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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한 게 아니라 외로운 것일 수 있다감정을 포용하는 신앙 5(시편 25:14-16)
김현주 목사(한성교회) | 승인 2023.07.11 14:08
▲ 함께 살아가야만 하는 사회 속에서 비교의식은 어쩔 수 없지만 그것이 자신을 망치도록 방치해서는 안 된다. ⓒGetty Images
14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 그의 언약을 그들에게 보이시리로다 15 내 눈이 항상 여호와를 바라봄은 내 발을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실 것임이로다 16 주여 나는 외롭고 괴로우니 내게 돌이키사 나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주일예배에 참여하신 한성교회 모든 성도 여러분을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지금 여기 나 있는 곳에 함께 계신 우리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참된 안식과 기쁨을, 위로와 평안을, 희망과 확신을 가득 내려주시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감정을 포용하는 신앙’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우울한 게 아니라 외로운 것일 수 있다’ 이런 제목으로 함께 은혜 나누겠습니다.

지난 주일에 우리는 우울을 부채질하는 주요한 요인으로 삶의 성공에 대한 지나친 중압감을 꼽았습니다. ‘끝까지 잘 해내겠다’, ‘반드시 성취해 내겠다’ 각오를 단단히 하고, 지나치게 힘주어 사느라 불안과 두려움과 같은 내적 동요는 그저 억누르기만 할 때 우리 마음은 강한 긴장과 압박감으로 그 에너지를 소진할 수밖에 없겠지요. 그렇게 힘은 빠지는데 인생의 큰 숙제 하나 끝내자마자 그보다 더 큰 숙제가 주어진다고 생각해 보세요. 누구라도 번아웃되면서 우울감을 겪게 될 것입니다.

오늘은 우울을 부채질하는 또 하나의 주요한 요인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지나친 기대, 자기 자신에 대한 과도한 비난을 꼽으려고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곱게 보는 게 아니라 삐딱하게 볼 때가 많습니다. 내가 못마땅할 때가 많습니다. 내가 부족하게만 보일 때가 많습니다. 잘할 때는 ‘더 잘해야 할텐데’ 라고 걱정하고, 못할 때는 ‘진짜 잘 할 수 있을까?’라고 불안해 할 때가 많습니다. 약점은 크게 보고, 강점은 작게 볼 때가 많습니다. 일이 안 되면 내 무능으로 책임을 탓하고, 일이 잘 되면 운으로 돌릴 때도 많습니다. 잘났으면 더 잘난 사람들과 비교하며 열등감을 느끼고, 못났으면 잘난 사람들과 비교하며 열등감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평가와 판단의 눈으로 자신을 보기 때문입니다. 평가하고 판단하는 시선이 유발하는 내적 긴장과 압박감, 실로 엄청납니다. 이것 역시 우리 내면의 심리 에너지를 빠르게 소진시켜 버립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무대 위에 서 있는 자신을 한 번 상상해 보십니다. 평가와 판단의 시선은 자신을 움츠러들게 할 뿐만 아니라 극단적인 경우에는 타인으로부터 자신을 고립시켜 버릴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 안에서 작용하는 이 평가와 판단의 시선이라는 건 사실 나를 향한 사회적 시선을 내재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평가와 판단의 시선으로부터 벗어나려면 일단은 이 사회로부터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나도 내가 맘에 안 들어요, 나도 내 인생이 맘에 안 드니까 날 좀 그냥 이대로 내버려 두세요. 더는 누구도 만나기 싫어요. 더는 누구와도 마주치기 싫어요.” 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이렇게 타인들로부터 자기를 고립시키는 행위는 당연히 깊은 외로움을 수반하겠지요. 이내 이 세상에 나만 홀로 덩그러니 남아 있는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히게 될 것입니다. 이 고립감과 외로움이 만약 뇌리를 떠나지 않는 부정적인 생각들과 결합하면 누구라도 쉽게 우울감에 빠져들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때로 우울한 게 아니라 외로운 것일 수 있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는 누구나 저마다의 외로움을 안고 사는지 모르겠습니다. 혼자 있는 시간, 고독을 즐기는 사람이라고 해서 외로움이 전혀 없는 건 아닙니다. 늘 주변에 사람이 많다고 해서, 많은 사람들로 둘러싸여 있다고 해서 이 외로움이 피해가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외롭습니까?

우리는 사회적 시선, 사회적 평가와 판단에 민감합니다. 매우 민감합니다. 우리는 체면을 중시합니다. 눈치를 살피는 데 능합니다. 허례허식에 치우칠 때도 많습니다. 이것은 사실, 우리가 그만큼 사회적 유대 관계를 중요시한다는 의미입니다. 자아인식과 관련해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그 누구로도 환원될 수 없고, 그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고유한 자아가 아닐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이 사회에 유의미하게 받아들여진, 이 사회의 떳떳한 일원으로서의 자기 모습에 더 많은 애착을 갖고 살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타인과의 친밀한 관계 속에서 자신을 인식하길 원하고, 그 관계 속에서 형성된 자기로 살길 원합니다. 우리는 독특하고 유별난 내 모습을 고수하느라 아웃사이더로 남기보다 자기 자신을 주위 사람들과 엇비슷하게 맞춰서라도 중심에 남아있길 원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렇게 간절히 속해 살길 원하는 이 사회의 관계라는 것이 경쟁과 우열다툼, 구별짓기와 차별을 매개로 형성될 때 발생하겠지요. 우리가 이 사회의 일원으로 당당히 자리를 잡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경쟁에서 이겨야 하고, 자기 가치나 자기 우월성을 입증해야 하며, 패배자들과는 명백히 구별되는 승리자로서의 자격을 갖춰야 하는 게 현실 아닌가요? 이런 형태의 일그러지고 왜곡된 사회관계가 친밀한 관계를 맺고자 하는 우리의 욕구, 사회적 유대감에 대한 욕구를 건강하게 충족시켜 줄 리 만무합니다.

우리는 이 사회로부터 버림받거나 소외당하지 않도록, 어떻게든 경쟁에서 이겨 이 사회의 주류로 받아들여질만한 모습을 갖추기 위해 우리 자신을 몰아부칠 때가 많습니다. 이 사회는 우리로 ‘실제의 나’ 보다 ‘이 사회가 기대하는 나’에 더욱 집착하게 만듭니다. 있는 그대로의 진짜 나를 사랑하기보다 반드시 되어야 하는 내가 아니라면서 스스로를 자꾸 비난하게 만듭니다. 극단적인 경우에 우리는 ‘우리 자신도 잃고 우리를 있는 받아들여 줄 사회도 잃어버렸다’ 단정짓고 괴로워할 수 있습니다. 상황이 이러할진대, 우리가 때로 어찌 외롭지 않을 수 있습니까? 어찌 우울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이 외로움이 낳은 우울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요? 친밀한 관계를 맺고자 하는 우리의 욕구에 대응하는 일부터 점검이 필요할 것입니다. 편협하게 일그러진 사회가 제시하는 평가와 판단 기준에 따라 우리 자신을 가혹하게 비난하지 않으면서도 친밀한 관계에 대한 목마름을 해갈할 길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왜곡된 이 사회에 우리 자신을 억지로 구겨 넣지 않고서도 친밀한 관계에 대한 목마름을 해갈할 길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경쟁, 우열다툼, 구별짓기, 차별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대안적인 방식으로 친밀한 관계를 형성할 길을 모색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 길을 어디에서 찾으시렵니까? 그 길이 우리 주 여호와 하나님에게 있고, 기독교 신앙에 기초한 거룩한 삶의 방식에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의 다윗의 고백을 주목해 봅시다. 다윗은 본문 16절에서 하나님께 외로움을 토로합니다. 단순한 외로움이 아니라 괴로움을 수반하는 외로움이었습니다. 근심과 고통을 수반하는 외로움이었습니다.

무엇이 그를 이런 고통스런 외로움에 이르게 했습니까? 시편 25편 2-3절을 통해 추론해 보면, 다윗은 원수들의 공격과 적대 관계 속에서 부끄러움과 수치를 당한 것으로 보입니다. 익히 알려진 바대로 다윗은 자기를 죽이려 혈안이 된 사울 왕을 피해 무려 10년 세월을 도망자 신세로 살아야 했습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무슨 잘못을 저지른 게 아닙니다. 그저 사울 왕이 다윗을 시샘한 것 뿐이었습니다. 사울은 다윗을 향한 백성들의 환호 소리가 듣기 싫었고, 혹시 왕위를 빼앗기지 않을까 두려워 다윗을 죽이려 했던 것입니다.

제 나라에서 마음 편히 살지 못하고,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도망다니며 숨죽여 살아야 하는 신세를 생각하면 얼마나 서러웠을까요? 어디 그뿐입니까? 사울이 다윗에 대해 얼마나 모함을 했을까요? 다윗과 백성들 사이를 얼마나 이간질 했을까요? 다윗은 말 그대로 고립되었습니다. 곁에 남아 편 들어 주는 사람들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제 나라 임금으로부터, 제 나라 백성들로부터 버림받았다 생각하니 그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심지어 더 이상 도망할 곳이 없어 미친 척 블레셋의 용병으로 위장하며 자기 아닌 모습으로 살아야 했던 순간들이 얼마나 치욕스러웠을까요?

다윗은 그래서 외롭고 괴롭다 하나님께 토로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비록 엘리야만큼 깊은 우울감을 호소하진 않았지만, 엘리야처럼 하나님이 아니면 안 되는,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이때 다윗은 무엇을 의지했습니까? 누구를 의지했습니까? 다윗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의지했습니다.

그분은 사람이 아니시지만 기꺼이 사람과의 관계를 청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눈으로 볼 수는 없는 분이시지만 눈에 보이는 사람보다 우리를 더 깊이 꿰뚫어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직접 만질 수 없는 분이시지만 우리 손이 닿지 않는 우리 내면 깊은 곳까지 어루만지시는 분이십니다. 세상은 우리를 버릴 수 있지만 그분은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세상에서 버림받았다 느끼는 순간을 하나님께 속해 있을 기회로 삼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는 경쟁과 우열다툼과 구별짓기로 얼룩진 사회관계와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어떻게 다릅니까? 본문 14절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친밀하심이 이스라엘과 체결하신 당신의 언약을 보이시고 그 언약을 이행하시는 과정으로 드러날 것이라 고백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친밀한 관계는 언약관계로 특징지을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성경은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과 그 약속의 성취 과정을 기록한 책이라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만큼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약속이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언약관계 속에 드러난 하나님의 친밀하심에는 어떤 본질적 특성들이 있습니까? 오늘 본문을 통해 크게 세 가지를 꼽을 수 있습니다. ‘함께 아파하심’, ‘불완전함을 허용하심’, ‘자유케 하심’ 이 그것들입니다. 우선 ‘함께 아파함’ 에 관해 묵상해 봅시다. 출애굽한 이스라엘과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출애굽기 3장 7, 8절에 의하면, 하나님은 애굽의 노예로 신음하는 이스라엘의 고통을 보시고 들으시고 내려오셔서 친히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정리하자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친밀함의 본질은 ‘함께 아파함’에 있습니다. 몇 차례 언급한대로 하나님의 성품 중의 성품인 자비를 영어로 ‘compassion’이라 하지요.  ‘compassion’을 풀어 해석하면 ‘함께 아파함’ 아닙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에 함께 참여하심으로써 우리와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방식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의 죄가 초래한 고통을 당신이 친히 십자가의 형틀로 짊어지시는 방식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친밀한 관계를 맺고자 하는 우리의 본원적인 목마름은 우리의 고통과 아픔을 거리낌없이 공유할 수 있는 대상과 그 고통과 아픔을 막힘없이 공감하는 과정에서 해갈됩니다. 이 세상이 추앙하는 인물상과 자아상에 자신이 얼마나 부합되는지 서로 견주고 자랑하는 그런 관계, 경력과 이력과 직함과 지위에 기대어 서로를 알리는 그런 관계, 강점과 능력과 지식과 부에 기대어 서로를 의존하는 그런 관계 속에서는 결코 경험할 수 없는 친밀함이 함께 아파하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는 풍요하게 경험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외로움이 초래하는 우울은 ‘하나님과 친밀하라’ 는 신호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함은 나와 하나님 사이로만 제한된 은총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고통을 외면치 않으시는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 속에 거하여 사는 성도입니다. 동시에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의 모진 고난을 당하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입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함은 성도이자 교회인 우리의 관계 속에도 드러납니다. 드러나야 합니다.

우리의 관계는 세속의 사회관계와 어찌 다릅니까? 우리들의 관계를 매개하는 것은 과연 무엇입니까? 우리들의 관계 속에 함께 아파함이 있습니까? 서로의 고통에 대한 공감이 있습니까? 교회는 마땅히 관계가 그리워 애쓰고 수고하는 사람을 더욱 외롭게 하는 이 일그러진 세상의 대안공동체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교회는 누구라도 찾아와 마음껏 자기 고통을 토로하고 위로받을 수 있는 곳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언약관계로 드러난 하나님의 친밀하심의 또 하나의 본질은 ‘불완전함을 허용하심’에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계시된 하나님은 당신의 약속을 영원히 기억하시고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이스라엘이 그 약속을 망각하는 순간에도 말입니다. 유혹에 넘어가 배반하는 순간에도 말입니다. 회개해 놓고 또 잘못을 반복하는 순간에도 말입니다. 이것은 용서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약속 이행은 우리의 불완전함, 우리의 죄성, 우리의 불성실함, 우리의 나약함, 우리의 연약함을 무한히 허용하심을 전제로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표명하신 온 인류에 대한 구원의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마침내 성취되었습니다. 그 여정 내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무한히 용서하시며 당신의 약속을 이행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인류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친밀한 관계를 맺고자 하는 우리의 본원적인 목마름은 우리의 불완전함과 약함을 마음껏 드러내도 되는 대상에게서 관용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과정에서 해갈될 수 있습니다. 실패하면 제외시키고, 실수하면 패널티로 낙인을 찍고, 패배하면 배제시키는 사회 관계 속에서는 결코 경험할 수 없는 그 친밀함을 불완전함과 약함을 진실하게 낱낱이 드러냄으로 오히려 다가갈 수 있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는 풍요히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용서로 친밀함을 경험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이 은총이 하나님과 나 사이로만 제한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인 우리들의 관계 속에서도 역사합니다. 아니 역사해야 합니다. 우리들의 관계는 불완전함을 거리낌없이 드러내고 기꺼이 허용하는 관계입니까? 약함을 서로 관용하는 관계입니까? 죄악을 서로 토로하고 함께 회개하는 관계입니까? 서로의 잘못을 용서하고 또 용서하는 관계입니까? 우리교회가 무엇보다 가장 약한 사람들에게 가장 따뜻한 교회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서로 불완전하기에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 기대는 교회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세상에서 약하다는 이유로 버림받은 사람들이 그래도 마음 편히 찾아 그 외로움을 치유받을 곳이 교회 말고 또 어디 있습니까?

언약관계로 드러난 하나님의 친밀하심의 마지막 본질은 ‘자유케 하심’ 입니다. 본문 15절을 보십시오.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물에서 벗어나게 해주실 것임을 확언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상징합니까? 얽히고 매인 것들로부터 자유케 되는 것을 상징합니다. 대적하는 무리들로부터, 두려움과 불안으로부터, 불신과 의심으로부터, 외로움과 괴로움으로부터, 헛된 욕망과 우상으로부터 자유케 되는 것을 상징합니다.

그렇다면 자유케 됨은 그저 놓임과 풀림에 불과합니까? 아닙니다. 새로 매임을 의미합니다. 자유는 ‘~으로부터의 자유’이자 ‘~을 향한 자유’이니까요. 출애굽 이스라엘 백성들과 체결한 언약관계의 최종 지향점은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데 있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우리를 얽어매는 헛된 모든 것들로부터 자유케 되어 하나님께 온전히 속하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께 온전히 속해 있어야,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 교류 속에 있어야, 진정한 나 자신이 되고, 진정한 나 자신으로 풍요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낼 수 있습니다. 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온전히 접붙어 있어야 삶의 풍요한 열매들을 맺을 수 있습니다.

결국 우리를 외롭게 할 뿐인 일그러진 이 세상은 우리를 욕망으로 얽어매고 우리로 이 사회의 소모품이 되게 합니다. 승리자, 강자, 지배자들의 들러리가 되게 합니다. 세상은 진짜 자기가 아니라 세상이 기대하는 가짜 자기로 살라합니다. 하나님만이 오직 우리를 온전히 우리 자신이 되게 하십니다.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은 고유한 우리 자신이 되게 하십니다. 오직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속에서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무한한 가능성을 발견하고 자유롭게 표현하고 구현하고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나 사이로만 국한된 은총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인 우리의 관계 속에서도 이 자유함이 드러날 수 있고, 드러나야 합니다. 교회는 세속의 성공과 세속의 평가기준으로부터 자유한 곳입니다. 세속에서 성공했든 실패했든, 세속에서 잘났든 못났든 관계 없이 있는 그대로 존중받는 곳이 교회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관계는 세상에서 내가 누구로 취급받든, 하나님께 존귀한 사람임을 확인하는 관계이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배제되어 외롭고 서럽고 우울한 사람들이 내가 나라서 좋다 고백할 수 있는 곳이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일그러진 이 사회에 발딛고 사는 우리는 누구나 외롭고 외로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외로움과 우울은 하나님과 친밀하라는 영적 신호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인 우리가 친밀한 관계를 갈망하는 이들의 피난처가 되어야 한다는 사인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속에서 우리는 반드시 함께 아파하고 서로 용서하며 서로 온전한 자기로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김현주 목사(한성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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