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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책감보단 책임감감정을 포용하는 신앙 6(고린도후서 7:10-11)
김현주 목사(한성교회) | 승인 2023.07.17 22:12
▲ 진정한 책임은 하나님의 무한하신 자비와 은혜에 응답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을 지향하는 삶이다. ⓒGetty Images
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11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주일예배에 참여하신 한성교회 모든 성도 여러분을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나 자신보다 나를 더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참된 안식과 평안을 부어 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원합니다.

‘감정을 포용하는 신앙’ 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여섯 번째 시간으로 ‘죄책감보단 책임감’이란 제목으로 말씀의 은혜 함께 나누겠습니다. 오늘 다루고자 하는 감정은 죄책감입니다. ‘죄책감’ 하면 어떤 생각이 떠오르시나요? 엄청난 범죄를 저질러 놓고 그것을 감추고 사는 사람들의 심령을 파고되는 고통스런 감정이란 생각이 드시나요? 맞습니다.

하지만 죄책감이 어쩌다 한 번 일어날까 말까한 큰 범죄에만 해당되는 것일까요? 죄책감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우리의 일상을 폭넓게 지배하고 있습니다. 혹시 가까운 누군가가 뭔가 부탁하면 거절을 잘 못하는 분 계신가요? 거절하고 나면 영 마음이 편치 않아 자꾸 신경이 쓰이는 분 계신가요? 그 마음, 죄책감과 관련 있습니다. 상대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거나 그의 요구대로 따르지 않았을 때, ‘그가 실망해서 나를 멀리하거나 미워하면 어쩌나’ 하는 마음, 다른 사람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누구도 나를 제대로 상대해주지 않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이것들도 죄책감과 관련 있습니다.

혹시 가족에게 닥친 불행이 자꾸 내 잘못 때문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드실 때는 없던가요? ‘내 자식이 이렇게 어긋난 건 내가 잘못 키워서고 내가 사랑이 부족해서지’ ‘내 자식이 이렇게 안 풀리는 건 내가 뭐하나 제대로 뒷바라지 해주지 못해서지’ ‘그때 내가 잘못 선택하고 행동하는 바람에 내 가족이 이렇게 힘든거야.’ ‘그때 내가 그렇게만 하지 않았더도 일이 이렇게까지 되진 않았을텐데. 그때 내가 더 잘했더라면, 조금만 더 노력했더라면 이런 일은 안 생겼을텐데’ 이런 마음, 죄책감과 관련 있습니다. 가까운 이들의 불행이 내 잘못에서 기인했다는 인식, 죄책감입니다. 불행은 곧 나에 대한 심판이라는 인식, 역시 죄책감입니다.

혹시 작은 실수나 잘못 하나에도 마음이 편치 않으신 분 계신가요? 열 가지를 잘했어도 계속 한 가지 실수 밖에 안 보이는 분 계신가요? ‘이것 때문에 일을 다 망쳐버리면 어쩌지? 이것 때문에 사람들이 실망하면 어쩌지? 이것 때문에 내 무능력이 다 들통나버리면 어쩌지? 나 사실 아무 것도 아닌 빈껍데기에 불과한데, 이것 때문에 정말 다 들키면 어쩌지?’ 하는 마음, 모두 죄책감과 관련 있습니다. 완벽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취급하는 마음, 역시 죄책감과 관련 있습니다.

누군가의 실수나 잘못 때문에 화가 나서 하루 종일 기분이 제대로 풀리지 않을 때가 있으신가요? 심지어 이것도 죄책감과 관련 있을 수 있습니다. ‘저 사람이 저 실수만 안 했어도 일이 잘 풀렸을텐데, 저 사람만 잘해 줬어도 일이 잘 풀렸을텐데’ 하는 마음은 ‘혹시 나 때문에 일을 다 망쳐버리면 어쩌지?’ 하는 마음의 위장일 수 있습니다. 이 경우 자기 죄책감을 그저 다른 사람에게 투사한 것일 뿐입니다.

혹시 예배 한 번이라도 빠지면 불안하신 분 있으신가요? 십일조 한 번이라도 빼먹으면 불안하신 분 있으신가요? 거짓말이라도 한 번 하고 나면 가슴이 두근거려서 괴로우신 분 있으신가요? ‘내가 기도를 안 해서 이렇게 힘든 일이 생기는 건가? 그때 내가 그 짓거리를 하는 바람에 하나님이 날 외면하시나?’ 하는 생각이 드시는 분 있으신가요? ‘하나님께 잘 해 드린 게 하나도 없어서 내가 이렇게 궁핍하고 어려운가?’ 하는 마음 드시는 분 있으신가요? 그 마음 모두 죄책감과 관련 있을 수 있습니다.

죄책감과 관련된 이 모든 부정적인 마음들을 제대로 돌보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사람들 눈치 보느라 불안하고 초조해질 수 있습니다. 늘 남들에게 질질 끌려다니는 느낌이 들 수 있습니다. 편하게 쉴 틈이 없어질지 모릅니다. 사소한 일에도 예민하게 반응할 수 있습니다. 작은 비판에도 크게 상처를 입을 수 있습니다.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짜증이 심해질 수 있습니다. 밥맛이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자존감도 떨어지고 심하면 살맛을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죄책감이 도대체 무엇이길래요? 죄책감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심리 기제가 동시적으로 작용합니다. 첫째, 자기 행위를 잘못으로 판단하는 일. 둘째, 자기 잘못이 불행한 결말을 초래했다고 해석하는 일. 셋째, 이런 잘못으로 불행을 초래한 나는 문제가 많은 사람이라고 평가하는 일. 이런 판단, 해석, 평가야 우리 마음의 일반적 습관이니 그 자체로 문제일 순 없습니다.

문제는 그게 비합리적이고 과도할 때이겠지요. 작은 잘못을 지나치게 확대 인식해 단정적으로 정죄하거나, 불행한 일의 원인을 무조건 전부 자기 책임으로 돌려버리거나, 그 잘못 하나로 과도하게 자신을 비난하며 아예 나쁜 사람 취급해 버린다면 그때의 죄책감은 비합리적일 뿐만 아니라 해롭습니다. 그때의 죄책감은 자기 행동을 바로잡는 책임적 삶의 동력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과중한 심리적 압박과 고통만 줄 뿐입니다. 더 나아가 책임회피적이고 부정적인 행동만 일삼게 만들 수 있습니다.

이런 죄책감의 부정적인 심리 매커니즘은 어디에서 기원하는 것일까요? 사실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주로 처벌, 보상, 죄책감을 매개로 교육을 받아 왔습니다. “너 또 그렇게 행동하면 쫓아낼 줄 알아. 너 왜 이렇게 못돼 먹었어. 너 이렇게 밖에 못해? 겨우 이 정도야? 이것도 못하면서 앞으로 어떻게 하려고 해. 네가 이거 먼저 하면 너 원하는 거 들어줄게. 너 때문에 속상해 죽겠다. 너 때문에 힘들어 죽겠어.” 교육이나 훈육을 명목으로 내뱉는 어른들의 이런 통제 언어들이 지나치면 아이들은 자기 행동을 스스로 합리적으로 평가하고 책임적으로 개선해 가는 게 아니라, 자기 행동을 과도하게 비판하기 쉽고, ‘어른들 실망시켜서 사랑받지 못하면 어쩌지’ 라는 두려움을 갖기 쉽습니다. 더 나아가 자기 자신을 늘 문제 많은 사람으로 인식하기 쉽습니다.

이런 죄책감에 우리는 일반적으로 어떻게 대응합니까? 회피하는 데만 급급할 때가 많습니다. 과도하고 부정적이며 비합리적인 죄책감이 불러 일으키는 괴로움이 적지 않고 쉽게 떨쳐내기 어려우니 어떻게든 벗어나려고만 할 때가 많습니다. 회피의 방식은 저마다 상황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자기포기로 회피할 수 있습니다. ‘그래. 본래 나는 이렇게 생겨 먹었어. 차라리 아무 것도 안 하고 사는 게 낳아.’

어떤 경우에는 변명과 남탓으로 회피할 수 있습니다. ‘나보고 더 이상 어쩌라는 거야. 남들 다 그렇잖아. 내가 이렇게 하고 싶어서 했어. 세상이 그렇잖아. 저 사람이 날 이렇게 만들잖아.’ 또 어떤 경우에는 술이나 향략으로 회피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회피는 결국 자기 삶에 대한 책임 회피입니다. 죄책감을 회피하기만 하면 결국 자율적이고 책임적인 삶을 위한 기회마저도 잃어버릴 수 있습니디.

그렇다면 다른 길이 있습니까?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에 기초해 죄책감에 대응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러면 우선 오해부터 풀어야겠지요. ‘기독교 신앙은 인간의 죄를 강조하고 인간을 죄인이라고 규정하는데, 그렇다면 죄책감을 오히려 더 부추기는 것 아닌가요?’ ‘기독교 신앙은 심판을 강조하는데, 그렇다면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조장하는 것 아닌가?’ ‘죄책감 없이 기독교 신앙에서 강조하는 회개가 가능한가요?’

혹시 성도 여러분도 이런 의문을 갖고 계십니까? 기독교 신앙이 우리를 죄로 더 깊이 얽어매고 있습니까? 죄책감을 가중시킵니까? 그렇다면 그리스도 예수께서 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까? 우리에게 십자가 구속의 은혜가 왜 필요합니까?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죄를 없어야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 분이십니까? 오히려 정반대이지요.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지만, 우리 스스로는 도저히 그 죄로부터 벗어날 수도 없지만, 그런 우리라도 그분은 여전히 끈질기게 사랑하셨기에 우리를 죄로부터 구속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과연 죄인인 우리를 심판하러 오셨습니까? 아닙니다. 사랑의 은혜로 자기 몸을 찢고 자기 몸을 버려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죄책감은 기독교 신앙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것인가요? 불필요한 것이던가요? 그건 아닙니다. 다만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죄책감은 죄책감으로 머무르지 않고 애통함으로 전환됩니다. 변형됩니다. 그리고 이 애통함은 회개로 이어집니다. 회개는 곧 하나님을 향한 책임적 삶을 의미합니다. 달리 말하자면 기독교 신앙은 죄책감을 하나님을 향한 책임적 삶으로 전환할 것을 요청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변형시켜 줍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을 통해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입니다.

그 구체적 의미를 확인하게 위해 본문의 배경부터 살펴야겠지요? 고린도교회는 바울이 제2차 선교여행 중에 개척한 교회입니다. 당시 바울의 선교 전략은 주로 디아스포라 유대 공동체의 유대교 회당에 드나드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하는 데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이방인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이방인이었지만 유대인의 하나님, 곧 여호와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도행전은 이들을 가리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라 칭합니다.

회당 옆에 교회를 세우는 형국이니 열렬한 유대교인들 입장에서는 참을 수 없는 일이었겠지요. 그들은 바울을 로마 당국에 고발했습니다. 바울이 로마 제국에 저항하거나 폭동을 일으킨 것은 아니니 큰 문제는 발생하진 않았지만 그가 고린도교회에 더는 머물 수는 없었습니다. 바울은 1년 6개월 정도의 고린도 선교를 마무리하고 에베소로 이동했습니다. 그렇게 바울의 직접적인 목양의 손을 떠난 고린도교회는 이후 그 어떤 교회보다 다채롭고 열광적인 교회로 성장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다양한 영적 문제들을 드러냈습니다.

고린도는 당시 그리스를 대표하는 무역 도시였던만큼 다양한 인종과 계층의 사람들이 끊임없이 오가는 곳이었습니다. 고린도교회 구성원 역시 그랬겠지요. 유대인들보다 이방인들이 더 많았고, 다양한 계층, 다양한 문화적 배경, 다양한 삶의 양식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가 그리스도시다’는 신앙고백 외에는 공통적인 게 없는, 다 다른 사람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아무 문제도 안 일어나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겠지요.

몇 가지 사안을 거론하자면, 비윤리적 생활 습관, 성적 무질서, 성도들의 간의 분열과 갈등, 금욕주의에 따른 결혼과 독신의 문제, 성만찬에 대한 오용, 성령의 은사에 대한 오해와 남용 등을 꼽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에 체류하는 동안 이 현안들에 대해 서신으로 답을 해주었습니다. 그게 고린도전서입니다.

그런데 바울의 이 서신에 대한 이해와 해석을 놓고 또 의견이 분분해졌습니다. 들을 사람은 귀담아 들었겠지만 삐딱하게 굴었던 사람들도 적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 중에는 전부터 줄곧 바울이 전한 복음과 가르침을 악의적으로 왜곡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교회와 바울 사이에 상당한 거리감이 생겼던 것 같습니다. 바울이 첫 번째 서신서를 보낸 후 55년 또는 56년경에 고린도교회를 다시 방문했는데, 그때 일부 성도들이 바울의 방문에 강력하게 반발했습니다. 바울은 교회 내 더 큰 분란을 막기 위해 안타깝지만 서둘러 고린도교회를 떠나야 했습니다.

얼마나 속상했을까요? 바울도 사람인데 별별 생각이 다 들었겠지요. ‘내가 제대로 가르치고 목양했더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텐데. 내가 고린도교회에 더 자주 방문했더라면 이런 문제는 없었을텐데.’ 하는 죄책감도 들었을 것입니다. ‘이대로 상황이 더 나빠지면 어쩌나? 건강하고 성숙한 신앙인들에게도 악영향이 미치게 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있었겠지요. ‘어쩌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이 지경이 되었나?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이 영적 무지와 무능력을 어쩌면 좋은가?’ 하는 애통한 심정도 있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이 마음을 고린도후서 2장 4절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내가 마음에 큰 눌림과 걱정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하지만 바울은 죄책감과 걱정과 애통한 심정에 붙들려 마냥 괴로워하고만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방금 읽은 본문에서 암시하듯 고린도교회에 재차 서신을 보냈습니다. 이른 바 ‘눈물의 편지’로 알려진 이 서신서가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이었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 편지가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가슴을 울린 것만은 분명했습니다. 성도들이 그동안의 잘못을 애통해하며 회개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입니다. 이 기쁜 소식을 듣고 바울이 세 번째로 쓴 편지가 바로 고린도후서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중 일부입니다.

바울은 8-9절에서 자신이 썼던 눈물의 편지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근심을 주었지만, 그 근심이 도리어 유익을 낳았다는 사실에 기쁨을 표현하였습니다. 그리고 10절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과 세상 근심을 대비시킵니다. 여기에서 근심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뤼페오’ 로 그 본래적 의미는 ‘애통하다’ 에 가깝습니다. ‘가슴을 치며 펑펑 울다’라 풀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둘 다 가슴을 치는 애절한 울음이긴 한데, 바울은 신적인 애통함, 곧 하나님과의 깊은 교감 속에서 터져 나오는 애통함과 세속적인 애통함, 곧 세상의 헛된 것들에 마음 빼앗겨 하나님 없이 살다 괴로워 터져 나오는 애통함이 서로 다르다고 말합니다. 전자는 회개에 이르게 하지만, 후자는 사망에 이르게 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교감 속에서 터져 나오는 애통함이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것은 모든 것을 압도해 버리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자비와 은혜에 대한 깨달음과 자기 자신의 유한함과 불완전함에 대한 통렬한 자각이 통합되어 나타나는 애통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치 이런 탄식과 같습니다. ‘거룩하시고 무한하신 하나님 앞에서 나는 정말 한없이 속되고 불완전하고 유한한 존재구나.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나를 당신의 품 안에서 존귀히 품어 주셨구나. 이런 나를 당신의 거처로 삼으셨구나. 하나님 없이 나는 한 순간도 존재할 수 없었는데, 여태 나는 그것을 모르고 살았구나. 이 얼마나 어리석은 삶이었던가?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가?’

하나님과의 접속에서 터져 나오는 애통함은 한편으로는 부끄럽고 다른 한편으로는 너무 감격스러워 터진 울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는 분명 어리석은 죄인이었지만, 그러나 그게 절망스러운 게 아니라 오히려 은혜와 사랑의 하나님 앞으로 더 가까이 나아가려는 열망으로 승화되는 그런 울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는 분명 죄인이지만, 주님은 죄인인 나를 오히려 당신의 거처로 삼으셨다는 벅찬 감격의 울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말한 하나님에게서 기원한 애통함은 앞에서 이야기 했던 죄책감과 얼핏 보기에 유사한 것 같지만 그 기원과 성격이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둘 다 잘못과 죄에 민감합니다. 후회와 회한의 마음도 있고 자책의 마음도 있습니다. 하지만 죄책감은 스스로의 제한된 판단을 기초로 일어난 감정입니다. 하나님 없이 살던 오래된 습관에 따른 자의적 판단을 기초로 일어난 감정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때로 비합리적이고 과도한 자기 비난으로 이어지기 쉽습니다. 절망적 자기 비하로 이어질 위험성이 있습니다. 고통으로부터 회피하는 데만 급급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책임을 회피하는 삶으로 전락시킬 수 있습니다. 살았으나 죽은 것이나 매한가지인 삶으로 전락시킬 수 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에게서 기원한 애통함은 하나님의 자비하시고 은혜로우심에 대한 체험에서 기인합니다. 하나님의 깊으신 사랑에서 기인합니다. 스스로의 제한된 판단이 아니라 무한하신 하나님의 임재의 빛 아래서 자신을 자각함으로써 나타난 감정입니다. 그래서 그 애통함은 물러섬이나 좌절이나 절망이 아니라 회개에 이르게 합니다. 책임 회피의 삶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책임적 삶으로 전환하게 합니다. ‘책임’은 영어로 ‘responsibility’ 라 합니다. 이것은 ‘반응하는 능력’으로 풀어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진정한 책임은 하나님의 무한하신 자비와 은혜에 응답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을 지향하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래서 11절에서 이렇게 덧붙입니다. 의역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하나님을 더욱 간절히 사랑하게 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사는 삶을 더욱 열망하게 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사는 삶이 가장 복되고 행복하고 자유한 삶임을 자랑하게 합니다. 동시에 하나님 없이 사는 삶에 단호하게 만듭니다. 하나님 없이 사는 게 가장 두려운 일이라 고백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게 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헌신하게 만듭니다. 하나님 나라를 거스르는 모든 세력들 앞에 단호히 아니오라고 말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더욱 일치하도록 우리 마음을 진실하게 개방하게 만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은 우리에게 과도한 죄책감을 부여합니다. 그것으로 때로 우리를 자기 뜻대로 통제하려고 합니다. 세상은 ‘내가 원하는 대로 행하지 않으면, 넌 잘못하는 거고, 넌 낙오자가 될 뿐이야. 네가 낙오자가 된 건 전적으로 네 잘못이야.’ 라고 말합니다. 세상은 우리의 죄책감을 이용해 자기 유익을 탐합니다. 광고를 보세요. ‘여기 모유에 제일 가까운 산양유로 만든 분유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내 아이에게 최고의 분유를 주세요.’ 모유를 주지 못하는 엄마들의 죄책감을 자극해서 상품을 팔아 먹고 있지요. ‘우리 가족 건강을 위해서 최고의 제품, 최고의 음식을 준비해 주세요.’ 가족에게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아빠들의 죄책감을 자극해서 상품을 팔아 먹고 있습니다.

세상은 우리의 죄책감으로 우리를 괴롭게 하고 우리를 통제하고 우리를 불행하게 하지만, 하나님의 친밀한 교감 속에서 자신의 유한성과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하심을 자각하며 터져 나오는 애통함, 감격의 눈물은 우리를 회개에 이르게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책임적인 삶을 살아가게 만듭니다. 그래도 자기 잘못과 모자람과 죄를 탓하시려거든 차라리 하나님 없이 살아왔던 무지를 탓하십시오. 나를 탓하시려거든 여전히 하나님을 망각하고 외면하고 있는 나를 탓하십시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무한히 용서하시며 유한한 우리 안에 기꺼이 내주하시는 하나님 품 안에서 애통해 하십시오. 그렇게 애통해 하는 자에게는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위로하심과 새롭게 하심이 반드시 임할 것입니다.

김현주 목사(한성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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