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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한 게 아니라 지친 것일 수 있다감정을 포용하는 신앙 3 (열왕기상 19:4-5)
김현주 목사(한성교회) | 승인 2023.06.27 00:45
▲ Ferdinand Bol, 「Elijah Fed by an Angel」 (1660-1663) ⓒWikiCommons
4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5 로뎀 나무 아래에 누워 자더니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주일예배에 참여하신 한성교회 모든 성도 여러분을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자비롭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는 우리 하나님께서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참된 안식과 기쁨을 내려주시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감정을 포용하는 신앙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세 번째 시간으로 ‘우울한 게 아니라 지친 것일 수 있다’ 이런 제목으로 은혜 나누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다루려고 하는 감정은 우울입니다.

우선 우울과 관련해 참고할 통계 조사 결과를 전해 드리겠습니다. 2021년에 OECD에서 조사 발표한 결과에 따르면, 코로나 대유행 기간 우리 국민 10명 중 3-4명은 우울증이나 우울감을 호소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OECD회원국들 중에서 1위의 통계수치입니다. 우리 국민의 자살률이 세계에서 제일 높은 것과 무관하지 않아 보입니다. 자살 관련 소식을 들을 때마다 ‘우울증이 있었나 보네’ 하니까요.

우울이 이렇게 우리 사회에 넓게 그리고 깊게 자리잡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이 우울에 빠져들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여기에는 신앙인들도 예외가 될 수는 없습니다. ‘영혼의 밤을 지날 때’ 를 쓴 다이애나 그루버는 그 책에서 우울증을 안고 살아간 믿음의 사람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종교개혁의 선구자, 마르틴 루터, 캘커타의 성녀로 불리는 마더 테레사, 미국 흑인 인권 운동의 대부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 등이 그들입니다. 우리가 이런 분들보다 어디 믿음이 강하던가요? 인격이 고매하던가요? 그분들보다 우리가 내적으로 강인하던가요?

진실이 이러할진데, 우울감을 호소하는 사람들을 향해 ‘의지가 약해서 그래, 믿음이 없어서 그래, 마음을 굳게 먹어’ 라고 말하는 것은 무지를 넘어선 폭력이나 다름 없을 것입니다. 감기에 걸린 사람에게 ‘의지가 약해서 그래, 믿음이 없어서 그래’ 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지요. 우울은 마음의 질병과 같습니다.

잠시 왔다가 사라지는 정도로 가벼운 우울감이 있는가 하면, 꽤 오래 머물면서 내면의 이곳 저곳을 다 헤집어 놓고, 몸까지 상하게 하는 정도의 무거운 우울감도 있습니다. ‘죽고 싶다’ 하는 생각이 불쑥 불쑥 찾아올 정도로 위험한 우울감도 있습니다. 그 형태와 정도는 다를 수 있지만 한 가지 공통적인 것은 모든 우울감은 신앙이 있고 없고 와는 상관 없이 찾아온다는 사실입니다. 우울은 자기 의지를 넘어선 곳으로부터 예고 없이 불쑥 찾아옵니다.

우울의 원인으로 신앙을 지목할 순 없지만, 우울에 대응하기 위한 가장 현명한 방편으로 신앙을 꼽을 순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괴롭히시려고 우울감을 주신 것일 리 없습니다. ‘네 의지로 홀로 딛고 일어서라’ 말씀하실 리도 없습니다. ‘겨우 눈 뜨고 살 정도의 의지와 힘만 남아 있더라도 그 의지와 힘으로 나를 보라’ 말씀하실 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 눈 맞춤을 기초로 우리를 돕기 위해 일하실 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울감이 만들어내는 절망의 소리보다 하나님이 건네시는 희망의 소식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낫습니다.

언제라도 우리를 거꾸러트릴 준비가 되어 있는 우울을 신앙에 기초해 이해하고 신앙을 통해 대응하기 위해 오늘 우리가 함께 만나볼 사람은 엘리야 선지자입니다.

엘리야 선지자 그는 누구입니까? 영적 거인이었습니다. 북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선지자였고, 우상숭배의 대명사로 알려진 아합 왕과 그의 아내 이세벨에 맞서 여호와가 하나님이심을 자신의 전부를 다해 당당하고도 결연하게 외쳤던 인물이었습니다.

당시 아합 왕은 경제적, 정치외교적 이익을 고려해 페니키아의 공주, 이세벨을 아내로 맞이했습니다. 이세벨은 페니키아의 종교, 곧 아세라 신 신앙을 북 이스라엘에 국가정책적 차원에서 전파하는 데 힘썼습니다. 아합 왕도 이에 동조하였습니다. 아합 왕 통치기에 북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노골적인 방식으로 바알과 아세라 신 숭배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장려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메신저로 맹활약했던 인물이 바로 엘리야였습니다.

엘리야 하면 떠오르는 장면은 갈멜 산에서 홀로 바알의 선지자들 450명과 대결한 일입니다. 송아지 한 마리씩을 번제물로 준비하고 각자 자신들의 신에게 불을 내려줄 것을 청하는 대결이었습니다. 물론 승자는 엘리야였습니다. 또 하나의 명 장면은 엘리야가 갈멜 산 꼭대기에서 바다쪽을 향해 무릎을 꿇고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은 채 일곱 번 기도할 때 손바닥만한 비구름이 일고 비가 내린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일으키셨던 가뭄이 3년 6개월만에 멈추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영적 거인 엘리야에게도 짙은 우울감이 찾아왔습니다. 그가 하나님께 호소한 말을 다시 들어볼까요? 앞서 보였던 영웅적 모습과는 너무 대비되어 믿기지 않을 정도입니다.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풀어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더 바라는 것 없으니 이제 제 목숨 거두어주세요. 저라고 뭐 특별할 게 있나요? 제가 뭐 대단한가요? 더 이상 대단한 사람 취급 받는 것도 싫고 주목받는 것도 싫고 시선을 끄는 것도 싫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께 이렇게 하소연하고선 로뎀 나무 아래에서 잠이 들었습니다.

엘리야의 이 호소를 귀담아 들어보면, 그가 지금 겪고 있는 마음 상태가 우울감을 호소하는 사람들의 증상들과 매우 흡사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희망도 의욕도 상실한 상태, 흥미로운 것도 관심 가는 것도 하나 없는 상태, 더 이상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고,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상태, 모든 게 귀찮아 무기력하게 잠만 쏟아질 뿐 꼼짝도 하기 싫은 상태, 자신이 한없이 초라하게만 보이는 상태, 죽고 싶다는 생각이 아무렇지 않게 드는 상태, 이런 상태가 양쪽 모두에게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현재 정신의학계에서 공식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정신질환 진단 매뉴얼(DSM 5)에 따르면 앞에서 열거한 증상들이 2주간 지속되면 우울증, 곧 우울장애로 진단합니다.

엘리야에게 이렇게 불쑥 찾아온 우울감은 무엇을 말해 주고 있을까요? 겉으로 보기에는 다르게 그간 그가 얼마나 극도의 긴장과 압박 속에서 살아왔는지를 말해 주는 것 아닐까요? 자기 속에서 강렬하게 요동치는 모든 내적 감정들을 비집고 나오지 않도록 단단히 묶어 둔 채 이를 악물고 예언자로서의 사명에 집중했던 것은 아닐까요?

한 번 공감적 시선으로 엘리야를 바로봅시다. 그 악랄한 아합 왕 앞에 서서, 듣기 싫은 소리일 것 뻔히 알면서, 불호령칠 것 뻔히 알면서, 모르는 척하고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했을 때, 엘리야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성령이 충만하여 무아지경 속에 나도 모르게 내뱉는 말이 아닌 이상,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내내 그가 불안과 두려움으로 얼마나 긴장이 되었을까요?

‘아합 왕이 어떻게 반응할까? 이 이야기를 듣자마자 경비병을 시켜 바로 내 목을 치는 것은 아닐까? 아니야. 하나님이 지켜주시겠지. 감옥에 갇혀 영영 못 나오는 것은 아니까? 헛소리 해단다고 주변 사람들도 술렁 술렁 대하겠지. 틀림없이 미친 사람 취급하겠지.’ 등등 별의 별 생각들이 보일듯 말듯 그의 내면을 스쳐지나가면서 감정적 동요와 긴장과 압박을 일으켰을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사명을 잘 감당해야지, 절대로 물러서야 말아야지’ 하는 각오가 컸을 테니 그 긴장과 압박감 역시 훨씬 더 컸을 것입니다.

바알의 선지자들과 대결했을 때는 또 어떤가요? 겉으로야 차분하고 당당하게 말하고 있지만, 그도 사람인 이상 실상은 마음속에선 요란한 전투가 벌어지지 않았을까요? ‘이번에도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제대로 증명해 내야할텐데, 정말 나 혼자 감당할 수 있나? 저들은 왜 저렇게 많아? 크고 단합된 저 목소리, 정말 하늘이라도 울릴 판이네. 하나님 잠깐 딴 짓하시다 타이밍 못 맞추시면 어떡하지? 저들이 실패할 것은 분명한 것 같은데, 나는 제때에 성공할 수 있는 건가?’

이런 생각들이 내면 한켠에서 꿈틀대면서 두려움과 불안을 야기하지 않았을까요? 더욱이 반드시 이 전투에서 승리하겠다는 각오가 얼마나 컸겠습니까? 상반되는 이 두 마음이 일으키는 내적 긴장과 압박이라는 건 정말 엄청났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틀림없이 엘리야는 서서히 지쳐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비록 남들 눈에 크게 띄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사실 종종 우울감에 사로잡히는 우리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사회생활, 직장생활, 때로 가정생활, 곳곳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긴장하고 압박감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게 누적되고 누적되다보니 쉬어도 쉬는 게 아닌 지경에까지 이르기도 합니다. 엘리야의 경우처럼 이런 긴장과 압박 이면에는 한편으로는 ‘반드시 ~~해내야 한다,  반드시 이겨야 한다, 반드시 쟁취해야 한다, 반드시 이뤄야 한다’는 단단한 각오와 열망이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통제할 수 없는 현실적 어려움과 암울한 전망, 자기 불신이 자아내는 두려움과 불안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 두 상반되는 마음이 강하게 충돌을 일으킬 때 긴장과 압박이 발생합니다. 그리고 이 긴장과 압박은 엄청난 내적 에너지를 소진시켜 버립니다.

그러므로 우울감을 호소하는 우리는 사실 지쳐 있습니다. 우리가 잘못 살아서가 아니라 너무 잘 살려해서 지쳐 있습니다.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힘을 너무 주고 살아서 지쳐 있습니다. 진지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과도하게 진중해서 지쳐 있습니다. 최선을 다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최선을 다하려고만 했기 때문에 지쳐 있습니다. 대충 살아서가 아니라 대충 살지 못해 지쳐 있습니다. 게을러서가 아니라 너무 부지런해서 지쳐 있습니다. 그런데도 자꾸 우울감을 호소하는 우리 자신에게 ‘그러면 그렇지. 잘 될 리가 있나? 나약해 빠져서 해낼 리가 있나? 이런 정신 상태로 뭐가 되겠나?’ 말해서야 되겠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엘리야의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 봅시다. 엘리야는 엄청난 긴장과 압박을 억압하는데 내적 에너지를 소진하면서 쉼없이 달려왔습니다. 그러다 오늘 본문에서 드디어 그 한계에 부딪히고 말았습니다. 바알의 선지자들과의 대결에서 승리했고 전심으로 기도하며 가뭄을 종식시키는 큰 비를 맞이했습니다. 큰 일을 치르고 나니 한 순간에 긴장이 풀렸을 터이지요.

그런데 이게 왠 일입니까? 이세벨이 자기를 잡아 죽이려 한다는 소리를 듣습니다. 허탈하기도 하고 힘이 쭉 빠지기도 하지 않았을까요? ‘이 정도 됐으면 여호와가 하나님이심을 인정하고 회개해야 할텐데. 아니 그게 당연한 수순일텐데. 아무런 변화가 없다고? 아합과 이세벨, 저 악마 같은 인간들이 여전히 기세등등하다고? 지금까지 나 뭐한 거야? 아니, 하나님 도대체 뭐 한 거예요? 제가 뭘 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예요? 아직도 싸워야 할 게 또 있어요?’ 이런 생각 들지 않았을까요? 그랬다면, 그 순간 모든 의욕이 한 순간에 날아가 버렸을 게 뻔합니다. 깊은 허무감에 사로잡혔을 게 뻔합니다. 전자에 열거했던 우울감에 빠져버렸을 게 뻔합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광야로 피했던 것입니다. 목숨 부지하려고 도망쳤다기보다 이스라엘 백성들 모두 꼴보기 싫어졌던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목숨 부지하고 있는 자신 조차도 꼴보기 싫어졌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죽여 달라 하소연했겠지요. 이제 엘리야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보이지요.

그러나 바로 그 순간 반전이 일어납니다. 우울할 수밖에 없을 만큼 지쳐버린 엘리야를 하나님께서 그 순간 어루만지십니다. 깊은 우울감에 사로잡혔을 때 엘리야는 하나님을 찾는 것 말고는 달리 한 게 없습니다. ‘나 지금 안 괜찮아요.’ 라고 하나님께 표시하는 정도면 족할 때가 있습니다. 우울감을 빠져 나오려는 시도조차 할 수 없을만큼 지칠 땐 하나님께 ‘나 지금 안 괜찮아요’ 라고 표시하는 것만으로도 족합니다.

우리 사실 안 괜찮으면서 괜찮다고 말할 때가 많지 않습니까? 그게 우리를 더 지치게 하는 것 아닌가요? 안 괜찮다는 것 인정하고 표현해야 쉼이 가능합니다. 엘리야가 하나님께 안 괜찮다고 말한 건 자신에게 불쑥 찾아온 우울에 대한 매우 현명한 처사였습니다. 이제 자비롭고 은혜로우신 하나님이 일하실 차례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야가 지쳐 쓰러져 자고 있을 때, 그를 어루만지셨습니다. 빨리 깨워서 또 다른 사명을 재촉하시려고 그리 하신 게 아닙니다. 제대로 쉬게 하시려고 어루만지셨습니다.

자고 있는 사람의 모습을 유심히 지켜본 적이 있으신지요? 그때 사람은 본연의 그 모습 그대로 존귀하고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시나요? 하나님은 엘리야를 애처럽게 바라보시고 어루만지시며 엘리야의 무의식 깊은 곳에 이런 메시지를 부여하신 것 아닐까요? ‘네가 그 못된 아합과의 대결에서 승리하건 말건 넌 내게 소중한 사람이야. 넌 나의 소모품이 아니라 자랑스런 나의 사람이야. 네가 이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것을 기대했기 때문에 너를 다그치듯 그 전쟁에 참여시킨 게 아니야. 널 사랑하고 널 신뢰했기 때문에 너를 통해서 내 일을 하려고 했을 뿐이야’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쉽게 헤어나올 수 없는 우울에 빠져 있을지라도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께 대한 신뢰심을 거두지 않는다면 그게 하나님의 임재의 통로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당분간은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한다 할지라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어루만지시고, 우리 내면을 조용히 치유해 나갈 것입니다.

16세기 스페인의 갈멜 수도원의 수사였던 십자가의 요한은 자신의 영적 체험을 바탕으로 영혼의 어둔 밤이라는 시를 짓고 그 의미를 해설한 적이 있습니다. 요지는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안 계신 것 같은 하나님 체험의 부재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 하나만 붙잡고 기다리면 하나님은 캄캄한 암흑 속에 처해 있는 우리 영혼을 고요하게 어루만져 한 차원 더 성숙시켜가신다는 것입니다. 우울은 어쩌면 신뢰의 빛 한줄기를 의지해 영혼의 어둔 밤을 견디며 하나님의 어루만지심을 기대하라는 신호일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은 잠든 엘리야를 그렇게 고요히 어루만지신 후 이제 그를 깨워 일으키시며 먹을 것을 내어 주십니다. 그의 머리맡에 숯불에 구워 먹기 좋은 떡과 물 한 병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먹고 마셨습니다. 그리고 또 잠을 청했습니다. 이 일을 반복하기를 40일이나 그리했습니다.

어린 아기들이 하는 일이 무엇이지요? 먹고, 자고, 싸고, 노는 일입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 아니 가장 복된 일은 사실 이런 일입니다. 잘 먹고, 잘 자고, 소화 잘 시켜, 사람들과 평화롭고 즐겁게 어울리며 행복하게 사는 일입니다. 전도서 기자의 말을 들어 보십시오. 3장 13절입니다.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을 또한 알았도다.” 우울을 대응하기 위한 가장 현명한 방법 중 하나는 크게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삶의 가장 기본적인 일에 기뻐하며 만족하는 것입니다.

우울과 씨름했던 마틴 루터는 자신처럼 우울에 시달리던 제롬이라는 친구에게 편지로 이렇게 조언했던 적이 있습니다. “고독을 피하게… 제롬, 우리 가족과 어울려 웃고 즐기게… 용기를 내서 끔찍한 생각을 쫓아내게. 마귀가 그런 생각들로 괴롭힐 때마다 함께할 사람들을 찾아서 한잔하며 농담도 주고받고 한바탕 즐겁게 지내게.”

우울감에 사로잡혔을 때는 세 가지 부정적 생각이 내면을 장악하기 쉽습니다. 자기 처한 현실에 대한 부정적 생각, 자기 미래에 대한 부정적 생각, 자기 자신에 대한 부정적 생각이 그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전환시키려면 일단 멈추어야 하는데, 그러러면 이런 생각이 필요 없는 활동을 시도하는 게 도움이 될 때가 많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친구들과 어울리며 즐거운 음식을 먹고 농담을 즐기며 신나는 음악에 몸을 맡겨 춤을 추는 이런 활동들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허락한 평범한 일상의 쉼이 엘리야에게 소생할 힘이 되었습니다. 두 주먹 불끈 쥐고 ‘무조건 잘 해 내야지’ 하면서 전투적으로 사는 삶을 내려놓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삶의 소소한 기쁨을 누리는 일에 보다 집중하는 것이 우울에 대응할 힘을 얻는 길입니다.

먹고, 자고, 싸고, 노는 일로 우울의 지배력으로부터 한 걸음 놓임을 받은 엘리야에게 이제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다가오십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물으십니다.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우울에 압도되어 있을 때에는 우울감을 강화시키는 자기 생각을 점검할 여력이 없었지만 엘리야에게 이제 그 성찰의 힘이 확보되었으니 물으신 것입니다. “무엇이 너를 우울하게 하더냐?”

엘리야는 속생각을 말합니다.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저 최선에 최선을 다해 주를 위해 일했습니다. 그런데 다 소용 없었습니다. 아무도 내 곁에 없습니다. 열심히 일한 결과로 불행만 남았습니다.” 이런 말이겠지요? 그런데 엘리야의 이 생각은 진실인가요? 19장 18절을 보세요.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이가 칠천 명이나 남아 있지 않았습니까?

우울을 다뤄볼 만한 여력이 생기면 결국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비춰 부정적이고 거짓에 기초한 자기 생각들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과 진실에 기초한 생각들로 전환시켜야 합니다. 이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 순간 순간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들을 포착하는 것도 쉽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 생각들을 반박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생각들을 품고 사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19장 12절은 하나님의 음성은 큰 바람이나 지진, 눈에 확 띄는 불과 같은 게 아니라 세미한 소리와 가깝다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우울은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에 귀를 기울일 기회를 제공합니다. 우울할 때 내 마음속 목소리는 어느 하나 내게 희망을 주지 못한다는 게 명백하니, 그 사실을 인정하기만 한다면 하나님의 음성에만 집중할 이유가 생기는 법입니다. 그래서 우울은 거짓으로 물든 내면의 소리에서 진실하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주의를 전환하라는 신호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19장 15절 이하에서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또 다시 예언의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예언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다시 집중하면 거짓된 자기 생각에 더 이상 좌지우지되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울은 믿음이 없어서 생기는 병이 아니라 믿음으로 잘 대응하며 억지 노력과 힘을 빼고 하나님의 어루만지심에 자기를 온전히 내어맡길 기회입니다. 자기 생각의 한계를 넘어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에 주의를 기울여 들을 기회입니다. 우울하고만 있어서는 안 되는 진짜 이유를 하나님에게서 다시 찾을 기회입니다. 우울을 영적 기회로 삼으십시오.

김현주 목사(한성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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