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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되고 싶은가“스스로 종이 되려는 자”(마태복음 20:25-28)
이상중 목사(초도제일교회) | 승인 2023.08.20 23:25
▲ Paolo Veronese, 「Christ Washing the Feet of the Disciples」 ⓒWikimediaCommons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나요? 평안은 외부 상황과 상관없이 나의 안, 내면에서 경험됩니다. 세상이 줄 수 없고, 경험하게 할 수도 없는 완전한 평안을 성도 안에 주셨기 때문입니다.

외부의 상황 때문에 절대로 평안할 수 없으실 것 같습니까? 그건 스스로가 평안하지 않기로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시선을 나의 밖이 아닌 안으로 돌리시기 바랍니다. 평안은 언제나 우리 안에 있었습니다. 평안을 다시 선택하면 됩니다.

또한, 삶을 하나님께 의탁하십시오. 나의 욕망과 목적대로 삶을 억지로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끌어 가시도록 자연스럽게 삶의 흐름에 자신을 놓을 수 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얼마 전 교육부의 한 사무관이 자신의 아이가 왕의 DNA를 가졌다며 담임교사에게 왕자에게 말하듯이 듣기 좋게 말해야 한다는 편지를 보냈다고 합니다. 이 뉴스를 본 성도님들이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5급 행정관인 이 사무관은 수시로 자녀의 담임교사를 협박했고, 후에 교체된 담임교사에게도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직위 해체 시킬 수 있다며 협박했다고 합니다.

며칠 전 새벽기도 예배 시간 15분 전에 술에 취한 한 50대 중반의 건장한 남성이 성도님이 교회로 들어오시는 틈을 타 교회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복도 의자에 앉아서는 “이리 오너라! 이리 오너라~”를 반복해서 외쳤습니다. 그래서 제가 “왜 부르세요?”하고 물으니 술에 취한 남성이 “내가 왕이다!”라고 대답하지 않겠습니까?

이 대답을 듣는 순간 ‘왕의 DNA’ 같은 뉴스를 듣고 어처구니없어하던 기간이었는데 술에 취한 남성까지 자신이 왕이라고 하니 ‘이건 개나 소나 다 자기가 왕이래’라는 생각이 들면서, 저도 “난 황젠데!”라고 받아치게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술에 취한 남성이 “어? 나보다 높네?” 하며 당황해했습니다. 이후에 잘 타일러서 숙소까지 차로 데려다주었습니다. 이분이 낮에 술이 깨셔서 술에 취해 있었던 일들이 생각이 나셨는지 교회에 찾아와 죄송했고, 숙소까지 데려다주셔서 감사했다며 박카스 한 상자를 놓고 가셨습니다.

관상이라는 영화에서 “어찌, 내가 왕이 될 상인가?”라는 대사가 나와서 사람들에게 유행어가 된 적도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대통령은 대통령이 되기 전에 손바닥에 왕자를 새기고 토론회에 나오기도 했습니다.

반복되는 이런 일들을 겪으면서 ‘왜 다들 왕이 되지 못해서 안달일까?’라는 질문이 제 안에서 올라왔습니다.

왕이 되려는 까닭은 무엇일까? 왕과 같이 되고자 하는 욕망을 갖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갑질하고 싶어서 그런가? 갑질 당하지 않기 위해서인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어서? 내가 알고 있는 누군가보다 위에 서서 그 사람을 내려다보고 싶어서 그런가? 여러 질문을 하게 됩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왕이 되고 싶거나, 되고자 하는 욕망을 갖는 여러 가지 이유가 건강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성경에도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싶은, 세상에서 지위를 차지한 사람들처럼 권세를 누리고, 함께 해왔던 동료들을 부리며 살기 원했던 제자들의 이야기가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런 욕망에 사로잡힌 열두 제자를 모아놓고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오늘의 본문입니다. “25 예수께서는 그들을 곁에 불러 놓고 말씀하셨다. "너희가 아는 대로, 이방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을 마구 내리누르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오늘날에도 이런 모습을 많이 봅니다. 나라를 위한다, 지역을 위한다고 말들은 하지만 결국 자신의 지위와 권력을 이용해 사적인 이익을 챙기거나 사적인 이익을 챙겨주다가 대통령, 정치인, 군수가 감옥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이런 갑질이 통치자들에게서만 일어나는 일이겠습니까? 교회 밖에서도 경험되지만, 교회 안에서도 담임목사와 부교역자 사이, 목사와 장로 사이, 성도와 성도 간에도 실제로 일어나고 있고 또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특히나 돈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을에 위치하며 상처를 받고 죽음으로 내몰리고 있습니까? 이런 현상이기에 갑의 위치에 있고 싶고 급기야 ‘왕의 DNA’라느니 술에 의지해 자신을 ‘왕’이라고 소개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통치자가 되었으면 그저 해야 할 일을 하면 되는데 왜 이렇게 갑질을 하고 또 갑질을 당하고 싶지 않아 기를 쓰고 높은 자리에 서기를 원하거나, 자신에게 알량한 정말 작은 힘이라도 있으면 그 힘을 사용하고 싶어서 난리일까요?

이처럼 사람들은 어째서 끊임없이 자신과 타인을 비교하고, 그렇게 비교하며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기를 원하고 또, 사람들에게 확인받고자 할까요?

예레미야 9:23-24 “나 주가 말한다. 지혜 있는 사람은 자기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아라. 용사는 자기의 힘을 자랑하지 말아라. 부자는 자기의 재산을 자랑하지 말아라. 오직 자랑하고 싶은 사람은, 이것을 자랑하여라. 나를 아는 것과, 나 주가 긍휼과 공평과 공의를 세상에 실현하는 하나님인 것과, 내가 이런 일 하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깨달아 알 만한 지혜를 가지게 되었음을, 자랑하여라. 나 주의 말이다.”

늘 무언가를 자랑하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는 이런 세상의 자랑거리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조금이라도 남보다 내가 세상 적으로 나은 게 있으면 자랑하려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살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26 그러나 너희끼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서 위대하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무시당하지 않으려면 무시당할 수 없는 위치에 올라가야 하고, 무시당하기 전에 먼저 무시하는 것이 요즘 세상의 이치입니다. 나를 만만히 보지 못하도록 먼저 기선제압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완전히 다른 방향의 삶을 제시하십니다. 당시의 상식에 어긋나는, 당시의 가치와 다른 말씀을 하셔서 제자들을 당황하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그러셨습니다. 마태복음 5:43-45a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여라’ 하고 말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만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것이다.”

이런 불가능할 것 같은 삶의 태도를 제자들과 성도에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우리가 누구인지를 아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정확하게 아십니다. 그래서 ‘너희를 섬기는 사람’을 넘어 더 불가능한 요구를 하십니다. “27 너희 가운데서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섬기는 사람까지는 그래도 이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섬긴다는 건 적어도 나의 신분을 유지한 채 누군가를 도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섬김은 자신의 품위를 유지할 수 있는 어쩌면 나의 품위를 더 살리는 도구가 되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너희는 남에게 보이려고 의로운 일을 사람들 앞에서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에게서 상을 받지 못한다.”(마태복음 6:1) “너는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자선 행위를 숨겨두어라. 그리하면, 남모르게 숨어서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마태복음 6:3-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자신이 섬기는 일을 만천하에 알리고 또는 도움을 받는 이에게 자신이 도운 사실을 알리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사실상 섬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더 돋보이게 하려는 방편에 불과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행동까지도 섬김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종은 어떻습니까? ‘하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 종은, 남의 집에 매여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노예와 구분되지만, 종종 노예와 구분되지 않는 신분이기도 합니다. 

당시에도 그렇지만 오늘날 누구도 종이 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더 높은 자리, 더 섬김받는 자리에 오르고 싶지 누가 하인이 되고 싶겠습니까? 물론 예수님이 말씀하신 종이 당시 사회의 종 그대로의 역할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종’이 가지는 의미를 생각할 때 섬기는 사람을 넘어, 종이 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 예수님은 어떤 의도로 말씀하셨는지 깊이 생각해 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28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몸값으로 치러 주려고 왔다.”

예수님은 자신의 삶을 빗대어 어떤 종의 역할을 해야 하는지 제자들에게 설명하십니다. 자신을 내어주어 많은 이들을 살리는 길, 목숨까지도 내어주는 삶, 자신을 내어주는 삶이 성도가 걸어가야 할 길임을 알려주고 계십니다.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타인을 위한 삶을 사는 종의 길입니다. 나 자신을 꽃 피우기 위한 삶이 아니라 다른 이를 꽃 피우게 하기 위한 삶이 바로 종의 삶이고, 예수님의 삶이셨습니다.

스스로를 이렇게 내어 줄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 자신이 이미 타인과 비교할 필요도 없는 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완전한 존재이기에 스스로가 증명할 필요도 없고, 타인에게 확인받을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 자신이 태어나기를 ‘하나님의 형상’, 완전한 존재로 태어났습니다. 성경의 제일 첫 장인 창세기 1장에 나오는 창조 이야기 그리고 인간의 창조 이야기는 성경 전체에서 큰 의미가 있습니다. 창세기 1:27, 31 “27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으니,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 “31 하나님이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참 좋았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엿샛날이 지났다.”

이런 완전한 존재이자, 보기에 좋은 존재이기에 하나님의 자녀로서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의 역할을 자신의 편지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받은 성령은 여러분을 다시 노예로 만들어서 공포에 몰아 넣으시는 분이 아니라 여러분을 하느님의 자녀로 만들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성령에 힘입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바로 그 성령께서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을 증명해 주십니다. 또 우리의 마음 속에도 그러한 확신이 있습니다. 자녀가 되면 또한 상속자도 되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을 받을 사람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고 있으니 영광도 그와 함께 받을 것이 아닙니까?”(로마서 8:15-17)

성령은 우리 자신이 잊었던 스스로의 존재 즉, 우리가 누구인지를 다시 확인시켜 주시는 분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완전한 존재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누구인지를 정확히 알고 계셨습니다. 그렇기에 섬기는 삶과 자신을 내어주는 종 된 삶을 향해 나아가라고 말씀하신 까닭입니다.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타인과의 비교, 인정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스스로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이미 완전한 존재임을 깨달을 때 순수한 섬김과 자신을 내어주는 삶이 가능해집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으니 그 말씀에 순종하여 기꺼이 종이 됩시다. 사람들을 향한 종이 되어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누구도 우리를 훼손할 수 없고, 평가할 수 없고, 누구와도 비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타인을 꽃 피우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내가 누구인지를 깨달아, 종이 되는 삶을 향해 나아가는 성도, 초도제일 믿음의 공동체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상중 목사(초도제일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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