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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모든 것을 포용한다감정을 포용하는 신앙 7(마태복음 8:2-3)
김현주 목사(한성교회) | 승인 2023.07.24 23:53
▲ Jean-Marie Melchior Doze, 「Christ cleansing a leper」 (1864) ⓒWikipedia
2 한 나병환자가 나아와 절하며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3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진지라

주일예배에 참여하신 한성교회 모든 성도 여러분을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나 자신보다 나를 더 사랑하시는 우리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치유와 변화의 은총을 가득 부어 주시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감정을 포용하는 신앙’ 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마지막 시간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포용한다’ 라는 제목으로 말씀의 은혜 나누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사랑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사랑, 가장 많이 쓰이는 말이나 가장 정의 내리기 어려운 말입니다. 사랑은 좋아하는 감정입니까?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물어볼게요. 남편이나 아내를 365일 24시간 내내 좋아합니까? 솔직히 보기 싫을 때도 있지요? 제 아내도 아마 제가 꼴보기 싫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이제 질문을 바꿔 보겠습니다. 365일 24시간 내내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남편이나 아내 여전히 사랑하시지요? 쑥스러워 입밖으로 소리내어 말하지는 못하더라도 속으로라도 ‘네, 사랑하지요’ 라고 대답하실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사랑은 좋아하는 감정 이상의 것인 게 분명하지요?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닙니다. 잠깐 싫은 감정이 들었다고 사랑이 갑자기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사랑을 아예 중단하는 법도 없습니다. 싫은 감정이 잠시 끼어들었다고 사랑이 사랑이 아닌 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사랑은 감정을 포함하면서 동시에 감정을 넘어선 것입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사랑 때문에 속상하고, 사랑하니까 불안과 걱정이 가시질 않고, 사랑하려다보니 화가 나고, 사랑으로 인해 오히려 외로움도 겪는 것 아닙니까? 하지만 그 사랑이 결국 수없이 오고는 갖가지 감정들을 넘어서게도 하고 그 감정들을 변형시키기도 하지 않습니까?

사랑은 그래서 근원적으로 누구 누구를 또는 무엇 무엇을 위하는 마음이자 이타적으로 지향하는 마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감정보다는 의지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의외로 사랑을 좋아하는 감정 정도로 취급할 때가 많습니다. 깊고 성숙한 사랑이라는 건 가족관계에나 해당되는 것일 뿐 가족 경계 밖에서 깊은 사랑이라는 건 이상에 불과하다고 여길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사랑을 우리 스스로 제한할 때가 많습니다. 사랑을 그저 좋아하는 사람들끼리의 감정 교류로 제약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결국 사랑이 끼리끼리의 끈끈함 정도로 축소될 때가 많습니다.

한 번 생각해 볼까요? 우리는 어떤 사람들에게서 좋은 감정을 느끼고, 어떤 사람들에게서 불편한 감정을 느낍니까? 나와 비슷한 사람들, 곧 자기와 비슷한 처지, 비슷한 관심, 비슷한 생각, 비슷한 생활 방식, 비슷한 모습의 사람들에게서 좋은 감정을 느낍니다. 반면에 나에겐 낯선 사람들, 곧 나와는 다른 처지, 다른 관심, 다른 생각, 다른 생활 방식, 다른 모습의 사람들에게서는 불편한 감정을 느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랑을 좋아하는 감정 정도로 취급해 버리면 우리에게서 사랑은 끼리끼리의 끈끈함 이상으로 확장되긴 없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보자면, 호감가는 사람끼리의 사랑은 자기 사랑의 연장에 불과합니다.

이런 사랑은 기독교 신앙이 말하는 사랑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사랑의 근원적 속성에 관해 가장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는 게 고린도전서 13장이지요. 일명 사랑장이라 일컫습니다. 사랑장에서 사랑의 첫 번째 속성으로 꼽는 게 무엇입니까? 오래참음입니다. 오래 참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사랑의 대상에게서 때로 싫은 감정을 느낀다 할지라도 그것을 견디고 감내하면서 사랑하는 마음을 멈추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좋은 감정을 느끼게 해주는 사람들끼리만 사랑하는 일은 성경이 말하는 사랑과는 무관합니다. 좋은 감정을 느끼게 해줄 때만 사랑하는 일도 성경이 말하는 사랑과는 무관합니다. 정반대도 마찬가입니다. 불편한 감정을 일으키는 사람들과는 대면하지 않으려는 태도, 불편한 감정을 느낄 때마다 회피하는 태도, 이런 태도 역시 성경이 말하는 사랑과는 무관합니다. 

물론 호감가는 사람들끼리의 사랑은 예수님께서 직접 보여주신 사랑과도 무관합니다. 본문의 이야기를 주목해 볼까요? 예수님께서 산에서 하나님 나라 복음에 관해 가르치신 후에 내려오셨을 때 수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각기 다른 필요와 욕구에 따라 그분 곁으로 가까이 다가왔을 테지요. 갖가지 인생의 문제로 고뇌하고 신음하는 사람들이 그분을 먼저 만나려고 실랑이를 벌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수많은 무리들 중 누구에게 먼저 관심을 보이셨던가요? 누구를 가장 먼저 주목하셨나요? 바로 나병환자였습니다.

유대 사회에서 나병에 걸렸다는 건 무엇을 의미합니까? 사람들로부터 격리되고 배제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병환자는 누구와도 교류할 수 없습니다. 누구도 가까이 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영원히 단절된 채로, 고립된 채로 살아야 합니다. 자기 외에 자기를 사랑해 줄 이가 없습니다. 이뿐이 아닙니다. 나병에 걸렸다는 것은 곧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하나님께도 버림받고 사람에게서도 버림받은 사람이 바로 나병환자였습니다. 나병환자에게 사랑이 끼어들 틈이 있었을까요? 나병환자는 사랑에서 완전히 소외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나병환자에게 제일 먼저 관심을 보이셨을 뿐만 아니라 손까지 내미셨습니다. 이게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이 세상 누구도 사랑할 수 없는 사람, 그 누구도 사랑해 주지 않는 사람, 그 한 사람까지도 사랑하신 게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모든 사람에게서 배제된 사람까지 사랑하셨으니 예수님은 우리 모두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이 우리 모두를 구원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에 경계가 어디 있습니까? 제약이 어디 있습니까? 예수님의 사랑은 오히려 모든 경계를 초월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의 여정은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한 날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때에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예수님의 입성을 환호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신 후에 가장 먼저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21장 12절 이하를 보십시오.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하신 일이었습니다.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의 상을 엎으시고 그들을 내쫓으시며 예수님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었다 비판하셨습니다. 그리고 연이어 어떻게 행하셨습니까? 성전에 출입조차 허락되지 않았던 맹인과 저는 자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오려는 사람들을 가로막는 모든 벽을 허물어버리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품 안으로 다가오는 데 더 이상 자격 같은 것은 필요 없다는 의미입니다. 벽을 만든 건 성전에서 장사하던 환전상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내쫓으셨습니다. 이뿐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던 순간 성전의 휘장이 찢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스런 임재의 자리인 지성소로 들어가는 문이 활짝 열렸습니다. 아니 벽체 허물어졌습니다. 이것이 경계를 초월하는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만약 우리에게 그저 혈연 중심의 사랑, 호감가는 사람들끼리의 사랑이 사랑의 전부였다면, 어쩔 뻔 했습니까? 혈연 중심의 사랑, 가족 사랑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나요? 안타깝고 아픈 현실이지만, 우리 마음의 가장 깊은 상처는 대부분 가족관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개성을 희생시키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율성을 빼앗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가장 사랑하기 쉬운 대상들이지만 가장 큰 사랑의 결핍을 남기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렇다고 호감가는 사람들끼리의 사랑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나요? 분열과 차별과 시기와 우열다툼과 당파싸움으로 몰아넣을 때가 없던가요? 내 마음에 드는 내 편이 아니라는 이유로 부당하게 폭력을 행사하거나 폭력을 당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던가요? 무시하고 무시당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던가요? 뺏고 뺏기는 경우가 얼마나 많던가요? 억압하고 억압당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던가요? 공격하기 아니면 회피하기로 일관할 때가 얼마나 많던가요?

예수님의 사랑이 아니면 우리는 누구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그 사랑을 의지하고 그 사랑에 힘입지 않고서는 우리는 누구도 서로를 온전히 사랑할 수 없습니다. 자기 자신조차 제대로 사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사랑에 무능력합니다. 우리가 가슴을 치며 애통해 해야 할 가장 근원적인 문제는 사랑의 무능력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가장 또렷하게 보여주는 게 바로 사랑의 무능력입니다. 곧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여실히 드러내 보여주는 게 바로 사랑의 무능력입니다.

우리는 기껏해야 자기 한 사람 사랑하는 것으로 그칠 때가 많습니다. 그마저도 왜곡된 방식일 때가 많습니다. 자기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지 못해 다른 사람들의 인정에 목말라 있을 때가 많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인정이 필요해서 좋은 사람인 척 유능한 사람인 척 할 때가 많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떠받들어 줄 만한 자리나 위치에 오르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무심하고 무자비할 때가 많습니다. 나 말고 다른 사람을 사랑할 때조차 그저 내 필요를 채우기 위한 선심일 때도 많습니다. 사랑이란 이름으로 권력을 행사하거나 사랑이란 이름으로 집착하는 때도 많습니다.

이런 사랑이 우리를 어떻게 구원합니까? 예수님의 사랑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에는 도대체 무엇이 있습니까? 그 사랑의 이면에 작용하는 힘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을 다시 주목해 볼까요? 나병환자는 예수님께 이렇게 외칩니다.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게 하실 수 있나이다.” 나병환자는 무의식적으로 ‘내가 사랑받지 못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을 게 분명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날 거절하실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을 테고, 그래서 이렇게 ‘주님이 원하신다면 저를 치료해 달라’ 요청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병환자의 요청에 어떻게 응하셨습니까? 먼저 당신의 손을 내미셨습니다. 말보다 행동이 앞서셨습니다. 누구든 제 나름의 논리에 따라 그럴싸하게 사랑의 본질에 대해 말하고 논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랑의 본질이 우리가 직접 경험할 수 있는 실체가 되어 나타나는 순간은 사랑에 대해 말할 때가 아니라 사랑을 행할 때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으셨던 건 사랑의 본질에 대해 말로 우리를 가르치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를 위해 당신 몸을 친히 십자가에 못박히도록 내어주셨기 때문입니다.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통째로 내어주시는 방식으로 우리를 온전히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사랑이 진짜 사랑입니다. 제 마음 속에서만 맴도는 사랑은 아직 사랑이 아닙니다. 보여 주어야 사랑입니다. 경험할 수 있게 해주어야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진짜 사랑을 하셨습니다. 사랑이 말이나 생각에 머무른 게 아니라 당신 자신이 그 사랑이 되셨습니다. 사랑의 본질에 대해 설명해 주신 것이 아니라 사랑이 무엇인지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사랑이시라는 사실을 말해 주신 것이 아니라 경험적으로 알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믿도록 설득하신 게 아니라 그 사랑에 압도되게 하셨습니다.

나병환자에게 손을 내미신 예수님의 사랑에는 또 무엇이 있습니까? 나병이라는 병증 너머의 사람에 대한 인식이 있습니다. 외모가 아니라 중심으로부터 본 사람에 대한 인식이 가로놓여 있습니다. 사회적 시선에 비친 이미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본질에 입각한 사람에 대한 인식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의 나병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손을 내미셨던 것입니다. 그저 나병 걸린 그의 피부에 손을 대신 것이 아니라 나병으로 훼손될 수 없는 그라는 한 고귀한 사람에게 손을 내미신 것입니다. 그래서 나병환자는 예수님의 손길에서 자신을 새롭게 인식할 수 있었고,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바타라는 영화에 등장하는 나비족의 인사말은 ‘당신을 봅니다’입니다. 그 인사말이 참 아름답습니다. 제게는 이렇게 들리거든요. ‘그 누구로도 대체할 수 없는 당신을 봅니다. 그 무엇으로도 환원할 수 없는 당신을 봅니다. 내 인식의 한계 너머에 있는 당신을 봅니다. 내 편견에 갇혀 있지 않은 당신을 봅니다. 내 마음대로 지배할 수 없는 당신을 봅니다. 내 마음대로 훼손할 수 없는 당신을 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기원한 본래 모습 그대로의 당신을 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나병환자를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 인식을 기초로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에는 근원적 동일성에 대한 인식이 있습니다. 사람을 그 뿌리로부터 보는 인식이 있습니다. 바다의 출렁이는 물결과 파도를 보십시오. 제가 가만히 앉아 그걸 바라보는 걸 즐겨 합니다. 정말 신비롭게도 바다의 출렁이는 물결과 파도는 한 순간도 같은 게 없습니다. 비슷할 순 있어도 어느 하나 같은 게 없습니다. 크기, 규모, 높이, 모양, 물방울이 흩어지는 양상이 모두 제각각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물결과 파도는 바다로부터 기원했고, 바다의 일부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형상을 보셨습니다. 사람을 봄과 동시에 제각기 다른 사람의 기원인 하나님을 보셨습니다. 사람을 봄과 동시에 제각기 다른 사람을 소중히 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나병환자의 나병이 그분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장애도 아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에는 또 무엇이 있습니다. 자기 부인이 있습니다. 자기를 보류하고 자기중심성을 넘어서는 행위가 있습니다. ‘원하시면’ 이라고 말하는 나병환자에게 예수님은 ‘내가 원하노니’라고 말씀하시며 그를 치유하셨습니다. 나병환자를 치유하는 그 순간 예수님의 마음 속에선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나병환자의 필요와 욕구가 곧 당신 자신의 필요가 욕구가 되셨습니다. 이것은 자기의 욕구를 보류하고 멈춘 결과입니다. 자기를 의식하지 않고 오직 나병환자의 필요와 고통에만 주의를 기울인 결과입니다.

이게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가가 아니라 그가 내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주의집중하는 마음이 그것입니다. 내가 나이기를 고집하지 않고 그가 나에게서 그 자신이 되도록 내가 그의 배경이 되어 주는 마음이 그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 속에서 자유롭게 우리 자신의 고유의 빛깔과 향기를 드러낼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를 구원했으니 이 사랑에 근거해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는 비록 사랑에 무능력하지만, 우리를 온전히 사랑하신 주님의 사랑을 신뢰하고 받아들일 순 있습니다. 그 사랑을 중심에 품고 그 사랑에 사로잡혀 살기를 기대하며 기다리며 기도할 순 있습니다. 그 사랑을 의지하며 사랑을 연습하고 훈련할 순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4장 7-8절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사랑은 본래 하나님의 것이니 우리가 만약 하나님께 온전히 속해 있다면, 우리가 만약 하나님을 우리 중심에 온전히 모시고 산다면, 사랑은 우리를 통해 가지를 뻗고 열매를 드러낼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이 우리 자신을 온전히 더욱 사랑하게 하고, 우리와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을 온전히 더욱 사랑하게 할 것입니다. 하나님에게서 기원한 사랑은 우리의 외양이 아니라 중심을 사랑하게 할 것입니다. 우리의 이웃의 외모가 아니라 그의 중심을 사랑하게 할 것입니다. 우리의 보기 좋은 면만 아니라 우리의 모나고 미숙하고 모자란 면까지 허용하고 견뎌내며 사랑하게 할 것입니다. 우리의 이웃의 보기 좋은 면만이 아니라 그의 모나고 미숙하고 모자란 면까지 허용하고 견뎌내며 사랑하게 할 것입니다. 좋은 감정 뿐만 아니라 불쾌한 감정까지도 넘어서서 사랑하게 할 것입니다. 모든 것을 포용하는 이 사랑,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시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김현주 목사(한성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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