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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선한 일을 하게 하라”(디도서 1:10-16)
이상중 목사(초도제일교회) | 승인 2023.07.23 22:46
▲ 흐르지 않고 소통하지 않는 고인물이 되어 썩어 있는 물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한다. ⓒGetty Images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나요? 저는 개인적으로 12년 만에 열린 지역 축제에 신경이 쓰이기도 하고, 내일부터 2주간 빡빡하게 교회에서 진행될 수련회가 신경 쓰여서인지 육체적으로 무언가를 딱히 하지 않았음에도 피곤함을 느끼며 보냈습니다.

피곤함을 느꼈던 일들을 돌아보면, 제가 컨트롤 할 수 있는 일들도 아니었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들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괜한 걱정을 사서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하는 어리석은 행동 중 하나입니다.

성도는 걱정은 넣어두고, 하나님께 이루어가시는 삶의 흐름에 나를 맡기고, 오늘 하루의 은혜를 구하며 살면 그만입니다. 불안과 두려움 속에 살지 않고, 하나님과 동행하며 평안을 누리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주중에 책을 읽다가 흥미로운 이야기를 발견해서 성도님들께 소개해 드립니다. 소개해 드리기 전에 먼저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수탉은 알을 낳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조셉 니담의 저서 <중국의 과학과 문명>이라는 책에는 중세 유럽에서 자주 행해졌던 동물재판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 법정에서 동물의 재판과 구형이 상당수 행해졌고, 그에 따라 정식으로 사형이 집행되는 일이 빈번하게 있었다.

예를 들어 수탉이 알을 낳는 “가증스럽고 부자연스러운 죄”에 대해 수탉을 앞에 두고 재판을 해서 산 채로 화형을 시켰다는 기록이 있고, 스위스 바젤에서는 1730년에도 이렇게 한 기록이 있다.

당시 해부학적 수준으로는 이런 변이를 설명하지 못해서 벌어진 일일 것이다. 암탉이 알을 낳는다는 경험적 인식이 자연의 섭리라는 이름의 보편적 진리가 되고, 마땅히 암탉만 알을 낳아야 한다는 당위적이고 도덕적인 원칙으로 진화했다. 그렇기에 질서를 어지럽히는 무엄한 닭들은 불태워집니다.”
- <성서, 퀴어를 옹호하다>

자신들이 경험한 일들‘만’이, 자신들이 가진 지식‘만’이 유일하고 최선이라 여겼기 때문에 벌어진 어리석고 황당한 일이었습니다. 자신들의 지식과 경험의 한계를 인정하고, 더 탐구했다면 차별하고, 죽이고, 없애버리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디도서에도 이런 어리석은 일을 시도하는 무리가 나옵니다. 10절입니다. “복종하지 아니하며 헛된 말을 하며 속이는 사람이 많이 있는데, 특히 할례를 받은 사람 가운데 많이 있습니다.” 여기서 ‘할례를 받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은 개종한 유대인들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유대인들은 모세로부터 전해진 율법을 ‘문자 그대로 지켜야만’ 구원을 받는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 있는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강요했고, 유대인의 율법과 문화를 강요하며 공동체 안에 분란을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과 바울의 가르침을 수용하지 못한 유대인들이 자신들이 가진 것을 고집하다 벌어진 일들이었습니다.

이들이 끝까지 지키려고 하는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당시 무지하였고, 찌들었던 노예 생활과 닮지 말아야 할 이방 문화에 젖어 있었기에 이런 잘못된 습관에서 벗어나게 하시려는 의도로 주신 것입니다.

식습관까지 정해준 율법은 광야 생활을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 생명의 안전장치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성경에 나온 이런 식습관에 대해서는 2천 년이 지난 오늘날에는 문자 그대로 지켜지지 않습니다. 노예제도나 여성, 신분 차별과 관련된 말씀들도 그대로 지키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당시 성경이 쓰인 세계의 경험적 한계를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렇게 쓰인 의도, 그 진리를 알기에 하나님의 의도에 맞춰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더 진보한 사랑과 연대의 실천을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바울이 바로 이런 경험적 한계를 인식하고 율법을 새롭게 재해석한 분들입니다. 예수님은 병자를 고치고 죄를 용서하기 위해 안식일 계명을 어기셨습니다. 마가복음 2:24 “바리새파 사람이 예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어찌하여 이 사람들은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

예수님은 2:27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이 아니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다는 말씀은, 죽어버린 유대인의 전통이나 율법을 살아 있는 말씀으로 재해석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할례 없이도 얼마든지 하나님을 믿을 수 있고,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하며 이렇게까지 주장했습니다. “믿음이 오기 전에는, 우리는 율법의 감시를 받으면서, 장차 올 믿음이 나타날 때까지 갇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율법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우리에게 개인교사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의롭다고 하심을 받게 하시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이 이미 왔으므로, 우리가 이제는 개인교사 아래에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갈라디아서 3:23-26)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받아들일 수 없는 불경한 말씀입니다. 창세기 17장에는 아브라함의 자손은 반드시 할례를 받아야 해서 태어난 후 8일 만에 할례를 받아야 했습니다. 바울은 이런 율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할례 없는 구원을 이야기함으로써, 이 문제로 예루살렘 교회와 갈등했습니다. 바울의 이러한 입장이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이 보기에는 전통, 하나님의 말씀, 율법을 무시하는 것으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과 바울이 이런 말씀을 전한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생명을 살리고, 사랑하고 섬기는 하나님의 원래 의도에 오히려 걸림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최초 의도와는 달리 율법이 정죄와 차별의 도구로 전락해 버려 오히려 사람들을 죽이는 도구가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도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11 그들의 입을 막아야 합니다. 그들은 부정한 이득을 얻으려고, 가르쳐서는 안 되는 것을 가르치면서, 가정들을 온통 뒤엎습니다. 12 크레타 사람 가운데서 예언자라 하는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크레타 사람은 예나 지금이나 거짓말쟁이요, 악한 짐승이요, 먹는 것밖에 모르는 게으름뱅이다’ 하였습니다. 13a 이 증언은 참말입니다.”

그들의 입을 막으라고 권면하고 이어 그들을 엄중히 책망하라고 권면합니다. “13b 그러므로 그들을 엄중히 책망하여, 그들의 믿음을 건전하게 하고, 14 유대 사람의 허망한 이야기나 진리를 배반하는 사람들의 명령에 귀를 기울이지 못하게 하십시오.” 사도 바울은 오히려 그들이야말로 ‘진리를 배반하는 사람들’이라고 표현했습니다. 하지만 문자적으로만 따지자면 어떻습니까? 오히려 할례파 유대인들이야말로 진리의 수호자들입니다.

그러니 유대인들이 보기에는 오히려 바울이나 디도가 진리를 배반하는 사람들 같아 보이지 않겠습니까? ‘아니 몇백 년을 이어온 율법을 문자 그대로 지키지 않는다고? 예수님과 당신들의 이야기가 좋다는 건 알겠는데, 이건 좀 아닌데?’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자신의 배움, 지식, 경험의 한계를 인정하고 예수님의 삶과 말씀을 받아들인 이들은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사랑의 길로 갔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과 경험으로 정죄하고, 비난하는 일에 몰두했습니다.

“15 깨끗한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합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더러운 사람에게는, 깨끗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도리어, 그들의 생각과 양심도 더러워졌습니다. 16 그들은 입으로는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지만, 행동으로는 부인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가증하고 완고한 자들이어서, 전혀 선한 일을 하지 못합니다.”

이제는 오히려 그들의 지식이 전혀 선한 일을 하지 못하게 하고 말았습니다. 썩은 물이 되지 않고 흐르는 물이 되어야 하건만 완고해서 고인물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가증하고 완고한 자들이어서, 전혀 선한 일을 하지 못합니다.’ 율법을 주신 이유는 문자를 지키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생명을 지키고, 사랑하고, 연대하고, 선한 일을 할 수 있도록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크레타섬에 모인 할례파 유대인들은 선한 일은 하지 못하고, 자신이 가진 율법을 휘두르면서 공동체를 파괴하고, 가정을 파괴하는 일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아마 이들은 진리를 수호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수호한 것은 진리가 아니라 자신들의 지식과 권위와 경험일 뿐이었습니다. 혹시 우리에게 이런 할례파 유대인과 같은 모습은 없습니까? 말씀을 문자적으로 어리석게 믿으며 사실 문자적으로 믿지도 않습니다만, 정죄하고 차별하는데 휘두르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시면서 이 안에 모든 계명과 율법이 들어 있다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끊임없이 교회 공동체에 선한 일을 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성도는 마땅히 사랑의 열매와 선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디도를 향해 편지를 쓰며 세심하게 지도한 이유는 결국 교회 공동체를 통해 선한 일을 이루어가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도 교회를 아름답게 세워가며, 공동체를 통해 사랑의 열매, 선한 열매를 끊임없이 맺는 축복을 누리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상중 목사(초도제일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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