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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할 필요가 없는 것을 탐하라감정을 포용하는 신앙 4(고린도전서 3:8-9)
김현주 목사(한성교회) | 승인 2023.07.04 00:26
▲ 시기는 비교의식의 결과이다. ⓒGetty Images
8 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한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9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주일예배에 참여하신 한성교회 모든 성도 여러분을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지금 여기 나 있는 곳에 함께 계신 우리 주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하늘의 크신 은혜와 평화 가득 내려주시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감정을 포용하는 신앙’ 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시기할 필요가 없는 것을 탐하라’라는 제목으로 은혜 나누겠습니다.

오늘 다루려고 하는 감정은 시기심입니다. ‘시기’ 하면 어떤 생각이 먼저 떠오르시나요? ‘나와는 크게 상관없는 감정이다. 가끔 누가 부러울 때가 있긴 하지만 시기까진 아니다.’ 이런 생각 들지 않으시나요? 누구에게나 나타날 수 있고 나타나는 감정이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빈번하게, 훨씬 더 다양한 영역에서 나타나는 감정인 게 분명한데, 인정하기 가장 어려운 감정, 가장 부끄럽게 여기는 감정 중 하나가 시기입니다.

일단 시기에 대한 부정적 인식 때문에 그렇습니다. 시기는 미숙한 사람,  부도덕한 사람에게나 있는 부끄러운 감정, 속물스런 감정이라는 인식이 일반적입니다. 이 시기심이 유발하는 행동 역시 대체로 적대적이고 야비하고 때로 폭력적이다는 게 우리들의 일반적 인식입니다.

6세기 말경 그레고리 대교황은 인간의 죄의 뿌리에 해당하는 일곱 가지 대죄를 도식화했습니다. 그가 이른 바 7대 죄악(교만, 시기, 인색, 분노, 음욕, 탐욕, 나태)으로 꼽은 것 중 하나가 바로 시기입니다. 전통적으로 기독교 신앙에서 시기를 품었다는 건 곧 죄를 범했다는 말이나 매한가지였습니다. 실제로도 성경에 등장하는 수많은 죄악의 이면에 시기심이 있었습니다.

가인은 왜 아벨을 살해했나요? 하나님의 편애를 받는 아벨을 시기해서 입니다. 야곱의 형제들은 왜 요셉을 죽이려 했습니까? 아버지 사랑을 독차지한 요셉, 영민한 요셉을 시기해서 입니다. 사울은 왜 다윗을 죽이려 했습니까? 백성들 환호를 받는 다윗을 시기해서 입니다. 타락한 유대교의 종교 지도자들은 왜 예수님을 죽이려 했습니까? 탁월한 지혜와 영성을 갖춘 예수님을 시기해서 입니다. 고린도교회 내에 일어난 당파적 분열도 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 안의 시기심을 솔직하게 인정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입니다. 저도 예외는 아닙니다. 저도 가장 감추고 싶은 감정이 시기입니다. 시기는 제 민낯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것과 같은 고통을 주기 때문입니다. 시기심은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 수치심을 불러 일으키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래서 시기심은 위장과 위선의 탈을 쓰고 등장할 때가 많습니다. 의협심과 정의감이 대표적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파 사람들, 제사장과 서기관들을 떠올려 볼까요? 그들 사실 예수님을 시기했습니다. 수많은 민중들이 메시아로 환호했으니까요. 자신들은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지혜와 영성을 지녔거든요.

하지만 그들은 고상한 척, 경건한 척 위장하면서 위선적으로 예수님에게 율법을 범하였다고 따지고 들었습니다. 신성모독자, 무신론자로 공격했습니다. 마태복음 27장 18절을 보십시오. 시기해서 예수님을 못 박았으면서 종교적 이유들로 그것을 정당화했습니다.

우리도 이와 비슷하게 시기심을 정의감으로 위장할 때가 많습니다. ‘저 사람이 성공한 건, 뒷 배경이 좋아서고, 뒤 봐주는 사람이 있어서야, 저 사람은 제대로 아는 것도 하나 없는데, 어떻게 저 자리에 올라갔어?, 저 사람은 뭘 잘했다고 도대체 저런 대접을 받아?’ 명백하게 불공정하고 부당한 방식을 취한 사람에게야 얼마든지 할 수 있는 말이지만, 딱히 그렇게만 볼 수도 없는데 그런 말이 나온다면 시기심을 의협심으로 위장한 것일 수 있습니다.

감탄도 시기심을 위장한 것일 수 있습니다. ‘와, 정말 축하해. 어떻게 성공한 거야? 진짜 해낸 거야? 정말 어떻게 한 거야?’ 감탄사를 남발하는데, 속으로는 계속 믿기지 않는다 의구심이 들 수 있습니다. 이건 감탄하는 척 한 것이지요. 축하는 해주는데, 내가 기쁜 건 아니면 그것도 감탄하는 척 한 것이지요. 감탄으로 시기심을 위장한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만큼 시기심을 인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래도 제게 ’누굴 시기한 적 있냐’ 물으면 ‘있다’고 답합니다. 시기심을 인정하는 게 시기심의 부작용과 위험성을 극복하고 영적으로 성숙할 기회의 문을 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들 대부분 큰 범죄를 일으킬만한 시기심을 갖고 있는 건 아닙니다. 누군가를 시기해서 악의적으로 그를 모함하거나 곤경에 처하게 만들거나 망하게 만드는 일은 드라마나 영화 속 악인들의 이야기일 뿐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시기심 때문에 정서적으로 괴로울 때가 많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필요는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 행복하지 않다, 불행하다’ 고 느끼는 이유는 중 상당수는 ‘왠만한 사람들 다 갖고 있다고 생각되는 게 내게 없어서’ 입니다. ‘나랑 별반 다를 것 없는 사람들도 하나씩은 다 갖고 있는 것 같은데 나는 없어서’ 입니다.

‘나도 저 사람만큼이나 정말 열심히 일했는데, 나는 왜 승진에서 제외되지?, 내 또래 남자들 집 한 채씩은 다 가진 것 같은데, 왜 나만 이제껏 셋방살이를 전전하나?, 다른 집 자식들은 취업도 척척 잘하는데, 왜 우리 집 아이들은 이렇게 안 풀리나?, 남들은 해외여행도 잘 다니던데, 왜 나는 국내여행 한 번 제대로 할 시간도 여유도 없는거야?, 내가 뭐가 부족해서, 내가 뭘 그리 잘못해서, 나만 이렇게 되는 일이 없는거야?’ 하는 생각이 우리를 불행하게 합니다. 그런데 이런 마음들이 사실 다 시기심과 관련 있습니다.

시기를 정의해 볼까요? 시기심과 영적으로 씨름했던 밥 소르기 목사님은 시기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내가 바라고 원하는 것을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거나 누리는 것을 보는 순간 느끼는 고통’ 다른 말로는 이렇게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타인이 누리는 풍요로움이나 편익을 목격하고 생겨난 불쾌한 감정’ 정말 갖고는 싶은데 쉽게 얻을 수 없고 얻어지지 않는 뭔가를 누군가가 너무 쉽게 손에 넣은 것 같아 보이면 나타나는 불쾌감을 시기심이라 합니다.

시기심을 연구한 롤프 하우블에 의하면 시기심이 유발하는 불쾌감은 우리는 크게 세 가지 방향으로 전이될 수 있습니다. 우선 우울감 또는 무기력감으로 전이될 수 있습니다. ‘내 인생은 이렇게 꼬였나? 안 풀리나? 나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 나 같은 건 자격이 없나? 나 같은 건 저런 걸 가지면 안 돼나? 꿈도 꾸지 말아야 하나? 노력하면 뭐하나?’

다른 한편으로 분노로 전이될 수 있습니다. ‘도대체 저 사람이 나보다 나은 게 뭔데? 왜 날 무시하는 거야? 밤잠 안 자고, 손해볼 것 다 보고,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데? 재는 뭔데, 얌채같이 저걸 지가 먼저 잡아채가? 왜 나는 안 알아주는데?’

또 다른 한편으로 야심으로 전이되기도 합니다. ‘나도 저 사람처럼 꼭 손에 넣어야지, 두고 봐, 나라고 못할 게 뭐 있어, 조금 더 노력하자. 아직 부족해.’ 야심은 비교적 긍정적인 것 같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자신을 더 혹독하게 채찍질하게 될 것이니까요.

시기심이 불러일으키는 고통을 그저 이렇게 우울로, 분노로, 야심으로만 처리할 일은 아닙니다. 우리는 시기심을 기독교 신앙에 기초해 대응하고 처리하는 방식을 익히고 훈련할 수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 본문의 바울의 이야기에 주목해 보고자 합니다. 바울이 편지한 고린도교회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3장 3절에 의하면, 교회 내에 시기와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선호하는 영적 지도자가 누구인지에 따라 당파가 형성되었고 서로 간에 우열다툼이 일어났습니다. 본문에서 거론된 아볼로파와 바울파 간의 분쟁이 대표적입니다.

사도행전 18장 24절에 의하면, 아볼로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유대인으로 언변이 좋고 성경에 능통했으며 열정적인 전도자였습니다. 바울 못지 않게 좋은 지도자였음이 틀림이 없습니다. 하지만 둘은 서로 다른 기질과 성격을 사람이었을테고, 서로 다른 은사를 받았고, 서로 다른 유형의 리더쉽을 가졌을 것입니다. 성도들도 물론 선호하는 지도자 유형이 각기 달랐겠지요.

그런데 문제는 어디에 있습니까? 시기심에 있었습니다. 그 시기심을 상대방을 적대하고 공격하는 방식으로 처리하는 데 있었습니다. 무엇을 시기했다는 말일까요? 얼마나 많은 성도들의 지지와 추종을 받는지, 교회 내 얼마나 중요한 직책을 맡는지, 교회 내 얼마나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지를 시기했겠지요.

그리고 그 이면에는 누가 더 탁월한 영성을 지녔는지에 대한 비교의식, 누가 더 하나님 앞에 나은 존재로 취급받은 것인지에 대한 경쟁의식이 있었을 것입니다. 영적 탁월성과 우월성에 관한 사안은 고린도교회의 또 다른 문제였던 은사 논쟁으로까지 이어집니다. 어떤 은사를 받은 사람이 더 영적으로 탁월하고 우월한지에 대한 다툼 말입니다.

시기심을 다룰 때 우선적으로 살펴야 할 것은 그것이 우리 자신에 관해 말해주는 정보입니다. 시기심은 우리가 진짜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감추어져 있던 우리 욕망의 실체를 드러내줍니다. 우리가 어떤 욕망에 취약한지를 알려줍니다. 당파적 분열과 다툼에 빠져 있던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사실 무엇을 욕망한 것입니까? 더 많이 인정받고,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더 높은 자리에 서고자 하는 욕망 아닌가요? 사실은 세속적 욕망에 불과한데 신앙의 이름으로 그것을 교회 안에서 드러내고 추고하고 있는 것 아닌가요?

마가복음 10장 35절 이하에서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표현한 욕망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들은 나중에 예수님 영광스러운 자리에 오르시면 자기들이 그 좌우편에 앉게 해달라 요구했습니다. 이건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41절에 보면, 이 이야기를 듣고 열 명의 다른 제자들이 화를 냈습니다. ‘너희가 뭔데 그 자리를 차지하느냐? 그 자리 내 꺼야.’ 이런 의미였습니다.

시기심은 이렇게 우리의 욕망을 직시할 기회를 제공합니다. 동시에 그 욕망을 다룰 기회를 제공합니다. 세속적 욕망은 내려놓고 거룩한 갈망을 취할 기회를 제공합니다. 예수님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을 비롯한 열 두 제자에게 43-45절에서 뭐라 말씀하십니까?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남보다 높아지려는 욕망은 자기를 오히려 나락으로 떨어뜨리지만 남을 높여주는 사랑은 자기를 고양시킬 것이니, 남보다 높아지려는 욕망을 남을 높여주는 사랑으로 전환할 것을 요구하신 것이지요.

바울은 더 큰 인정, 더 큰 위세, 더 큰 영향력을 욕망하는 이들에게 뭐라 말합니까? 고린도전서 3장 3절에서 그런 당파적 분열이 육에 속한 행위라 말합니다. 그 말인즉 그건 영적으로 무감각한 행위이자, 하나님께 무심한 행위라는 의밉니다. 또 5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볼로든, 바울이든 다 주님께서 허락하신 사명을 따라 일했을 뿐이고 당신들이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도록 수고했을 뿐인데, 당신들이 하는 행태는 아볼로의 이름으로, 바울의 이름으로 육신의 일만 도모하는 것 아닙니까?”

누가 더 탁월한 영성을 지녔고, 누가 더 하나님께 더 나은 존재로 취급받는지에 대한 관심에 대해선 바울은 무엇이라 말합니까? 6-8절을 의역하면 이렇습니다. “비교할 걸 비교하십시오. 그저 역할이 다를 뿐입니다. 나나 아볼로나 다 하나님께 속해 있고, 모두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의 극히 일부를 대신할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중요한 건 ‘내가 너보다 나으냐’ 가 아니라 ‘내가 정말 하나님께 온전히 속해 있느냐, 내가 정말 하나님의 사명에 눈을 뜨고 있느냐, 내가 정말 나의 일을 하나님의 일로 받아들이고 있느냐, 내가 정말 하나님의 임재와 역사하심의 통로로 나 자신을 내어드리고 있느냐’ 에 있습니다.”

바울의 권면 속에서 우리는 시기심을 처리하는 중요한 원리 몇 가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첫째, 남보다 높아지려는 관심을 하나님께 속해 있는 진짜 나에 대한 관심으로 전환하는 일입니다. 시기심은 남과의 비교를 먹고 삽니다. 그런데 시기심이 항상 동반하는 이 비교의식은 사실 우리 내면의 시선의 초점을 항상 내가 아니라 남에게 두게 만듭니다.

시기심에 사로잡혀 있을 때 사실 있는 그대로의 진짜 나는 잊혀집니다. 시기심은 나에게서 나를 소외시킵니다. 일부 나 자신에게 시선을 두기도 하지요. 하지만 그때의 나는 진짜 나가 아닙니다. ‘되고 싶은 나’, ‘이렇게 되었으면 하고 이상적으로 바라보는 나’ 입니다. 시기심 속에서 작용하는 비교는 엄밀하게 말하면, ‘되고 싶은 나’ 와 ‘되고 싶은 나와 똑같은 모습을 취하고 있는 남’ 입니다. 

스포츠 선수는 금메달을 딴 자기 모습을 얼마나 자주 그리고 얼마나 간절히 바랄까요? 그런데 만약 금메달이 다른 선수의 손에 쥐워졌다고 해보십시오. 그에게 시기심이 드는 건, 내가 갖고 있어야 할 금메달을 그가 가졌기 때문입니다. 금메달을 든 그에 대한 시선과 금메달을 들고 있는 나에 대한 시선을 내려놓아야 비로소 내가 보입니다. 금메달을 땄든 못땄든 나는 나입니다. 나는 여전히 하나님 앞에 존귀한 나요, 소중한 나입니다.

나는 내가 가진 것이 아닙니다. 나는 내가 갖게 될 무엇인가도 아닙니다. 나는 나입니다. 이제는 있는 그대로의 그 실제의 나를 믿음의 시선으로 다시 보아야 하겠지요. 나는 하나님께 속한 사람,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관심과 사랑 속에 있는 사람, 금메달을 땄든 따지 못했든 그걸 위해 달릴 수 있는 힘과 능력과 재능을 공급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으로 다시 보아야합니다. 소유에서 자기 정체성을 찾지 말고 하나님에게서 자기 정체성을 찾아야겠지요. 이것이 시기심을 다루는 현명한 방식이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시기심을 허용하신 이유입니다.

둘째, 남보다 탁월하고자 하는 욕망을 하나님께 더 깊어지고자 하는 갈망으로 전환하는 일입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주어진 은사와 역할이 철저하게 하나님에게서 주어진 것임을 강조했지요. 그게 탁월한 것인지, 어떤 것인지는 사실 우리의 관심일 뿐입니다. 하나님에게서 주어진 것이면 모두 탁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가 하나님을 더 의지하고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교류 속에서 하나님께 주신 사명을 기뻐하는 데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져 자신에게 주어진 일의 의미를 보다 더 깊이 알며, 그 일을 보다 더 기뻐하며, 그 일에 보다 더 만족해하길,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탁월한 재능을 갖는 일보다 중요한 것은 주어진 재능을 하나님이 주신 비전과 사명을 따라 탁월하게 사용하는 일입니다. 주어진 재능을 탁월하게 사용하려면 그 재능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에 감사하고, 그 재능을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에 사용하길 의도하며, 하나님의 도우심 속에서 그 재능을 꽃피우길 기도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셋째, 시기할 필요가 없는 것을 추구하는 일입니다. 바울은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동역자들이면서, 하나님의 밭이자 집임을 선언합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을 남보다 더 갖고 싶어 하고 눈에 띄이게 남보다 더 높아지기를 원하는데, 그게 함정입니다. 나만 남이 가진 게 보이는 게 아니라 남도 내가 가진 게 보이거든요. 서로 그렇게 잘 보이는 이상 비교와 경쟁은 멈추지 않습니다. 그러면 시기심에서도 헤어나오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애초에 보이지 않는 차원의 것을 추구하면 어떨까요? 오직 하나님과 자기 자신에게서만 확인될 수 있는 차원의 것 말입니다. 영적 성숙이 그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는 지식을 쌓아가는 일입니다. 하나님 안에 온전히 머물러 사는 일이 그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은밀한 친교 속에서 참된 만족과 기쁨을 누리면 사는 일이 그것입니다. 이게 어디 남들 눈에 띄는 일입니까? 나는 볼 수 있으나 남들에게는 보여줄 수 없는 일 아닙니까? 자기 주관적 체험의 영역이니까요. 내가 행복하면 그만이지 그 행복을 남에게 보일 필요는 없으니까요.

물론 영적으로 성숙하면 덕스러운 열매가 나타나고 성령이 충만하면 성령의 열매가 나타납니다. 하지만 그게 어디 이 세상 사람들의 관심사 이던가요? 그들이 성숙한 사람들의 성숙한 행위의 덕은 볼 수 있겠지만 그 덕에 진심으로 감탄하진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내가 억지로 그들에게 베푸는 것도 아니고 손해 보는 것이라 생각하는 것도 아니며 그저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혀 나에게서 자연스럽게 넘쳐 흐르는 것일 뿐인데요. 주변에 성숙한 사람들 분명히 있을텐데, 잘 살펴보세요. 그들이 어디 보상을 바라고 선을 베풀던가요? 사람 마음 사려고 친절하던가요? 자기 속에 충만한 것을 그저 밖으로 드러내면 기뻐할 뿐이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져 누리는 만족과 기쁨이 차오르기 시작하면 남이 가진 것을 시기할 필요는 감소하기 마련입니다. 나보다 높이 오른 남에 대한 시선을 하나님께 속한 진짜 나로 돌리십시오. 남보다 탁월하고자 하는 욕망을 하나님께 더 깊어지고자 하는 욕망으로 전환하십시오. 시기할 필요가 없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이것이 시기심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입니다.

김현주 목사(한성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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