, 39절입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영원히 거하여 살 곳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쌓아 올린 담벼락 높은 집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에 붙들리고 그 사랑에 기뻐 춤을 추며 무르익어가는 내면의 집, 영혼의 집입니다. 우리는 주인 노릇, 왕 노릇하고 싶어 두려움을 억압하고, 짓누르는 힘으로 약자 위에 군림하는 고립된 개인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의 기초 위에서 관용하고 공감하고 소통하는 데 힘쓰는 공동체로 살아야 합니다. 두려움을 직시하시기 바랍니다. 두려워하는 모습 그대로 주님께 자신을 내어맡기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서 마침내 그 두려움을 내쫓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두려움을 돌파하여 참만족과 기쁨이 충만한 삶에 참여하기 바랍니다.

김현주 목사(한성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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