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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해 무기가 된 고백오직 예수이름으로!(사도행전, 3:6, 4:12)
홍인식 목사(새길교회) | 승인 2023.07.29 01:45
▲ 기독교의 제국화는 십자군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났다. ⓒGetty Images

차라리 종교가 없었다면

“나는 현세를 경시하는 종교 일반의 사상을 이해할 수가 없다. 육체가 밟고 살아야 할 땅은 지옥이고, 하늘 어딘가에 천당이나 극락을 상정하는 것부터가 못마땅하다.

수천 년간을 종교적 절대자의 이름으로 저질러지고 있는 이 어처구니없는 살육과 파괴행위를 보면서 나는 가끔 종교가 없었다면 인간들이 차라리 행복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종교는 ‘영혼’을 구한다면서도 영혼이 깃들어 있는 얼마나 많은 ‘육체’를 파괴해버렸는지.”

고 리영희 교수의 산문집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의 종교 편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차라리 종교가 없었다면” 인류의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종교가 없었다면 자살 폭파범도 없고 9·11 테러도 없고 마녀 사냥도, 십자군 전쟁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전쟁도,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번들거리는 양복을 빼 입은 채 텔레비전에 나와 순진한 사람들의 돈을 우려먹는 복음 전도사도 없었을 것이다.”

리차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에서 나오는 내용입니다. 도킨스는 이 책에서 “종교가 인간사회의 타락을 막는 사회적 순기능을 한다는 믿음이 허구”라고 주장합니다. 그는 “끝없는 전쟁과 편견, 가난, 아동 학대와 성차별, 동성애자 박해 등 인간의 존엄성이 ‘만들어진 신’ 앞에서 어떻게 무너져 갔는지” 따집니다.

도킨스는 자살테러범들은 악행을 저지르는 게 아니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종교의 가르침을 얼마나 잘못 이해했을지 몰라도 자신은 종교의 가르침에 따라 정의로운 행동을 한다고 믿고 행동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이어서 그는 질문합니다. “차라리 종교가 없었다면 인류의 삶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오늘 우리도 묻습니다. “종교가 없었다면 한국 사회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전광훈을 중심으로 한 광화문의 극우 태극기 기독교의 어처구니없는 행위는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성소수자를 비롯한 사회의 주변인들에 대한 차별과 혐오 증오의 소리는 발생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차라리 “종교가 없었다면” 일찌감치 차별금지법은 제정되었고 우리의 사회는 진일보하여 보다 평등하고 인간의 존엄성이 존중되고 연대하는 사회가 되지 않았을까요? 북한을 악마화(惡魔化)하여 적개심과 증오를 불러일으키지 않음으로써 남북관계가 훨씬 평화롭게 되고 또 통일에 더 가까이 다가서지 않았을까요?

이 시점에 이르게 되면 우리는 도킨스의 “종교가 없는 사회가 차라리 더 희망적”이라는 단언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도대체 기독교를 비롯한 종교에 무슨 일이 발생하고 있는 것입니까? “차라리 종교가 없는 세상이 더 좋은 세상일까요?”

기독교와 절대성

세계에는 수많은 종교들이 있습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종교도 수없이 있고 또 우리의 눈에 희안하게 보이는 종교도 있습니다. 아르헨티나에는 축구 선수 ‘디에고 마라도나 Diego Maradona’를 신봉하는 ‘마라도나’ 종교도 있습니다. 각 종교들은 나름대로 자신들이 믿는 신(神)의 개념을 설정하고 있습니다. 물론 신(神)의 존재를 전제하지 않는 종교도 있지만 대 다수의 종교는 신(神) 개념 위에 자리 잡고 있다고 보아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신(神)을 상정하는 대다수의 종교들이 그들의 신(神)에 대하여 내세우는 주장은 대략 2가지로 요약될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는 절대성입니다. 자신들의 신은 절대적이라는 것입니다. 전지전능 무소부재(全知全能, 無所不在) 등의 개념이 이러한 절대성에서 기인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신은 절대적 존재이며 타협의 가능성이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어쩌면 신이 절대적이지 않으면 누가 믿겠습니까.

둘째는 우월성입니다. 자신들의 신(神)이 다른 종교의 신(神)보다 뛰어나다는 것입니다. ‘힘이 더 세다.’라는 것입니다. 이런 우월성을 근거로 해서 전도가 시작되기도 합니다. 내가 믿는 신이 더 세니까 약한 신을 버리고 더 강한 신에게 와야 한다는 주장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결국 절대성과 우월성이라는 2가지 요소는 결론적으로 유일성이라는 종교의 특성으로 귀결됩니다. 내가 믿는 신의 절대성과 우월성은 결국 나의 신이 유일하다는 결론으로 우리는 이끌어 갈 것입니다. 나의 종교만이 유일한 진리를 갖고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위의 언급에서 우리가 생각했던 것처럼 왜 종교가 인간의 생명을 파괴하고 역사를 피로 물들이는 전쟁에 깊이 관여하고 그것에 종교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가의 질문에 우리는 종교의 유일성에서 그 답변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자신을 유일한 진리라고 여기고 있기에 다른 진리의 존재를 용납할 수 없지 않습니까.

유일성에 있어서 기독교와 이슬람교는 다른 종교들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기독교도 그리고 이슬람도 ‘나 외에는 다른 신을 두지 말라’를 외치면서 다른 종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을 이교도로 칭하면서 이들에 대한 학살과 탄압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특히 인류역사에서 기독교가 주류 종교로 등장한 이후에 기독교의 유일성 주장으로 인한 여러 가지 참혹한 학살과 탄압이 이루어진 사실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종교적 유일성이 권력의 탐욕과 함께 어우러졌을 때 발생하는 학살과 억압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를 어둡게 만들었습니다.

1492년 10월 이후 발생한 유럽(스페인과 포르투갈)에 의한 아메리카 대륙의 정복역사는 인류 역사 가운데 가장 참혹한 역사입니다.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가톨릭교회 신부들을 앞세우면서 정복전쟁을 시작합니다. 그들은 정복 전쟁이 거짓 신, 우상을 신봉하고 있는 이교도들을 물리치고 그들을 개종시켜 그 땅을 하나님의 땅으로 만든다는 거룩한(?)소명감에 불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메리카 대륙을 정복하면서 수많은 원거주민(선주민)들을 학살하는데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받지 않았습니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15~16세기 북미 캐나다에서부터 남미 아르헨티나의 땅끝 마을까지 거주하고 있던 원거주민(선주민)의 수는 약 1억 명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100여년에 걸친 정복 시기 후의 인구는 2천만 명 조금 넘었다고 합니다. 줄 잡아도 100년 동안 약 6천만 명의 원거주민(선주민)들이 학살당했습니다. 이런 참혹한 역사가 하나님의 이름 다시 말하면 기독교의 유일성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보면서 오늘 기독교인들은 우리가 믿고 있는 종교의 유일성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매우 심각하고 진지하게 되돌아보지 않으면 안 됩니다.

각 종교가 자신들이 믿고 있는 신의 유일성에 대하여 강조하는 것에 대해서 뭐라 할 수는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웃 종교를 향한 적대감이나 혐오, 증오 그리고 탄압과 살상과 같은 폭력적인 상황에 이르게 한다면 문제가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 기독교는 다른 종교에 비해서 지나칠 정도의 유일성 강조와 그로 인하여 발생하는 폭력적 행위에 대하여 상당히 관대하거나 용인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음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를 정당화 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 “오직 예수!”라는 교리에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읽은 사도행전의 기록에 나오는 베드로의 고백, “이 예수 밖에는, 다른 아무에게도 구원은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주신 이름 가운데 우리가 의지하여 구원을 얻어야 할 이름은, 하늘 아래에 이 이름 밖에 다른 이름이 없습니다.”(사도행전 4:12)는 ‘오직 예수’를 지탱해 주는 가장 중요한 성서기록이기도 합니다.

 “오직 예수!”는 기독교를 특징짓는 가르침입니다. 맞습니다. 기독교에서 예수를 빼면 남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기독교는 오직 예수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종교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직 예수!” 가르침이 기독교를 폭력적 혹은 폐쇄적으로 만들었다는 데에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교리와 가르침임에도 불구하고 길거리 전도자들로부터 자주 듣는 이 소리가 왜 이렇게 폭압적으로 들려지는 것일까요? 저 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사람들에게도 이 가르침은 매우 폭력적으로 들려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외면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구원론

저는 지금까지 3번의 말씀나누기를 통하여 기독교의 구원론에 대하여 메시지 전환을 시도해 보았습니다. ‘무엇으로부터의 구원인가 salvation from what’, ‘무엇을 위한 구원인가? salvation for what?’, 과 ‘구원의 시제 time of salvation’ 을 다루어 보았습니다. 오늘은 이제 구원론의 마지막 말씀나누기로 ‘무엇에 의한 구원인가? slavation by what?’에 대하여 생각보고 있습니다.

기독교에서 말하고자 하는 구원은 예수로부터 오는 구원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예수로부터 오는 구원이 아니라면 우리가 굳이 기독교인으로서 살아갈 이유도 없고 또 기독교회로 모일 이유는 더 없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인들이란 “오직 예수!”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에게 예수는 “처음이고 마지막, alfa와 omega”입니다, 베드로의 고백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이름은 “오직 예수”입니다.

그러므로 이 가르침은 기독교의 핵심적인 가르침입니다. 만일 기독교인이라고 하면서 예수보다 다른 이름을 앞세우고 더 자주 인용하고 있다면 자신의 기독교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되돌아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웃 종교를 존중하고 그 가르침에 귀 기울이면서 그 종교의 지도자들과 대화를 나누고 교류하는 것은 ‘나의 예수’를 좀 더 이해하고 알기 위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서로 간의 우월성을 비교하려는 것이 아니라 나의 종교를 좀 더 이해하고 좀 더 나은 예수-따르미 혹은 예수-인으로 살아가기 위한 것아 아닐까요? 이런 정체성을 분명히 하지 않으면 우리는 쉽게 혼합주의자로 될 수도 있습니다.

저는 새길교회의 일원으로 우리 교회가 표방하고 있는 신학적 원칙(민중신학, 여성신학, 다원신학, 생태신학과 해방신학)을 존중하고 자랑스러워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접근이 결국 우리로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에 동참하여 살아가게 위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의미에서 우리에게는 ‘오직 예수’ 뿐입니다.

그런데 웬일입니까? 이렇게 소중한 “오직 예수”가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유난히 죄를 찾아내는데 애쓰게 하며, 그 죄를 고발하는 일에 매달리게” 만드는 것입니까? 왜 ‘오직 예수’를 부르짖는 일이 사람들을 구별하고 차별하고 혐오하고 정죄하는 일에 열중하게 만드는 것입니까? 왜 ‘오직 예수’는 사람들을 교회 안과 밖으로 믿음 안과 밖으로 구별하고 차별 하는데 만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까?

왜 ‘오직 예수’라는 가르침이 사람들을 예수의 사랑으로 품어 안고 포용하고 아픔을 달랴고 위로하고 격려하고 용기를 북돋아주어 어려운 삶의 현장에서 힘을 내어 사람답게 살아가도록 하는 대신, 주눅 들게 만들고 협박하고 억압하는 일에 열중하게 만들고 있는 것일까요? 과연 “우리에게 주어진 이름은 예수밖에 없다”는 베드로의 고백의 의미가 이런 것입니까?

오직 예수?

오늘의 기록에 주의를 기울여 봅시다, 베드로의 고백이 발생하게 된 배경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우리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이 일명 전도를 하다가 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대장과 사두개파 사람들에 의해서 감옥에 갇힙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유대의 지도자들과 장로들과 율법학자들, 대제사장 안나스,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대제사장의 가문에 속한 사람들이 심문합니다. “그대들은 대체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런 일을 하였소?" 즉 “너희들의 정채가 무엇이냐?”라는 질문입니다.

그 때 베드로가 대답한 말이 오늘의 본문입니다. “예수 밖에는, 다른 아무에게도 구원은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주신 이름 가운데 우리가 의지하여 구원을 얻어야 할 이름은, 하늘 아래에 이 이름 밖에 다른 이름이 없습니다.” 줄여서 우리는 ‘오직 예수’ 이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답변입니다.

주의해서 보면 이 말은 대제사장을 비롯한 외부의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한 다시 말하면 그 사람들을 전도하기 위한 말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예수’라는 고백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고백이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베드로의 ‘오직 예수!’는 외부를 향한 것이 아니라 예수의 제자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한 고백이었습니다.

‘오직 예수’는 외부가 아니라 내부를 향한 외침입니다. 외부 사람들을 향하여 ‘오직 예수’를 강요하면서 예수의 절대성, 우월성 그리고 이에 따른 유일성을 주장하기 위한 고백이 아닙니다. 기독교 역사와 성경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 ‘오직 예수’라는 고백은 전도용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내부결속을 위한  것이었고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고하게 정립하는 고백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시작된 ‘오직 예수’가 예수의 제자들을 향한 것이 아니라 외부의 사람들을 향한 것으로 변질됩니다. 특히 기독교가 로마에 의하여 공식으로 받아들여지고 그리고 제국내의 유일한 종교로 인정되면서 ‘오직 예수’는 내부가 아니라 외부의 적들을 제압하기 위한 수단으로 변하게 됩니다.  외부를 정복하기 위한 수단으로 변질됩니다. 제국의 모습을 띠게 됩니다.

우리는 흔히 기독교가 로마제국을 기독교화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제국이 기독교화된 것이 아니라 불행하게도 기독교가 제국화(帝國化)된 것입니다,(프란츠 힝켈라메르트).  

이제 ‘오직 예수’는 외부의 적들을 정복하기 위한 수단이 되었고 기독교는 정복자의 종교가 되었습니다. 이제 ‘오직 예수’는 종교재판으로 수많은 적대자들을 죽이는 정당한 근거가 되었습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원거주민(선주민)을 수천만 명 살해하면서도 전혀 가책을 받지 않도록 만들었습니다. 살인이 하나님과 예수님을 위한 일이라고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당시 라틴 아메리카 정복에 앞장섰던 신부들은 “인디오들을 향하여 터지는 대포 소리는 하나님을 향한 찬양의 소리이며 인디오들의 화형은 하나님께 바쳐지는 아름다운 향기”라고 노래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믿어지십니까? 왜곡된 ‘오직 예수’가 가져온 참혹한 결과입니다.

누구를 향한 ‘외침’인가?

이러한 역사를 보면서 우리는 이제 ‘오직 예수’의 가르침을 회복해야 할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낍니다. 왜냐하면 오늘 한국 기독교회의 ‘오직 예수’의 가르침이 억압적인 가르침으로 둔갑했기 때문입니다. ‘오직 예수’의 가르침에 대한 왜곡적인 이해는 우리 기독교인들로 예수-따르미 혹은 예수-인으로 살아가지 못하게 합니다. 오늘 과연 우리는 ‘오직 예수’를 외부가 아닌 나를 향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있는 것일까요?

이제 우리는 ‘오직 예수’를 외부가 아닌 우리에게로 향하게 해야 합니다. 과연 우리는 예수를 중심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의 신앙의 핵심이 예수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습니까? 우리는 왜 기독교인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보상을 바라면서 교인우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의 믿음의 시작이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그러므로 하늘의 부르심을 함께 받은 거룩한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의 사도요,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십시오.”(히브리서 3:1)라고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예수’로부터 옵니다. 우리는 오늘의 구원을 이루시는 예수에 의해 구원받은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오직 예수’를 깊이 생각하면서 오늘 우리의 삶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예수의 삶과 사역, 가르침 그분의 행위를 깊이 생각하면서 ‘오직 예수’를 따라 오늘의 삶에서 구원의 행위를 지속합시다, ‘오직 예수’의 생애와 행위 그 분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는 우리를 보면서 세상을 ‘진정 예수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오직 예수’의 회복

베드로는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가다가 한 병자를 만납니다. 병자가 도움을 요청합니다. 배드로가 말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을 그대에게 주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

그는 가진 것이 없었습니다. 그가 가진 것은 ‘오직 예수’ 뿐이었습니다. 그가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입니다. 그래서 그는 병자에게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를 주었습니다.

오늘 한국 기독교회와 믿는 이들은 사람들에게 무엇을 주고 있습니까? 번영, 성공, 만사형통, 좋은 대학, 직장, 건강, 잘되는 나, 긍정적 사고? 무엇을 주고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 중에서 줄 수밖에 없습니다. 기독교회가 가진 것이라고는 ‘오직 예수’ 뿐이라서 그것 밖에는 줄 것이 없을 때 세상을 비로소 우리에게서 희망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구원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면서 세상을 향하여 진정한 의미의 구원을 삶으로 말하는 새길교회로 살아갑시다.

홍인식 목사(새길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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