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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죽이는 내일의 구원이란 없다구원론 3(요한계시록 21:1-7)
홍인식 목사(새길교회) | 승인 2023.07.08 02:50
▲ Frans Francken the Younger, 「Mankind’s Eternal Dilemma: The Choice Between Virtue and Vice」 ⓒWikimediaCommons

지옥: 기독교의 2가지 관심 1

그리스도인들이 중요시하고 많이 사용하는 단어 중에 “지옥(地獄)”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기독교 전도지에도 유독 많이 나타나는 단어 중의 하나가 지옥(地獄)일 것입니다. 왜 예수를 믿느냐고 물으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지옥가지 않기 위해서라는 답변을 합니다. 지옥은 믿는 사람들에게는 최대 관심사 중의 하나임에 틀림없습니다.

우리에게 지옥(地獄)은 사후의 형벌의 장소로 인식되고 있고 지옥이 기독교 신앙과 기독교 교리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상당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옥 개념이 구약시대부터 오랫동안 기독교 가르침의 핵심이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요?

프랑스 역사학자 조르주 미누아(George Minois)는 “지옥의 역사”라는 책을 저술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저서에서 “구약 성서에서는 지옥이 나타나지 않는다. 구약성서에서는 적어도 기원전 3세기까지는 지옥이 나타나지 않는다.”라고 주장합니다.

그렇습니다. 문헌을 보면 유대교 내에서 하나님이 죽음 이후에 악인들에게 형벌을 부과한다는 가능성에 대한 내용은 기원전 3세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그렇지만 이것도 당시에 이미 다른 문명(바벨론 유배로 인한 조로아스터교)과의 접촉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언급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지옥 개념은 히브리인들의 사상 내부에서 자생적으로 발전되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또한 지옥에 관한 내용, 예를 들면, 지옥이 불과 벌레로부터 받는 고통의 장소라는 초창기의 모습들은 특별한 배경, 즉 묵시 문학의 배경에서 나타난 것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후 우리가 알고 있는 지옥의 내용들은 민족의 환경, 역사 그리고 문화에 따라 형성되어 왔습니다.

예를 들면 단테 알리기에리(Dante Alighieri)의 ‘신곡’ 1부 지옥 편은 신곡중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부분이자 지옥을 소재로 한 작품 중에서 가장 유명합니다. 사실상 이 작품 이후 지옥, 특히 기독교의 지옥을 다루는 모든 창작물은 크든 작든 이 지옥편의 영향을 받았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입니다.

천당, 천국, 하나님 나라: 기독교의 2가지 관심 2

두 번째로 기독교인들이 관심을 갖고 그리고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는 천국입니다. 천당 혹은 하나님 나라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기독교인들에게 왜 예수를 믿느냐고 물으면 대다수가 천국(천당)가기 위해서 라고 답합니다. 천국 혹은 천당은 믿는 사람들에게는 최대의 관심사입니다.

천국 혹은 천당은 지옥의 개념처럼 사후 보상의 장소로 인식됩니다. 힘든 이 세상에서 예수 믿고 살면 죽음 후에는 고생 안하고 하나님의 보상을 받아서 영원히 잘 살 수 있다고 믿습니다. 천국 혹은 천당은 이처럼 우리에게 사후 보상을 보증해 주는 개념입니다. 천국-보상의 도식이 성립됩니다.

한때(지금도 그러합니다), 천국을 갔다 왔다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유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이야기에 사람들은 열광했습니다. 그들은 천국을 묘사하면서 흙집, 나무 집, 돌로 만든 집, 은과 금으로 만든 집, 금길, 다이아몬드로 만든 집에 대하여 말합니다. 그리고 가장 믿음이 좋은 사람은 화려한 금 혹은 다이아몬드 집에서 살고, 작은 믿음으로 겨우 구원을 받아 천당에 온 사람은 초가집에서 살게 된다고 전하기도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천국에서 어떤 집에서 살고 싶습니까?

이런 형태의 묘사들은 천국-사후보상 이라는 도식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입니다. 지옥의 내용과 마찬가지로 천국 개념도 각 민족의 환경, 역사 전통 그리고 문화에 따라 그 내용을 달리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기독교인들에게 지옥과 천국은 최대의 관심사이며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가 되었습니다.

천당-지옥을 넘어서

천당-지옥(천국-보상/지옥-형벌)은 서로 다르지만 공통점이 있습니다. 첫째, 시간적 이해입니다. 지옥과 천당은 모두 사후, 죽음 이후에 발생한다는 면에서 같습니다.(미래적 사건) 둘째, 보상적 이해입니다. 천당과 지옥은 하나님의 보상과 형벌이라는 측면에서 이해됩니다. 이러한 이해를 살펴보면 모순적입니다. ‘불신지옥, 예수천당’을 외치면서 믿음을 강조하지만 정작 천당행과 지옥행을 나누는 것은 삶의 행위입니다.

이처럼 천국(천당)과 지옥은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의 신앙에 있어서 핵심적인 주제입니다. 지금이 아니라 사후에 이루어지는 천국과 지옥은 기독교인들의 신앙의 모습을 분명하게 규정짓는 개념들입니다. 천국-지옥(천국-보상/지옥-형벌)의 도식은 신앙행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신학이해를 비롯한 신앙적 주제의 전반에 걸쳐 큰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마르커스 보그(Marcus Borg)는 <그리스교 신앙을 말하다>를 통하여 기독교인들이 기독교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넘어서야 할 도식(틀, 패러다임) 2개를 지적합니다. 첫째는 문자주의 도식입니다. 둘째는 천당-지옥 도식입니다. 천당-지옥 도식에 갇혀 있으면 우리의 신앙이해는 매우 좁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마커스 보그(Marcus Borg)는 몇 가지 예를 듭니다. 이런 도식(천국-보상/지옥-형벌) 하에서 성서는 우리를 천당으로 안내해주는 안내서로 이해됩니다. 믿음(예수)은 우리를 천국으로 데려가는 유일한 수단입니다. 죄를 용서받아야 하는 것은 천국의 관문을 통과하는 데 필수적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천당-지옥의 틀을 넘어 우리의 신앙의 이해의 폭을 넓혀 가는 일은 신뢰를 상실하고 쓰러져가는 한국 기독교회의 회복을 위해 매우 중요한 과제입니다. 한국 기독교회가 어떻게 문자주의와 천당-지옥의 틀을 넘어설 수 있는 가는 교회의 미래를 가늠하는 핵심적인 과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새길 교회가 제시하고 있는 “깊은 신앙, 넓은 신학”은 오늘의 시대에서 한국 교회에게 새로운 길 모색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교회가 신앙은 더욱 깊게 그리고 신학은 더 넓게 전개함으로써 한국 교회가 문자주의와 천당-지옥의 틀을 극복하는데 있어서 좋은 모델 교회로 자리 잡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습니다.

구원의 시간성(시제)

한편, 예수를 통한 구원의 개념도 천당-지옥의 도식에 의해서 이해됩니다. 예수의 죽음은 오직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것, 다시 말하면 그의 죽음을 통해 우리가 우리의 죽음 이후에 천국 갈수 있도록 하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이처럼 우리는 대부분의 기독교인이 천국-지옥 도식에 의한 구원의 개념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해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볼 것은 구원의 개념이 가지고 있는 시제, 시간성입니다.  저는 오늘의 말씀 나눔에서 구원의 시간성(시제)에 대하여 집중해 보려고 합니다. 구원은 어떤 시간성 혹은 시제로 표현되고 있습니까?

내일의 구원, 죽음 이후의 구원

우리는 대다수의 기독교인 안에서 구원은 ‘죽음 이후’(post mortem)라는 미래적 시간성(미래 시제)을 갖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우리의 구원은 미래를 향하는 구원입니다. 그것도 죽음을 넘어서 존재하는 시간을 향합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오늘의 삶이 아니라 알 수 없는 시간, 즉 죽음 이후입니다. 내세라는 말로 표현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이 갖고 있는 ‘죽음 이후의 구원’이라는 개념은 우리로 오늘의 삶을 희생의 의미로 받아들이게 만들었습니다. 미래의 시간을 오늘의 시간으로 당겨 와서 오늘의 시간의 의미를 오직 미래를 향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합니다.

최근 한국 사회에서 ‘끌“이라는 접미어를 사용하여 만든 단어가 유행합니다. 그 중에서도 ‘영끌’이라는 단어가 주의를 끕니다. 그것은 ”영혼까지 끌어와서“ 라는 매우 과격한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그리 시급해서 영혼까지 끌어오는 것인지!. 이 말은 주로 아파트를 살 때 사용합니다. 아파트 가격이 한 없이 오르니까 지금 사두지 않으면 영원히(내일) 집을 마련하지 못할 것 같다는 걱정에서 지금(오늘) “나의 영혼까지라도 끌어 모아, 빚을 내어서 투자하겠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대다수 한국의 젊은이들은 부채에 시달리며 살아갑니다. 한국인들은 전반적으로 주택 대출 등으로 인해 발생한 빚을 갚기 위해 수입의 30% 정도를 대출 상환에 사용한다는 이야기도 들려옵니다. 각 가정마다 빚이 없는 집이 없을 정도입니다.

이러한 현실은 미래를 위하여 오늘의 시간을 희생하고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을 제대로 살지 못하면서 잘 사는 내일을 기대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가져 보지만, 오늘 우리 한국 사회가 처해 있는 현실입니다. 내일을 위해 오늘을 희생하는 현실입니다. 지나치게 내일의 의미가 오늘의 의미를 잠식하는 형국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이러한 삶의 모습이 우리로 하여금 경제적 성공을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OECD 국가 중에서 자살률이 가장 높고, 청소년이 행복하지 않으며, 노인 빈곤률이 가장 높으며, 젊은 사람들이 헬-조선을 외치게 만드는 결과를 낳게 하지 않았을까요? 내일을 살기 위해 오늘을 죽이는 모순적인 모습이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 아닐까요?

기독교의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원이 우리에게 죽음 이후의 천당이라는 미래의 시간을 오늘의 삶으로 끌어와서 오늘의 삶을 희생하고 견뎌내라는 소리로 들리는 것은 아닐까요? 로마 제국의 황제들과 귀족들은 기독교를 공인하고 국교로 받아들인 이후에 자신들이 정복한 땅의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다스리면서 교회를 통하여 구원을 선포합니다.

“이 땅에서의 삶이 어렵고 힘들더라도 참고 견뎌라. 참고 견디면 너희들의 죽음 이후의 세계는 평안한 세상이 될 것이다. 아무런 걱정 근심 없이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지배를 받아들이고 억울하다고 생각하더라도 반항하지 말고, 고치려고 하지 말고 그냥 견뎌라. 끝까지 참고 견디는 사람에게는 천국이 보상으로 베풀어 질 것이다.”

“(순간적인)오늘 이 땅위에서의 삶은 큰 의미가 없다. 그저 죽음 이후에 (영원히)계속되는 천국의 삶을 기다리면서 오늘을 견뎌라.”

이러한 구원론, 구원의 시간성을 미래, 즉 죽음 이후로 설정해 놓은 구원론은 오늘의 삶을 의미 있게 살아가도록 하지 못합니다. 오늘의 삶을 ‘소풍’이라고 생각하고 잠시 머물다 가는 무의미하고 덧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들기 쉽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을 외면하게 만듭니다. 이처럼 구원의 시간성을 어디에 두고 있느냐 하는 것은 우리의 삶과 신앙의 모습을 결정합니다.

이렇게 기독교는 구원의 시간성을 미래, 즉 죽음 이후에 한정시켜 놓았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내일의 천국을 바라보면서 오늘을 희생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예수의 구원(하나님나라, 천국)에 대한 생각은 어떠했을까요?

오늘의 구원

예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그에게 구원의 시간성은 어때했을까요? 그는 구원이 언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가르쳤을까요? 예수가 공적 생애를 처음 시작하면서 외쳤던 첫 번째 소리에 관심을 기울여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여기 왔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에 미루어 보면 그에게 구원의 시간성은 현재라는 것이 명확해 집니다.

마태복음 21장과 마가복음 11장에는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여 마르게 하신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가복음은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없었던 이유를 아직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때도 아닌 때’에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찾으신 예수가 잘못한 것이 아닐까요? 열매 맺을 때가 아닌데 어떻게 열매를 맺을 수 있단 말입니까? 

원래 무화과는 한 해에 네다섯 번 열매를 딸 수 있다고 합니다. 그중 첫 열매는 유월절 무교절을 지나 네댓 이레쯤 지나야 익습니다. 맛이 좋지 않은 첫 열매를 부자들은 손도 대지 않고 그냥 나무에서 익어 떨어지도록 내버려둡니다. 부자들이 거들떠보지 않는 그 첫 열매를 따서 가난한 사람들은 그나마 굶주림도 면하고 오랜만에 달착지근한 단맛을 볼 수 있습니다.

먹을 것이 부족해 겨우내 굶주린 사람들에게 무화과 첫 열매는 다른 과일이나 곡식이 나오기 전에 먹을 수 있는 과일이지만, 무화과는 다른 과일들과 달리 미리 따서 놔두며 익힐 수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들 사정과는 상관없이 나무에서 무화과가 완전히 익을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부자들은 기다렸다가 천천히 따 먹어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은 기다릴 수 없습니다.

유대 지배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미래에 오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그러니 오늘은 참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는 가르침을 백성들에게 펼쳤습니다. 예수는 당시의 지배자들을 비판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성전이나 지배자나 왕국이나 제국은 모두 과거의 전통에 뿌리를 두었습니다. 그들이 현재 누리고 있는 특별한 지위는 과거부터 전통적으로 이어져 내려왔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그들의 지배를 받는 사람들에게는 미래의 어느 날, 하나님이 보상해 줄 것이니 그날까지 참고 견디라고 말합니다.”

예수는 이처럼 미래에 이루어지는 하나님나라, 그래서 오늘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미래의 때만 기다리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미래의 때”를 “오늘의 때”로 앞당겨 옵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는 때가 아니라고 하는데도 그 속에서 열매를 찾습니다. 그리고 오늘 열매를 주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마르게 하십니다.

무화과나무는 유대교와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을 상징합니다. ‘때를 기다리라.’고 하면서 오늘의 삶에서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하고 아무런 영향도 발휘하지 못하고 도움도 주지 못하는 종교는 무화과나무처럼 말라버릴 것이라는 경고를 하고 계십니다.

“배고픈 사람들은 한시도 더 기다릴 수 없는 형편이지요. 성전의 때로 하나님의 때를 재는 사람들, 그들에게 가서 무너뜨립시다.”

오늘 기독교는 올지 안 올지 모를 먼 미래의 하나님 나라(구원)를 외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러한 기독교의 구원을 향하여 예수님은 종교의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으로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구원이 이뤄진다고 말하고 있지 않을까요?

예수는 현재 여기에서 살아가는 일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미래에 대한 소망(천국 가는 일) 하나만 붙잡고 성전(종교)에 기대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제 ‘꿈에서 깨라’고 말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오늘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나라(천국), 구원을 만들어가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지도 모릅니다.

예수가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구원의 현재성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오늘의 구원을 외면한 채 그저 참고 기다리며 미래의 구원(천국가기)을 가르치면서 오늘의 상황에서 배고픈 사람들을 외면하는 종교를 보면서, “때가 아니라고 하면서 열매를 주지 않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고 마르게 하신” 예수 행위의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저주받은 무화과나무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내일의 희망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본문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요한계시록의 ‘새 하늘 새 땅’에 관한 기록입니다. 요한계시록의 결론처럼 주어진 본문입니다. 요한계시록의 결론과 같은 본문은 우리에게 미래에 이루어질 희망의 소리를 전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수많은 성서의 기록 중에서도 가장 아름답고 희망적인 내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본문의 주요한 단어들을 보면 우리에게 희망이 솟아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 사라진 이전의 하늘과 이전의 땅, 그리고 바다, 사람들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집,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이 친히 우리와 함께 계시고, 눈물을 닦아 주시고 죽음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고 거저 마시는 생명수 샘물,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오늘의 본문에서 우리는 희망을 봅니다. 내일의 희망을 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 볼 사항이 있습니다. 이러한 희망은 그냥 오는 것이 아닙니다. 7절의 말씀을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이기는 사람은 이것들을 상속받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이 말씀은 로마제국 안에서 제국의 질서에 저항하면서 목숨까지도 버린 사람들을 향한 약속과 희망의 말씀입니다. 단순히 질서에 순응하고 변화의 희망을 버리고 미래에 이루어질 막연한 꿈을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사람을 향하여 주어진 말씀이 아닙니다. 미래에 이루어질 구원(천국)만을 바라보면서 오늘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말씀이 아닙니다.

성서는 예수를 믿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촉구하고 있습니다, “오늘 구원을 이루어라! 하나님나라가 여기에 이뤄지도록 하라. 너희 가운데 이미 존재하고 있는 하나님나라를 발견하고 그 안에서 살아가라. 구원이 오늘 이 땅위에서 이뤄지도록 하라.”

한국의 기독교는 구원을 “미래, 다음 생애, 죽음 이후에 천국을 가는 것이며 예수를 영접하여 죄 용서를 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라고 강조하여 가르칩니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가르침의 문제는 ‘미래의 천국’에 관해서는 말하지만 ‘오늘의 삶’의 방향성에 관해서는 아무런 제시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일이 오늘을 삼킨 형국입니다. 오늘이 없는 사람에게 내일의 희망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의 본문은 우리에게 분명한 내일의 희망을 말합니다. 그러나 오늘이 없는 내일의 희망이 아닙니다. 오늘의 삶에서 하나님나라를 이루기 위해 저항하고 투쟁한 사람에게 열려진 내일의 희망을 본문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과학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내일의 삶”(내세)은 증명이 불가능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기독교는 종교로서 ‘알 수 없는 내일과 다음 생’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가 말하는 구원은 결코 현재를 집어 삼키는 미래로서의 구원이 아니라 오늘의 구원에서 비롯되는 내일의 희망의 의미로서의 구원임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우리는 오히려 알 수 없는 미래만을 향할 것이 아니라 돌아올 수 없는 현재의 삶에서, “오늘 나와 함께 하는 사람들과 시간의 소중함을 보면서, 삶의 현장에서 경험하는 모든 시간들 안에서 하나님나라를 이루면서 이웃들과 공감하고 연대하여 골고루 잘 사는 사회를 이룩함”으로써 오늘의 구원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래야 오늘의 구원으로부터 출발하는 ‘내일의 희망(구원)’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한국 교회가 희망을 잃어가고 있는 한국 사회를 향하여 외쳐야 할 구원의 메시지가 아니겠습니까.

죽은 후 천국 가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세상을 천국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죽은 후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사람처럼 오늘을 살아야 합니다, 죽음 이후 내일의 삶이 아니라, 오늘 삶 속의 죽음이 진짜 문제입니다.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죽음 이후는 하나님에게 맡기고, 우선 오늘의 삶에 관심을 집중해야 합니다. 살아있는 오늘의 삶에서 정의를 말하고 그것을 이뤄내야 합니다. 오늘의 정의에서 내일의 정의에 대한 희망이 나옵니다. 오늘의 구원에서 내일의 구원의 희망이 나옵니다.

마르커스 보그는 2015년 7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납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예상하면서 그의 저서 “Speaking Christian”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나의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 잘 모른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역에 속한 것이기에 하나님께 맡길 뿐이다. 다만 내가 확실하게 아는 것은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살다가 그리스도 안에서 죽는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살고 죽는 것!’은 나의 유일한 희망이다,”

만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고 죽을 수 있다면 우리에게 오늘 구원은 이미 이루어졌고 내일에 대하여 희망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의 구원이 내일의 희망입니다.

홍인식 목사(새길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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