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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를 참는 게 능사는 아니다감정을 포용하는 신앙 2 (에베소서 4:26-27)
김현주 목사(한성교회) | 승인 2023.06.20 01:07
▲ 화를 내야 하지 말아야 한다거나 참아야 한다는 것은 어쩌면 부차적인 문제일지도 모른다. ⓒGetty Images
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27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주일예배에 참여하신 한성교회 성도 여러분을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우리를 늘 따뜻하고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는 주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평안의 기쁨과 화목의 은총을 풍요하게 내려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원합니다.

‘감정을 포용하는 신앙’ 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두 번째 시간으로 ‘화를 참는 게 능사는 아니다’ 라는 제목으로 은혜 나누겠습니다.

오늘 다루고자 하는 감정은 분노입니다. 분노는 아이러니한 측면이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억압되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과도하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진짜 풀어야 할 화는 억압하고 그냥 넘어가도 될 일에는 과하게 화를 낸다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화가 난 이유는 따로 있는데 항상 엉뚱한 곳에 화풀이하며 사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는 동에서 뺨맞고 서에서 화풀이하는 때도 많지만, 화를 내면서도 도대체 내가 왜 화가 났는지 잘 모를 때도 많습니다. 물론 화를 내면서도 이게 화인지도 모를 때도 많습니다.

분노는 억압하기 쉽지 않습니다. 억압하기에는 그 힘이 워낙 강합니다. 일시적으로 억압할 수는 있지만 분노는 언제라도 틈이 보이면 당당히 자기존재감을 드러냅니다. 억압된 분노는 왜곡된 방식으로라도 반드시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물론 분노를 억압할 이유도 없습니다. 다른 감정들과 마찬가지로 분노도 그 자체로 나쁜 건 아닙니다. 성경에서 분노하지 말라는 말씀을 보신 적 있나요? 분노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의 핵심을 오늘 본문은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분노를 표출해도 괜찮지만 그 분노로 죄를 짓지도 말고 그 분노를 부정적 방향으로 증폭시키지도 말라’는 게 그 핵심입니다.

분노는 불편부당한 상황 또는 위해와 위협을 가하는 사람으로부터 자기를 분리시켜 경계를 세우고 외부 공격에 맞서 자기를 보호하는 기능을 갖고 있습니다. 분노해야 할 때 분노할 줄 알아야 자기를 지킬 수 있습니다. 제 떼 그 분노를 표현하지 못하면 그 분노는 왜곡된 방식으로 또는 교묘한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내기 마련입니다. 사소한 일에도 자꾸 화가 날 때, 그것은 마음 한켠에 큰 화가 억압되어 있다는 뜻이겠지요. 괜히 싫은 느낌, 까칠하고 퉁명스런 말투, 냉소적인 표정, 싸늘한 반응, 꼭다문 입술, 불신도 모두 분노의 표현일 수 있습니다. ‘내가 바보라서 그렇지’ 하면서 자기를 깎아내리는 것도 분노일 수 있습니다. 분노를 자기를 공격하는 데  쓰면 그게 우울이 될 수 있습니다.

분노를 억압하며 살 필요는 없지만 분노가 죄가 되지 않도록  경계할 필요는 있습니다. 정당한 분노도 있는 반면에 불의한 분노도 있는 법입니다. 불의한 분노란 어떤 것들입니까? 성경적 상담가로 알려진 웨인 맥이라고 하는 분은 불의한 분노로 이런 것들을 꼽습니다. 다른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을만큼 우리를 완전히 지배해 버린 분노, 습관적이고 평균적 정서가 되어버린 분노, 악을 악으로 갚은 방식의 분노, 엉뚱한 대상에 화풀이하는 분노, 부정적 생각을 덧붙여가면서 화를 더 돋우는 분노, 그릇된 이유들로 내는 분노가 그것들입니다. 기독교심리학자 댄 알렌더 박사는 불의한 분노로 이런 것들을 꼽습니다. 분노를 표출하여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 하거나 그의 선택권을 완전히 빼앗아버리는 분노, 다른 사람을 과도하게 비난하거나 정죄하는 분노,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분노가 그것들입니다.

앞서 언급한 불의한 분노들을 다시 크게 둘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분노를 다루는 방식이 미숙해서 왜곡된 분노, 분노를 표출하는 방식이 미숙해서 왜곡된 분노로 말입니다. 분노를 제대로 다루지 못하면, 분노는 억압되거나 왜곡되거나 과도해집니다. 분노를 표현하는 방식을 간과하고 문제 삼지 않으면, 분노는 악의 수단과 삶을 해치는 무기가 될 수 있습니다.

불의한 분노를 제대로 다루려면 우선 분노를 분노로 이름 붙이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지난 주일에 두려움을 스트레스로 치환시키는 경향성에 대해 이야기했던 것을 떠올려 보십시오. 두려움을 두려움으로 재명명하면서부터 두려움을 다룰 수 있는 공간이 생긴다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분노를 분노로 이름 붙여야 분노를 다룰 수 있는 공간이 열립니다. 분노가 격해서 잘 안 될 때는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심호흡을 하는 것도 좋은 방편입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님들이 숨을 길게 내쉬면서 ‘주여’ 소리 자주 내는 것을 보셨을 터입니다. 저도 자주 봤는데요, 상당수는 화 날만한 상황에서 내는 소리더군요. 어떤 식으로든 분노를 주시하고 살필 내적 공간만 확보할 수 있으면 일차적인 목표는 달성한 것입니다.

불의한 분노들에는 한 가지 공통적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일종의 ‘과속 질주’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불의한 분노들에는 지금 당장 바로 화나는 대로 풀어버리려는 속성이 있습니다. 분노의 속도를 늦출 수만 있어도 분노가 초래하는 위험성을 어느 정도 방지할 수 있습니다. 분노의 속도를 늦추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 바로 이렇게 분노를 분노로 이름 붙이고 분노를 주시할 수 있도록 분노와 약간의 거리를 두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분노가 솟아오르는 순간 심호흡하며 하나님을 의식할 수 있으면 더없이 좋습니다.

‘그런데 그게 가능해요?’라고 반문하시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잘 될 때도 있고 잘 안 될 때도 있겠지요. 하지만 자꾸 연습해 볼 가치는 분명히 있습니다. 분노 때문에 내가 겪는 고통, 분노 때문에 내가 다른 사람에게 입히는 상처가 얼마나 큽니까? 분노 때문에 내뱉는 폭언들, 분노 때문에 망친 일들, 분노 때문에 꼬인 관계들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분노 때문에 후회하는 일 얼마나 많습니까? ‘참을 걸. 참았어야 했는데.’ 이런 말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분노를 다루는 연습에 적극적일 필요가 있습니다.

분노를 분노로 이름 붙였으면, 분노의 원인에 대한 분석도 필요합니다. 우리를 화나게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우리는 일반적으로 ‘너 때문에 화가 나’, ‘이것 때문에 화가 나’ 말하는 데 익숙합니다. 분노를 유발한 외적 상황이나 대상에만 신경을 쓰는 것이지요. 하지만 분노는 심리 내적 요인에 의해서도 발생합니다. 화가 나는 건 너 때문일 수도 있지만 나 때문이기도 합니다. 화가 나는 건 그것 때문일 수도 있지만 나 때문이기도 합니다.

분노를 성찰적으로 살피기 시작하면 분노 이면에 작용하는 것들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분노는 자신의 욕구 또는 기대의 좌절과 관련이 있을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원하는 바, 기대하는 바가 좌절됐을 때 또는 가로막혔을 때 화가 납니다. 학부모님들은 자녀들이 가져오는 성적표를 보시면 화가 나시죠? 어르신들은 연락도 없는 자녀들 보면 화가 나시죠? 남편들이 퇴근 해서 쇼파에 누워 티비만 쳐다보고 있으면 아내분들 화가 나시죠? 먹구멍이 포도청인지라 온갖 수모 다 당하면서도 참고 일하느라 피곤해 죽겠는데 잔소리하는 아내 때문에 남편분들 화가 나시죠? 무엇 때문인가요? 내 욕구, 내 기대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분노는 독선 또는 아집과 관련이 있을 때가 많습니다. 자기 기준과 규칙에 어긋나는 상황이 발생하거나 자기 의견과 입장에 역행하는 사람과 대면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화가 납니다. 주변 환경이 또는 상대방이 자기 평가와 판단에 미흡하면 화가 납니다. ‘일 처리를 왜 이 따위로 해?’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 ‘겨우 이 정도야?’ ‘이러니까 니가 문제인 거야?’ ‘정치를 왜 저 따위로 하고 있어?’ 이런 내면의 목소들이 다 분노로 이어집니다. 자기중심성에 사로잡힌 결과로, 심판자의 위치에 선 결과로 분노가 발생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분노는 두려움과 관련이 있을 때가 많습니다. 지난 주일에 우리는 출애굽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 내내 하나님께 분노하고 불평하고 원망했던 이유가 두려움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두려움은 자기방어체계를 작동시키고 경우에 따라서는 외부의 위협에 대해 공격적으로 대응하게 합니다. 두려움이 촉발하는 공격적 대응이 바로 분노입니다. 위협이 느껴지면 두려움과 함께 화를 내게 되어 있습니다. 내 차선 따라 운전 잘 하고 있는데 옆 차선의 차가 갑자기 내 앞을 끼여들었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러면 놀라면서 동시에 엄청나게 화가 치밀어 오르죠?

분노는 심지어 사랑과 관련 있을 때도 있습니다. ‘내가 자기한테 얼마나 잘해 줬는데,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어?’ 보상받지 못한 사랑이 분노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보상받지 못한 헌신도 분노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봉사 안하는 성도들 보면 화가 나실 때가 있지요? ‘왜 나만 이렇게 혼자 생고생해야 해?’ ‘저 사람은 손 하나 까딱하지 않으면서 뭘 그렇게 말이 많아?’ 이런 내면의 목소들이 분노를 대변하고 있지요.

분노가 이렇게 사실 나 때문에, 내 마음의 문제 때문에 발생하기도 하는 것이라 인정하는 순간, 분노를 신앙적으로 접근할 기회가 생깁니다. 분노로 우리의 영혼의 상태를 진단하고 분노를 계기로 하나님을 더욱 의지할 수 있는 길이 열립니다. 분노는 우리 욕구와 기대를 성찰하라는 신호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동시에 하나님을 갈망할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분노는 우리의 독선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생각들을 성찰하라는 신호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지혜 앞에 내 생각을 멈추고 내려놓을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분노는 우리의 두려움을 성찰하라는 신호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동시에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고 하나님을 의지할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바울은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권면하고 있습니다. 분노를 오늘내로 다 풀어버리라고 읽을 수도 있지만, 다른 의미도 있습니다. 분노를 하나님과의 관계 속으로 가져와서 성령의 조명 아래, 내면의 빛을 비추어 살피고 성찰하면서 그 분노를 하나님께 내어맡기지 않으면 결국 그 분노가 나를 집어 삼켜 나를 해칠 수 있다는 의미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우리를 한 번에 집어 삼켜 버릴 수도 있는 불의한 분노를 경계하고 의로운 분노로 전환하려면, 분노를 표현하는 방식도 바로잡아야 합니다. 악한 방식으로 표현된 분노가 불의한 분노이기도 합니다. 심지어 정당한 분노라 해도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이 악하다면 그 역시 불의한 분노가 될 수 있습니다. 상대방을 완전히 장악해 옴짝 달싹 못하도록 찍어 눌러 버리고 자기 마음대로 지배하려는 태도로 분노를 표출하면 그것은 분노가 아니라 폭력이고 그 자체로 악입니다.

화가 난다고 상대방의 입을 틀어막듯 한 마디도 못하게 하는 것도 폭력입니다. 물론 그렇게 해야 하는 상황도 있지요. 명백히 악한 의도를 품고 거짓을 말하는 사람의 입을 막기 위해선 강하게 분노를 표출해야 하는 상황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와는 정반대의 상황이 훨씬 더 많습니다. 상대방의 말을 한 번 들어보면 화가 풀릴 일도 많다는 말입니다. 알고 보니 화낼 일이 아니었던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자기 좋을 대로 판단하고 자기 맘대로 상상하면서 상대방을 오해하고 화를 내는 경우 많잖아요? 그러므로 분노를 표현할 때는 상대방을 샌드백으로 대할 게 아니라 한 인격으로 대해야 합니다.

화가 머리 끝까지 치솟아 올라서 폭력을 제어하기 어려울 것 같으면 차라리 피하는 게 낫습니다. 그리고 정말 샌드백 앞으로 달려갈 필요가 있습니다. 아니면 제가 예전에 많이 썼던 방식인데, 장롱 속으로 들어가 베개를 입에 대고 크게 소리를 지르는 방식으로라도 일단 풀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상대방을 샌드백처럼 취급하지 않을 자신이 생기면 화가 났다고 표현하는 게 좋습니다.

또 하나 분노를 표출할 때는 부정적인 생각으로 화를 더 돋구는 방식을 지양해야 합니다. 본문을 다시 봅시다.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 우리 보통 화가 나면 마음속으로 자주 하는 일이 있지요?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원래 그런 인간이었어?’ ‘어, 사실은 아주 쓰레기 같은 인간이었고만.’ ‘아니, 나를 일부러 골통 먹이려고 한 거야?’ ‘틀림없이 나를 무시하고 있고만.’ 등등 화를 더 키우는 방식으로 갖가지 검증되지 않은 부정적 생각들, 진실인지 아닌지도 모를 추측들을 밤이 깊도록 하지 않나요? 그렇게 하면 화가 풀리던가요? 내 마음과 몸만 망가지지 않나요? 화를 더 키우는 방식으로 부정적 생각을 이어가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가하는 폭력입니다.

화를 키울 게 아니라 화를 달래야 하는 게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화를 달래는 좋은 방편 중의 하나는 화가 치솟는 동안 내 몸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내 몸의 감각에 주의를 기울이는 일입니다. 화로 인해 경직되고 긴장한 몸의 감각에 주의를 기울이면 화를 돋구는 생각들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 다르게 생각해 볼 여지가 생깁니다. 그리고 그때가 바로 하나님께 분노를 맡기며 기도할 타이밍입니다. 기도하면 참 신기하게도 나를 화나게 만든 그 사람이 불쌍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입장 바꿔 생각하게 되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지요. 더 놀라운 것은 분노로 소재 삼아 기도하기 시작하면, 하나님 사실 나 하는 짓 보면 화가 날 법도 하실텐데 날 오래참아 주시고 많이도 용서하셨구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것은 분노를 소재로 기도해 본 사람은 압니다.

분노를 표출하는 또 하나의 현명한 방식은 분노를 혁신의 동력으로 삼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무엇에 분노하셨고, 그 분노를 어떻게 처리하셨나요? 성전정화사건을 떠올려 볼까요? 예수님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인 성전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어버린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타락한 행실에 분노하셨습니다. 이 분노의 이면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힘없이 착취당하는 백성들의 고통에 대한 깊은 공감적 이해가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분노를 어떻게 처리하셨습니까? 유대교를 개혁하는 방식으로 처리하셨습니다. 개인적 분풀이를 넘어서 사회적 각성과 변화를 이끌어내는 데 분노를 활용하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잠재되어 있는 분노 중 상당수는 사회적 불공정, 부정의, 불공평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이런 분노를 의롭게 처리하는 방법은 그 분노를 우선 내 삶을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한 삶으로 변화시키는 동력으로 삼는 일입니다. 또한 그 분노를 불공정하고 부정의한 이 사회에서 하나님의 진리와 하나님 주신 양심에 따라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하고 예 할 것은 예 하는 용기로 바꾸는 일입니다.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분노는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어디 쯤에 위치해 있는지를 보여주는 영적 지표와도 같습니다. 분노하는 이유, 분노를 처리하는 방식, 분노를 표현하는 방식을 보면 우리가 영적으로 얼마나 성숙했는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그만큼 분노가 우리의 영적 성장을 위한 유용한 훈련 도구라는 반증해주기도 합니다. 분노가 일어나면 이런 생각도 함께 떠올려 보십시오. ‘내 영적 성장을 위한 훈련의 기회가 왔구나.’ ‘내가 극복해야 할 내적 장애가 또 있는가 보구나.’

제가 좋아하는 시 중에 잘랄루딘 루미의 여인숙이라는 시가 있습니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여인숙과 같다. 매일 아침 새로운 손님이 도착한다. 기쁨, 절망, 슬픔 그리고 약간의 순간적인 깨달음 등이 예기치 않은 방문객처럼 찾아온다. 그 모두를 환영하고 맞아들이라. 설령 그들이 슬픔의 군중이어서 그대의 집을 난폭하게 쓸어가 버리고 가구들을 몽땅 내가더라도. 그렇다 해도 각각의 손님을 존중하라. 그들은 어떤 새로운 기쁨을 주기 위해 그대를 청소하는 것인지도 모르니까. 어두운 생각, 부끄러움, 후회, 그들을 문에서 웃으며 맞으라. 그리고 그들을 집 안으로 초대하라. 누가 들어오든 감사하게 여기라. 모든 손님은 저 멀리에서 보낸 안내자들이니까.”

분노는 우리가 영적으로 한층 더 자라도록 하나님께서 보내신 손님일 수 있습니다.

김현주 목사(한성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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