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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은 죄의식으로부터의 구원이 아니다구원론 1(시편 91:14-16; 사도행전 4:12)
홍인식 목사(새길교회) | 승인 2023.06.24 01:33
▲ 「St mark’s basilica」 ⓒpixabay

14  그가 나를 간절히 사랑하니, 내가 그를 건져 주겠다. 그가 나의 이름을 알고 있으니, 내가 그를 높여 주겠다. 15 그가 나를 부를 때에, 내가 응답하고, 그가 고난을 받을 때에, 내가 그와 함께 있겠다. 내가 그를 건져 주고, 그를 영화롭게 하겠다. 16 내가 그를 만족할 만큼 오래 살도록 하고 내 구원을 그에게 보여 주겠다.(시편 91:14-16)

12 이 예수 밖에는, 다른 아무에게도 구원은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주신 이름 가운데 우리가 의지하여 구원을 얻어야 할 이름은, 하늘 아래에 이 이름 밖에 다른 이름이 없습니다.(사도행전 4:12)

죽음에는 수많은 사연들이 있습니다. 사람의 삶이 서로 다르듯이 똑같은 죽음은 없습니다. 그렇기에 각 죽음은 죽음대로 소중하게 다루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죽은 사람을 위한 장례는 매우 엄숙하고 진지하게 이루어져 합니다. 종교의 기능 중에서 죽음에 대하여 예의를 갖추는 것이 매우 중요한 기능이기도 합니다.

기독교와 구원

저는 지금까지 목사로서 교회를 목회하면서 정말 수많은 장례를 경험했습니다. 물론 제가 경험한 장례예식은 주로 기독교인들이 치루는 예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경험한 장례식에서 유가족들이 갖고 있는 공통된 질문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질문은 죽은 자들을 향한 것일 뿐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들을 향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구원에 관한 질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무엇보다도 천국(천당) 입성(?)과 관련된 질문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죽은 사람이 구원받고 천국(천당)에 갔을까?’ 하는 질문입니다. 살아있는 사람들의 질문도 마찬가지입니다. “과연 내가 구원을 받았고 그리고 만일 지금 죽는다면 천국(천당)을 갈 수 있을까?”라는 질문입니다. 하는 질문을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질문은 어떻습니까?

기독교인들에게 중요한 주제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구원의 주제는 가장 핵심적일 것입니다. 구원의 주제는 기독교인들에게는 절대적입니다. 그런데 과연 이런 절대적 주제인 구원에 대하여 우리들은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갖고 있는 구원의 개념을 살펴보면 대략 3가지 내용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것은 서로 연결됩니다. 무엇보다도 구원은 ‘예수 믿어서 죽은 후에 천국(천당)으로 가는 것’입니다. ‘예수믿음-죽음-천국’의 3개념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이 구원입니다. 그래서 “예수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구호가 매우 자연스럽게 등장합니다. 이제 복음의 요약은 이 같은 매우 공격적인 구호로 바뀝니다.

그런데 성서와 하나님이 우리에게 예수를 통하여 주는 구원이 마치 수학공식처럼 ‘예수믿음-죽음-천국’으로 단순화 할 수 있을까요? 과연 성경은 우리에게 구원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구원은 무엇입니까?

그래서 저는 오늘 ‘교리 뒤집어 생각하기(전환)’의 측면에서 구원에 관한 문제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이 교리를 통하여 배운 구원의 개념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해 보려고 합니다. 구원과 관련해서 우리의 질문은 약 4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먼저는 무엇으로부터의 구원인가?(Salvation from what?, salus ex quo)입니다. 두 번째는 무엇을 위한 구원인가?(Salvation for what?, salus pro qua?)입니다. 세 번째는 죽음 이후의 구원인가 혹은 삶의 구원인가?(Savation after death or in life? salus post mortem an in vita?)이며, 마지막으로 오지 예수로 인한 구원(salvation by Jesus?, salus per Jesum?)입니다.

앞으로 이 4가지 질문을 중심으로 메시지 전환의 차원에서 4번에 걸쳐 이 문제를 다루어 보겠습니다. 오늘은 첫 번째 질문인 무엇으로부터의 구원인가?(Salvation from what?, salus ex quo)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무엇으로부터의 구원인가?(Salvation from what?, salus ex quo)

구원이라는 단어는 기독교의 전유물은 아닙니다. 구원은 일반적인 단어로서 다른 종교는 물론 일상적인 삶에서도 자주 사용되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구원이라는 표현과 관련해서 흥미로운 점이 발견됩니다. 그것은 이 단어가 홀로 존재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느닷없이 그리고 어떤 특정한 정황 혹은 상황 없이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단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단순하게 “나는 구원받았다.” 혹은 “구원이 이루어졌다.”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반드시 구원이 필요한 구원 이전의 특정한 정황 혹은 상황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어떤 정황이나 상황 없이 불쑥 구원을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을 말하고자 할 때는 반드시 구원이 필요한 구체적이고 절실한 상황이 존재해야 합니다.

그러한 상황이 존재할 때 우리는 비로소 “구원이 필요하다.”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말하고자 할 때 “무엇으로부터의 구원인가?”라는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이 질문은 우리로 ‘구원이 절실한(왜곡된) 상황은 무엇인가’라는 구체적인 질문으로 향하게 합니다. 이 같은 질문 없이 표현하는 구원은 큰 의미를 갖지 못합니다.

예를 들면 현 정부에 대해서 ‘구원이 필요한 정부’라고 말한다면 만일 현 정부의 정책이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거나 혹은 잘못되었지만 조금만 고치면 잘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이 말은 그다지 기분 좋게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길거리에서 흔히 경험하는 공격적인 전도 구호가 별 효과가 없을뿐더러 오히려 역효과를 자아나는 이유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구원이 필요하다고 하면 구원이 절실한 구체적 상황은 무엇이겠습니까?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구원을 말하고자 할 때 우리는 반드시 무엇으로부터의 구원(salus ex quo)인가를 물어야 합니다.

첫째는 죄의 상황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선 교리적이며 전통적인 기독교인들은 죄로부터의 구원을 말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죄는 주로 개인적인 죄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인간이 죄인인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원죄를 강조합니다. 이에 의하면 우리는 태어나면서 우리 조상의 죄(罪)성을 유전으로 받아, 존재 자체가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원(原)죄로부터의 구원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구원 주제에 있어서 인간이 원죄(原罪)를 갖고 태어난다는 가르침은 핵심적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성경은 인간이 원(原) 죄인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게 만드는 기록이 있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그리고 주도적으로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며 소중한 존재이며 아름다운 존재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죄를 지을 수 있는 존재임을 전재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성경이 인간을 아예 처음부터 죄인이라고 규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기독교는 전통적으로 인간이 원죄인임을 교리로 확정하고 따라서 구원을 ‘죄, 원죄로부터의 벗어남’으로 규정하였습니다. 예수를 믿고 죄를 회개함으로서 우리는 비로소 원죄의 속박으로부터 새로운 사람이 되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믿어왔습니다. 구원은 무엇보다도 원죄로부터의 구원으로 이해되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원죄와 죄의 굴레로부터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합니다. 오늘 우리 삶의 현실은 전혀 다릅니다. 죄에서 구원받았다고 하는데 우리의 삶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고 죄 속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여전히 수많은 죄를 짓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구원받은 사람들입니까? 구원받았다는 증거를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요?

교우 여러분, 왜 이런 문제들이 발생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무엇보다도 전통적인 교리가 말하고 있는 죄의 상황이 구체적이지 않고 절실하지 않다는 것에서 비롯됩니다. 원죄에서 비롯된 인간의 죄(罪)성은 상당히 추상적이며 절실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구체적이지도 않고 절실하지도 않는 상황과 정황으로부터의 구원이 어떻게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겠습니까? 그러기에 우리에게 구원은 구체적이거나 절실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예수와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구원은 ‘무엇으로부터의 구원’입니까? 예수가 말하는 죄의 상황은 소위 윤리적이거나 도덕적인 율법에 어긋나는 상황을 의미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윤리 혹은 시대적 도덕 기준은 주로 기득권층들의 입장에서 정해지기 일쑤입니다. 반 민중의 삶의 정황과는 별 상관이 없는 기준일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민중들은 윤리적 혹은 도덕적 기준을 지킬 수 있는 형편에 있지 않았습니다. 어쩔 수 없이 죄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 당시 사회는 율법을 통하여 죄인을 양산해 내는 사회였습니다.

마가복음 7장(마태 15장)에는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의 제자들 가운데 몇 사람이 부정한 손 곧 씻지 않은 손으로 빵을 먹는 것을 보고 예수께 묻습니다. “왜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이 전하여 준 전통을 따르지 않고, 부정한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 그러자 예수님이 답변하십니다.

“무엇이든지 사람 밖에서 사람 안으로 들어가는 것으로서 그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 사람을 더럽힌다. 나쁜 생각은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데, 곧 음행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의와 사기와 방탕과 악한 시선과 모독과 교만과 어리석음이다. 이런 악한 것이 모두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힌다.”(마가 7:15-16, 21-23)

예수님이 말하는 구원 받아야 할 정황은 외부로 규정된 인간의 삶이 아니라 인간 마음의 나쁜 생각으로터 형성되는 정황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본래 죄성을 지닌 원초적인 죄인이기 때문에 그 죄성으로부터 구원을 받아야 함을 말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나쁜 생각이 만들어 내는 ‘여러 가지 정황, ’음행,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악한 시선, 모독, 교만, 과 어리석음‘과 같은 구체적인 정황으로부터 구원받아야 함을 말합니다.

나쁜 생각을 오늘의 언어로 표현한다면 “물질 중심-소비적 욕망과 욕망의 문화”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삶에 내재되어 있는 욕망은 오늘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모든 나쁜 일들의 근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과 같은 자본주의적이고 물질적인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구원을 말하고자 할 때 욕망 주제를 외면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이 인류역사에서 가장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불행하다고 느끼는 이유는 다름 아닌 인간의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물론 인간의 욕망은 생존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욕망 없는 인간 존재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욕망이 물질적이고 소비적인 문화와 연결되어서 발현될 때입니다. 이러한 욕망은 인간을 불행하게 만듭니다. 만이 갖고 있어도 결코 그의 삶은 만족에 이르지 못합니다. 그는 계속해서 욕망하게 되고 결국 파멸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 구원은 욕망으로부터의 구원을 의미합니다.

물질적이고 소비적인 욕망으로부터 벗어나지 않고서 인간의 행복은 보장되지 않습니다. 기독교의 구원의 메시지는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욕망으로부터 구원받는 길을 보여주는 것이 무엇이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창조된 원복의 인간 존재가 욕망으로 인하여 원복을 상실하고 불행하게 살아가는 구체적이고 절박한 상황에서 구원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구원은 욕망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으로부터 시작됨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의 삶에서 신실한 기독교인으로 살아가는 것임을 증명할 수 있겠습니까? 교리를 잘 외우고 교회 생활에 익숙하게 되면 우리는 기독교인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진정한 기독교인은 복음으로 구원을 받아 물질적이고 소비적인 욕망으로부터 자신을 지켜나가고 절제하면서 평화와 행복의 삶을 살아가는 자유인들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물질과 소유욕으로부터 구원받아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으면서 자신이 가진 것에 만족하고 감사하게 살아가는 사람이야 말로 진정한 구원받은 사람의 모습이 아닌가요?

구원을 받아서 죄로부터 자유롭게 되어 죽어서 천당간다고 믿으면서도 현실의 삶에서는 ㅇ전히 부동산 투기에 열 올리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좀 더 갖기 이해 안달을 하고 얘를 쓰면서 현재의 삶에 만족하지 않고 늘 “저 높은 곳”만을 바라보며 경쟁에 열을 올리는 사람이ㅏ 과연 구원받은 사람의 모습일까요?

과연 우리는 구원받았습니까? 구원받았다면 무엇으로부터 구원을 받았습니까?

두 번째는 제도-구조적이며 문화적인 상황을 말할 수 있겠습니다. 물질적이고 소비적인 욕망은 단순히 개인적인 차원에 국한 된 것만은 아닙니다. 우리의 삶은 개인을 넘어서 필연적으로 사회적이고 구조적이며 그리고 문화적 상황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많은 경유 사회-문화적인 상황이 한 개인의 욕망의 내용과 크기를 결정하기도 한다는 의미입니다.

저는 공산국가인 쿠바에서 약 5년간 살았습니다. 제가 살았던 당시 쿠바는 여전히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확고하게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Fidel Castro 가 살아서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모든 국민은 배급제도 하에서 일정한 양의 식품과 생활비품을 공급받고 있었습니다. 모든 교육과 의료는 무상으로 제공받았습니다.

주택도 국가가 공급하고 있었고 개인적인 차원에서 토지와 주택 매매는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전반적으로 경제수준은 일반 자본주의 국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낮았습니다. 가난했습니다. 그럼에도 굶는 사람이나 노숙자 혹은 집 없는 사람, 돈이 없어 교육을 받지 못하거나 병원을 찾지 못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간혹 부자들이 있기는 하였지만 일반사람들과의 경제적 차이는 그리 크지 않았습니다. 빈부격차가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제도와 구조 그리고 사회 문화적인 상황에서 쿠바 사람들의 욕망의 내용과 크기는 크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가난했지만 만족하고 행복하게 살아갔습니다, 부족한 것이 많았지만 그 안에서 나름 풍요를 누리고 살아갔습니다, 경제적 제도가 사람들로 하여금 만족한 삶을 살도록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미국의 경제 봉쇄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지만 그래도 정부는 최선을 다해서 국민들에게 필수 물품들을 공급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쿠바에 살면서 경제 사회 재도가 한 국가에서 한 삶의 행복과 관련해서 얼마나 중요한 가를 경험했습니다. 물론 쿠바 사람들이 외국관광객들이 가지고 들어오는 물품을 보면서 부러워하고 갖고 싶어 합니다. 자기들도 그러한 물품들을 가졌으면 하고 바라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렇게 되더라고 사회주의 경제 구조는 그대로 유지하고 싶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기본적인 생활이 보장되었고 지나친 경쟁을 통해서 자신들의 삶이 망가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저는 쿠바에서 살면서 처음에는 부족한 것이 많아서 많은 면에서 불편함을 경험하면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6개월 정도 지나고 나니 불편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때 저는 깨달았습니다. 불편이 반드시 불행한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부족과 가난이 행복과 그리 큰 관련이 없다는 사실을!

쿠바 사람들의 욕망도 그리 크지 않았습니다. 피자 한판, 코카콜라 한 병, 소고기 먹는 것, 좋은 보드카 한 잔 마시는 것 등 욕망은 그야말로 사소하고 단순했습니다.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빈부차이가 그리 크지 않고 살아가는 모습이 거의 비슷하고 평등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욕망도 사회구조와 문화에 따라서 그리 크지 않았고 그 내용도 단순했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살고 있는 사회의 제도와 구조 그리고 문화는 어떠합니까? 과연 이런 제도와 체제가 우리의 삶을 행복하게 만들어 가고 있습니까? 우리는 과연 행복하고 또 우리 자손들도 대대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우리 청년들의 미래는 행복이 보장되어 있는 것일까요? 기후위기로 비롯되는 지구 환경의 미래, 노동 현장의 문제, 정규직, 비정규직, 플래트홈 노동자, 장애인, 난민, 경쟁을 강요하는 사회, 부동산, 주식 투자와 투기, 온통 돈 벌기에만 매달려 있는 우리의 모습. 모두 암울한 상황입니다, 과연 희망이 있는 것일까요?

왜 이런 일들이 발생하고 있습니까? 이것을 오직 개인의 능력과 문제로만 돌릴 수 있겠습니까? 이쯤 되면 왜 이런 일이 발생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사회적 그리고 문화적 구조와 제도에 대해서 성찰하고 우리가 지탱하고 있는 제도와 문화 가치관이 과연 유효한 것인가를 물어보아야 하는 것 아닐까요?

오늘의 시대에서 구원을 말하는 것은 이러한 사회-문화적 제도와 구조를 외면한 채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구원이 단순한 개인의 차원을 넘어서 사회-문화로부터의 벗어남을 의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독교가 구원을 선포하는 종교라고 한다면 우리의 구원 이야기는 사회-경제-정치-문화적 제도와 구조로부터의 구원이야기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경쟁이 아닌 협동을 바탕으로 하는 사회와 경제, 혼자만 잘 사는 것이 아니라 지금보다는 조금 가난하더라도 함께 살아가려는 사회, 다른 사람을 배제하고 제외하는 사회와 문화가 아니라 조금은 불편하더라도 서로를 향한 포용과 환대의 모습을 보이는 사회가 구원받은 사람들이 바라는 사회의 모습이 아닐까요?

과연 우리는 구원받았습니까? 구원받았다는 증거를 어디서 찾아 볼 수 있을까요? 구원이 우리를 인간답지 못한 삶을 살아가게 만드는 사회와 문화로부터의 구원을 의미한다면 구원받은 사람들은 그러한 사회제도와 문화에 대하여 저항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에게 그런 모습이 있습니까? 있다면 우리는 구원받은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나가면서

오늘의 말씀은 “내가 그를 건져 주겠다.  내 구원을 그에게 보여 주겠다." 라고 말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물질적아고 소비적인 욕망으로부터 우리를 건져내 주십니다. 그는 우리에게 사회-문화적 압박으로부터 우리를 건져주십니다. 이렇게 주님은 우리에게 구원을 보여 주십니다, 구원은 오늘도 우리를 향하여 오고 있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구원을 받아 구원받은 사람으로 살아갑시다.

홍인식 목사(새길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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