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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릴 순 없어도 매어진 말아야마음을 새롭게 하는 신앙 2(에베소서 4:21-24)
김현주 목사(한성교회) | 승인 2023.08.08 01:17
▲ 38년된 병자에게 말씀하시는 예수 ⓒGetty Images
21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주일예배에 참여하신 한성교회 모든 성도 여러분을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올 한 해도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 닮아가며 지금 여기에서부터 하나님 나라의 신비와 기쁨을 풍요하게 맛보고 누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원합니다.

마음을 새롭게 하는 신앙을 주제로 말씀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두 번째 시간으로 “버릴 순 없어도 매이진 말아야” 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 나누겠습니다.

마음의 변화를 이야기할 때 자아정체성에 대한 변화를 빼놓을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6장 24절에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안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하셨을 때의 그 자기 부인도 정체성의 변화와 관련 있습니다. 자아정체성이란 무엇인가요? 한 마디로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무의식적인 인식이자 대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무의식적’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나에 대한 인식이라는 게 대개 깊이 숙고하거나 성찰하지 않은 채로 나도 모르게 이뤄진 인식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대체로 나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 나에 대한 다른 사람들 평가,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경험한 정서적 느낌들이 반복적으로 축적되면서 내재화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정말 그런지 제대로 따져 볼 기회조차 없이 마음속에 자리잡아 버린 자아상들의 집합이기 때문입니다.

또 ‘무의식적’이라는 표현을 쓴 건 이 자아정체성이라는 게 나도 모르게 내 모든 의식적 행위에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뭘 하든 그건 내가 하는 것이다’ 라는 의식이 작동하는 한,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생각도 늘 따라다니는 법입니다. 물에 들어가려는 순간, ‘나는 수영을 못해’ 라는 생각이 자동적으로 따라오는 것처럼 말입니다. 지금 하려는 행위가 무엇이냐에 따라 관련된 자아상들이 무의식적으로 작용합니다. 이런 다양한 층위의 자아상들이 통합되면 그게 자아정체성이 되는 것입니다.

반복해 말하지만, 우리의 모든 의식적 말과 생각과 행동의 방향과 속성은 우리의 자아정체성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나는 유능해’라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하는 사람과, ‘나는 무능해’라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하는 사람 양쪽 모두에게 공통의 행동 과제를 주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당연히 ‘나는 유능해’라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의 행위가 보다 적극적이고 진취적이고 담대하겠지요. ‘나는 할 수 있어. 나는 이번에도 해낼거야.’라고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반면에 ‘나는 무능해’ 라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그 행동 과제를 제대로 시도조차 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나는 못해. 해봤자야.’ 이렇게 생각해면서 말입니다.

자아정체성은 쉽게 바꿀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안정감을 위해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려는 속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나는 무능해’라는 자아상에 사로잡히는 순간, 유능하게 행동하는 나는 더 이상 내가 아닌 게 되어 버립니다. 내가 아닌 상태로 존재하는 것을 편안하게 생각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것은 매우 큰 불편감을 초래합니다. 그냥 무능한 나로 존재하는 게 편하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이게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려는 속성입니다.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려는 이 속성이 변화의 큰 걸림돌이 될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한편으로 변화를 원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변화를 두려워하고 어떤 경우에는 심지어 그 변화를 무의식적으로 거부하기도 합니다. 변화된 나 자신에 대한 긍정적인 감도 없고 변화된 내가 경험하게 될 새로운 삶에 대한 전망도 흐릿하면 변화를 원하면서도 동시에 그 변화를 두려워할 수도 있습니다. 이게 다 익숙한 자기를 지속하고 익숙한 자기에 머물러 있으려는 속성 때문입니다.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려는 속성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잠에서 깨어날 때마다 내가 매일 낯설게 느껴진다고 생각해 보세요. 어떻게 살겠어요. 다만 그 그림자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동일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우리 마음은 자아상에 부합되는 정보들만 취사선택해 인지하려는 성향을 보일 때가 많습니다.

앞선 예를 계속 이어가자면, ‘나는 본래 무능해. 나는 무능한 사람이야’ 이렇게 무의식적으로 생각하면, 내가 무능하다는 사실을 입증해 줄만 사건과 정보들에만 무의식적으로 주의를 기울이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내가 무능하다고밖에 판단할 수 없는 사건과 정보들만 더 선명하게 눈에 띌 수 있습니다. 그러면 결과적으로 ‘나는 무능해’라는 무의식적 생각은 더 강화되고 그 생각에 더 고착되게 됩니다. 이게 일종의 악순환이지요.

예수님의 치유 사역 중에는 우리가 이런 부정적인 자아상을 극복하도록 도우시는 사역도 있습니다. 요한복음 5장에 등장하는 38년 된 병자 이야기를 살펴볼까요? 그는 아마 하반신 마비 환자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도 당시 베데스다 연못과 관련하여 떠돌던 기적 신화를 듣고 그 곳을 자주 찾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기적 신화에 따르면 가끔 천사가 내려와 베데스다 연못에 물살을 일으키는데, 그때 가장 먼저 입수하는 사람의 병이 낫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만난 이 병자에게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말도 안 되는 질문 같지요? 하지만 그에게 꼭 필요한 질문이었습니다. 왜 일까요? 걷지 못하는 병을 온전히 치유하려면 그가 가진 자아상부터 넘어서야 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걷지 못하는 병자’라는 무의식적 생각에 고착되어 있으면 어느샌가 ‘걸어다니는 나’는 더 이상 내가 아닌 게 되어 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걸어다니는 나’를 상상하는 게 오히려 더 불편하고 어색한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이런 맥락에서 38년 된 병자는 낫기를 원하지만 낫기를 거부하는 모순에 빠져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병자의 속마음이 정말 그랬는지 확인할 볼까요? 예수님이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물으셨을 때 이 병자는 “예, 지금 당장 낫고 싶습니다.”라고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즉답을 회피했다는 의미입니다. 대신에 그는 자신이 절대로 나을 수 없는 이유를 댑니다. “천사들이 베데스다 연못에 내려와 물살을 일으킬 때 누가 나를 들어다 제일 먼저 재빠르게 옮겨 주어야 하는데,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제가 낫는다는 건 불가능합니다.” 이 병자의 말은 이렇게 들립니다. “나는 그저 병자일 뿐입니다. 그냥 나로 살아야지요. 어쩌겠어요.” 깊은 체념과 절망이 엿보입니다. 낫기를 원하는 것인지 아닌지 헤깔립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그에게 “네 자리를 들고 일어서라” 말씀하십니다. “나는 그저 병자일 뿐이라는 그 자아상을 떨쳐내고 그 자리에 뛰쳐 나와 봐라. 이제는 걷는 너 자신이 되어 보아라”라고 말씀하신 것 아닐까요? 그는 예수님의 말씀에 힘입어서 정말 일어서 보았습니다. ‘나는 걷지 못하는 병자’라는 자아상이 갑자기 사라지거나 폐기된 것은 아닐테지요.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신뢰하는 마음으로 듣고 보니 그 자아상이 순간적으로 지배력을 상실해 버린 것이겠지요. 예수님의 말씀에 자신의 자아상에 작은 균열이 생겼고, 그 순간 그 자아상에 매여 있지 않게 된 것이겠지요. 그래서 한 번 일어서 보는 행동을 용기 있게 단행해 본 것 아닐까요? 그리고 그 결과는 어땠습니까? 그는 정말로 걷게 되었습니다.

이 치유 사역의 핵심을 다시 정리해 볼까요? 예수님은 그저 걷지 못하는 병을 치유한 것이 아닙니다. 아예 걸을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만들었던 자아상에 그가 맞서서 넘어설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은혜가 베데스다 연못가의 38년 된 병자의 자아상에게만 미치겠습니까? 우리의 각양각색의 자아상에도 동일하게 역사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신뢰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그 말씀을 굳게 의지하면서부터 우리의 견고하게 굳어져버린 자아상들에도 균열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곧 우리를 얽어매는 자아상들의 그 지배력이 힘을 잃어가지 않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선포합니다. “예수님에게서 듣고 그분의 가르침을 받았다면,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 이것은 자아정체성의 변화를 의도한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바울이 자아정체성의 변화를 의복을 벗고 입는 행위로 비유로 설명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의 각양각색의 자아상이라는 건 그저 의복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죠. 옷은 옷일 뿐이지 몸은 아니지요. 마찬가지로 자아상은 그저 자아상일뿐이지 실제 나는 아니라는 말로 들립니다.

자아상의 힘은 셉니다. 그건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래도 자아상은 그저 자아상일뿐입니다. 자아상은 나와 관련해 취사선택된 몇 가지 정보를 기초로 내려진 부분적 판단이자 그저 한 생각일 뿐입니다. 그게 특정 시점에 드러난 나의 일부를 가리켜 보여 줄 수는 있으나 나의 전부도 아니도 나의 핵심도 아닙니다. 이게 바울의 의복 비유가 함축하고 있는 바입니다. 바울은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이라는 건 그리스도 예수를 모를 때, 그분을 나의 주인으로 모시기 전까지 잠시 걸치고 있던 옷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떠한 자아상들을 가지고 있느냐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훨씬 중요한 건 따로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우리 내면의 중심에 모시고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그것입니다. 이게 훨씬 중요합니다. 아니 이게 가장 중요합니다. 자아상이 우리에게 미치는 힘이 엄청나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 힘보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에게 미치는 힘이 훨씬 크고 강합니다.

우리는 건강한 자아정체성의 확립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기 쉽습니다. 자칫 그것으로만 만족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에게 핵심은 그게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리스도 예수가 우리에게 누구이시냐가 더 중요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에게 나는 어떤 태도와 자세로 서 있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와 나의 관계는 어떠하냐가 더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자아정체성이 확고하느냐보다 예수 신앙에 확고히 서 있느냐가 훨씬 중요합니다.

자아정체성은 오히려 느슨하면 느슨할수록 좋습니다. 그게 오히려 정신 건강에 이롭습니다. “나는 잘났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보다 “내게는 잘난 면도 있고 못난 면도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게 낫습니다. “나는 못났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보다 “내게는 못난 면도 있지만 잘난 면도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게 낫습니다. “나는 내성적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보다 “내성적일 때가 많지만 필요하면 외향적으로 행동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게 낫습니다.
 
예수 신앙이 확고해지고, 예수님과의 관계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사실 우리의 자아정체성은 느슨해지는 법입니다. 갖가지 자아상들이 가진 지배력이 약화되는 법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다르게 말하고 생각할 여지가 생기고 다르게 행동할 여지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소 우리와는 다른 말과 생각과 행동을 선택할 여지가 생기는 것입니다.

바울의 말을 다시 들어 보십시오. 그리스도 예수를 믿고 알고 관계를 맺고 있으니,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선포하고 있지요? 그리스도 예수를 중심에 주인으로 모신 이후 더 이상 이 옛 사람에 매이지 않게 되었으니,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에 더 잘 어울리는 모습을 취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바울은 이게 자아정체성의 변화의 핵심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제까지 가지고 있던 자아정체성을 완전히 버릴 순 없지만 더 이상 그 자아정체성에 매여 있지 않게 된 상태가 바로 그 핵심입니다. 버릴 순 없어도 더 이상 매이지 않게 된 상태, 바울은 본문에서 이것을 심령의 변화라 표현합니다.

심령의 변화라 표현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 예수를 주인으로 모시면 그분의 영이 우리를 주도하기 시작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믿고 받아들이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는 게 성경의 약속이고 주님의 약속 아닙니까? 그분의 영에 이끌리고 그분의 영에 순종하기 시작하면서 이전의 자아정체성은 느슨해지고, 날 지배하던 그 지배력은 약화됩니다. 그래서 이전에는 취하지 않았던 새로운 모습으로, 새 사람으로 새로운 삶을 시도할 수도 있게 됩니다. 그리스도에 조금 더 가까운 사람으로 살아갈 힘도 생기게 됩니다. 바울은 이런 변화를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성격 유형 검사를 할 때마다 저는 항상 내향적인 성격으로 분류됩니다. 혼자 있는 게 힘들기는커녕 오히려 더 좋을 때가 많고, 스트레스 상황에선 혼자 있는 것을 선호하는 편입니다. 말을 많이 하는 것보다 쓸모 있는 말 아니면 안 하는 것을 선호합니다. 빈말도 잘 못하는 편입니다. 감정을 드러내는 것보다 감추는 게 편합니다. 그게 대체로 저입니다.

하지만 그게 저의 전부는 아닙니다. 그게 제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게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주인으로 모시고 나니 때로 저 아닌 모습으로 살아도 괜찮아졌다는 게 더 중요합니다. 주님을 위해서는 내성적인 나를 내려놓고, 외향적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게 수월해졌다는 게 더 중요합니다. 이건 내성적인 나에 매여 있지 않게 되었다는 말이자, 동시에 주님을 위해 필요하면 외향적인 내가 되어도 괜찮다는 말입니다.

아내에게 종종 미안할 때가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말수도 적고, 감정표현도 적고, 표정도 잘 드러내지 않는 제가 성도들과의 관계 속에서는 왜 그렇게 말도 잘하고, 잘 웃고, 장단도 잘 맞추는지, 아내도 잘 알고 있거든요. 아내 입장에선 서운하기도 하겠지요? 하지만 제 그 모습이 적어도 위선이나 가식은 아니라는 걸 제 아내도 아니까 절 여태 데리고 살겠지요?

예수 믿는다고 사람이 한순간에 확 바뀌는 것 아닙니다. 만약 그런 사람이 있으면 일단 의심해 봐야 하는 것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예수 믿는다고 단번에 예수처럼 살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 솔직하게 말하자면, 옛 사람의 구습을 완전히 버릴 순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진정으로 주인으로 모시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의식한다면, 적어도 옛 사람의 구습이 구습임을 알게 됩니다.

여전히 옛 사람의 구습을 좇아 살 수 없다는 마음도 들기 마련입니다. 주님 모셨으니 옛 사람의 구습이 내 전부는 아니라는 확신도 들기 마련입니다. 옛 사람이 나를 지배하게 그냥 둘 수 없다는 생각도 들기 마련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뜻을 좇는 새 사람으로 살아보겠다는 마음도 들기 마련입니다. 잘 안 되면 해보고 또 해보려는 마음도 들기 마련입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 자아의 참 주인이신 그리스도의 인격적 개입과 도우심을 알아차릴 수 있게 됩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우리 옛 사람의 욕망을 완전히 버릴 순 없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 예수를 주인으로 모시면 적어도 옛 사람의 욕망은 그저 욕망일 뿐 그게 곧 내 전부도 아니고 그게 나를 지배하게 둘 수는 없다는 마음이 들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기꺼이 그 욕망에 거리를 두고 그 욕망을 잠시 보류하고 때로 멈추고 내려놓는 훈련에 참여하고픈 마음이 들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때 우리 자아의 참 주인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인격적으로 관여하시고 도우신다는 사실도 경험하기 마련입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불쑥불쑥 찾아오는 어둡고 파괴적인 우리 옛 사람의 생각을 완전히 버릴 순 없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 예수를 주인으로 모시면 적어도 옛 사람의 생각은 그저 생각일 뿐 그게 내 전부도 아니고 그게 나를 지배하도록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다는 마음이 들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기꺼이 그 생각에 거리를 두고 그 생각에 의문을 품기 마련입니다. 적당히 거리를 두어 휩쓸려 들어가지 않도록 노력하고픈 마음이 들기 마련입니다. 다른 대안적인 생각은 없는지 돌아볼 생각도 하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때 우리 자아의 참 주인이신 그리스도의 말씀에 주의와 관심을 기울이고픈 갈망도 생기기 마련입니다. 주님 말씀이 우리 생각의 방향을 바꾸시고 우리 생각의 한계를 돌파하게 하신다는 사실도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우리의 아픈 기억도 완전히 버릴 순 없습니다. 상처도 완벽하게 아물 순 없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 예수를 주인으로 모시면, 적어도 그 아픈 기억은 기억일 뿐 내 전부는 아니며 그 기억에 계속 매여 살 순 없다는 마음이 들기 마련입니다. 상처가 채 아물지 않았다고 상처에 매여 살 순 없다는 마음이 들기 마련입니다. 그 아픈 기억과 상처보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자비와 사랑이 크시니 견디고 이겨낼 수 있음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버릴 순 없지만 주님 때문에 매이지 않게 되는 이 놀라운 은혜는 옛 사람의 부정적인 면모에만 적용되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자아상들 중에는 긍정적인 자아상도 많습니다. 우리 생활에 보다 유리하고 유용한 자아상도 많습니다. ‘나는 이성적이고 똑똑한 사람이야. 나는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사람이야. 나는 나름 윤리적으로 흠없는 사람이야. 나는 착한 사람이야. 나는 사랑받는 사람이야. 내게는 사랑받을 자격이 충분해. 나는 화를 내는 법이 없는 사람이야. 나는 침착한 사람이야. 나는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

그러나 이런 긍정적인 자아상에 집착하면, 그 자아상이 진짜 나라고 착각하면, 부작용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억압되어 있는, 감추어져 있는 내 그림자를 놓치기 쉽고, 더 이상 변화가 필요없다는 생각에 겸손의 자세를 잃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를 진짜 주인으로 모시면, 그 긍정적인 자아상마저 그저 자아상일 뿐인게 됩니다. 우리의 일부일 순 있어도 전부일 순 없다는 것을 자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자아상에 더 이상 매이지 않게 됩니다. 언제나 겸손하게 주님 앞에 서게 됩니다. 더 성숙하기 위한 노력과 훈련에도 진심이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그게 부정적이든 긍정적인든 내가 누구라는 생각에 너무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누구이든, 우리가 어떤 사람이든, 우리의 진짜 주인은 그리스도 예수이십니다. 우리의 내면의 자아의 주인은 그리스도 예수이십니다. 우리의 진짜 자기는 그리스도 예수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누구이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에게 누구이느냐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우리의 주인되시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어디로 이끄시는지가 중요합니다.

자아정체성은 확고하지 않아도 됩니다.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신앙이 확고해야 합니다. 자아정체성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신앙에 우리 전부를 걸어야 합니다. 우리가 때로 약한 모습으로 서 있어도 우리의 주인되신 주님께서 필요하면 우리를 강하게 다시 세워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때로 초라한 모습으로 풀이 죽어 있고 두려워 주저 앉아 있더라도 우리의 주인되신 주님께서 필요하면 우리를 담대하게 하실 것이고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워 주실 것입니다.

김현주 목사(한성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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