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말씀의 잔치 Junger Prediger
소유보다 향유마음을 새롭게 하는 신앙 4(시 34:8; 마 6:26)
김현주 목사(한성교회) | 승인 2023.08.29 00:11
▲ Jacopo Bassano, 「Lazarus and the Rich Man」 (1550) ⓒhttps://www.clevelandart.org/art/1939.68
8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34:8)
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마 6:26)

주일예배에 참여하신 한성교회 성도 여러분을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변함없이 신실하신 주님께서 올해도 우리 삶의 지경을 넓혀주시고, 더 풍요한 복을 내려주시며, 늘 밝은 빛으로 임재해 주시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마음을 새롭게 하는 신앙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네 번째 시간으로 ‘소유보다 향유’라는 제목으로 은혜 나누겠습니다.

삶에서 어떤 복을 기대하시는지요? 이렇게 물어보면 이 시대 많은 사람들이 대체로 물질의 복과 건강의 복을 가장 많이 꼽으십니다. 물질적으로 풍요하고, 건강하면 그게 곧 행복이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대답일 터입니다. 많은 경제 전문가들이 올해 경제 전망이 밝지 않다고들 말합니다. 그래서 연초 경제가 나아지기를 바라는 마음들이 다들 그렇게 큽니다. 그런데 이 경제라는 건 도대체 언제 밝아지는 것일까요? 솔직히 경제가 문제가 아니었던 적이 있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쯤에서 우리 진지하게 물어야 하지 않을까요? 물질적 풍요라는 게 과연 무엇을 의미하나요? 일반적으로는 쓸 돈과 쓸만하고 값진 물건을 내가 넉넉하게 소유하고 있다는 의미이겠지요? 그렇다면 얼마나 소유하고 있어야 ‘풍요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요? 2022년 12월에 통계청에서 발표한 가계금융복지조사 결과에 따르면, 총자산 규모가 50억에서 100억원 사이인 분들에게 “당신은 부자인가요?”라고 질문했을 때, 그 중 44%가 “나는 부자가 아닙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자산 규모와 상관없이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체로 자신이 빈곤하다고 여기는 것으로 보입니다. 물질적 풍요에 대한 기준이라는 게 개인의 주관적 판단과 심리적 수용의 문제라는 게 여기에서 확인됩니다. 아무리 재산이 많아도 만족함이 없으면 부족하다고 느끼겠지요. 객관적 수치상으로 국민 평균 이하의 재산을 가지고 있어도 만족함이 있으면 넉넉하다고 느끼겠지요.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얼마나 소유하고 있느냐를 기준으로만 물질적 풍요를 판단해선 안 된다는 건 매우 분명해 보입니다. 사실 더 많은 소유가 물질적 풍요를 경험하는 유일한 방법은 결코 아닙니다. 더 많은 소유가 아니라 공유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물질적 풍요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책을 좋아합니다. 갖고 싶은 책이 많고 서재에 꽂아두고 싶은 책도 많습니다. 하지만 책은 소유의 대상이 아니라 독서의 대상이지요. 소유하지 않고도 책을 향유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도서관에서 빌려 읽으면 됩니다. 도서관의 책들은 사적인 소유물이 아니라 공유물입니다. 그곳에는 제가 개인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책과는 비교할 수 없이 많고 다양한 책들이 풍요롭고 질서 있게 비치되어 있습니다. 그저 가서 마음껏 읽으면 될 일입니다.

개인적인 소득이 적고, 소유하고 있는 자산이 적어도, 모두가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공공의 서비스들이 확장되면 공동체 전체가 물질적 풍요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더 많은 소유가 물질적 풍요의 전부라고 여기는 건 사실도 아니고 진실도 아닙니다. 사실 세상에는 누구나 공짜로 경험할 수 있는 물질적 풍요가 있습니다. 이곳 대전에는 산이 참 많지요. 저희 집 바로 뒤에도 산이 있습니다. 산에 가면 누구다 다 맑은 공기 공짜로 마시는 것 아닌가요? 대전과 근교의 여러 도시들은 모두 대청호의 물을 마신다고 들었습니다. 우리가 내는 수도세는 정화와 공급 과정에 사용되는 비용이니 사실 그 물은 누구나 공짜로 마시는 것이나 매 한가지입니다. 우리는 보통 물질적 풍요를 소유할 수 있는 돈이나 소비하는 상품에서만 찾기 쉬운데, 우리가 만약 그 물질적 풍요를 우리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자연과의 관계 속에서 찾을 수만 있다면, 우리는 이미 물질적으로 풍요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무엇인가를 소유함으로써만이 아니라 자연친화적 삶으로도 물질적 풍요를 경험할 수 있는 법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를 자연에 빗대어 가르치실 때가 많았습니다. 이 말인즉 예수님은 자연의 이법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법을, 자연의 신비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신비를 경험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를 자연에 빗대어 말씀하셨다는 것은 또 자연과 하나님 나라는 닮은 데가 참 많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도 자연을 비유로 주신 주님의 말씀 중 하나입니다. 예수님은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 말씀하시면서 그 근거로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와 들풀의 풍요로움을 제시하십니다. 공중의 새는 심지도 거두지도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않지만 하나님께서 기르신다 말씀하십니다. 들의 백합화는 수고도 길쌈도 아니하지만 솔로몬의 옷보다 아름답고 화려하다 말씀하십니다. 아궁이에 던져저 불사를 운명에 처해 있는 들풀도 하나님께서 돌보신다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우리 사람을 그냥 두실리 있으냐 반문하십니다.

예수님 말씀을 곰곰히 묵상해 보면, 예수님은 가진 것 하나 없으신 게 분명한데, 날마다 물질적 풍요를 경험하고 계신 것 아닐까요? 이 풍요의 원천은 어디에 있을까요? 그분이 늘 가까이 했던 자연이 가리키고 비추어 보여주었던 하나님께 있지 않습니까? 주님은 특별히 무언가를 소유하지 않고도 이미 부족함 없이 충만한 이 자연과의 깊은 교감 속에서 만물의 창조주이시자, 만유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하심을 맛보아 아셨기 때문에 물질적 풍요도 경험하신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 삶을 되돌아 보면, 사실 우리는 지나치게 인공물, 가공물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우리 생활의 주된 공간들을 살펴 보십시오. 우리는 갖가지 인공물, 가공물로 둘러 싸여 있지 않나요? 그것들 대부분은 따지고 보면 전기 신호에 지나지 않는, 생명 없는 것들입니다. 그것들 대부분은 자본 창출을 위한 만들어진 상품들입니다. 갖가지 물건마다 값의 차이는 있겠지요.

하지만 그 값이란 게 대개 브랜드 가치가 좌우하지 않나요? 브랜드 가치는 돈 많은 사람들의 유행과 선호도일 뿐이지 정말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 값어치 있는 것들을 가능하면 더 많이 소유하고 있어야 우리의 존재 가치가 올라가는 것인가요? 부인할 수 없는 측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소위 말하는 명품에 자꾸 마음이 흔들리는 건, 그게 때로 우리의 가치를 높여주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기 때문 아닌가요?

우리를 둘러싼 그 모든 가공물들은 전부 우리 손으로 만든 것들이긴 합니다. 그것들은 우리를 자아도취하게 만듭니다. 우리 자신의 창조의 위대한 힘을 예찬하게 만듭니다. 그것들을 소유한 우리 자신을 든든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그림자와 위험성이 있습니다. 우리를 둘러싼 그 가공물들이 우리의 우상이 되기도 하니까요.

우리는 어느새 우리 자신을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것과 동일시해 버리는 지경에 이르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를 내가 소유하고 있는 그것과 등가로 여기는 것이지요. 초등학교 아이들이 어느 아파트, 몇 평에 사는지로 서로 편 가르기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게 우리 어른들의 자화상이겠지요.

이렇게 보면, 우리가 만든 가공물들, 돈을 포함한 그 모든 가공물들은 오히려 우리를 더 빈곤하게 만드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 볼 일입니다. 그것들은 우리로 하여금 물질 너머의 영적 세계에 대해선 둔감하게 만드는 것 아닌가요? 하나님의 피조물로서의 자기 본질을 망각하게 만드는 것은 아닌가요? 하나님의 피조 세계에 깃든 그 신성함을 못 보고 만드는 것은 아닌가요? 그것들은 공중의 새를 보고, 들의 핀 백합화를 보며 하나님을 생생하게 경험하셨던 예수님의 영적 감수성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것은 아닌가요? 물질적 부가 정말 우리에게 물질적 풍요를 경험하게 하는 것 맞나요? 자연을 향유할 줄 알고, 그 자연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 줄 아는 것으로부터 물질적 풍요를 경험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30대까지만 하더라도 나물 맛을 잘 몰랐습니다. 나물을 무슨 맛으로 먹을까 생각했습니다. 나물 꼭 챙겨 드시는 어른들이 잘 이해가 안갔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저도 나물이 꽤 맛있습니다. 나물 맛을 알고 나니 음식의 가치는 고급 레스토랑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입맛, 곧 어떤 음식이라도 그 음식을 깊게 음미할 줄 아는 내게 달려 있는 것이라는 사실이 더욱 실감이 납니다.

비싼 음식이어야만 물질적 풍요를 경험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음식의 맛을 깊이 음미할 줄 알면 물질적 풍요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인위적으로 또는 사회문화적으로 책정한 값과 상관 없이 하나님이 이 자연을 통해 허락하신 모든 음식은 저마다의 고유의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가 음식의 그 고유한 가치를 음미하고 향유할 줄 안다면 음식의 풍요함을 경험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소유하지 않고 향유함으로, 소유하지 않고 나눔으로 물질적 풍요를 경험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성경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이야기입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만 오천 명, 여자들과 아이들까지 합하면 더 많은 수가 배불리 먹고도 열 두 광주리나 남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그게 어떻게 가능해가 아닙니다. 핵심은 모두가 배부를 수 있을 만큼 물질적 풍요를 경험하는 데는 소유가 아니라 감사와 나눔이 결정적이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은 한 어린 아이가 기꺼이 내어 놓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하늘로 치켜 올리시며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모두와 나누셨습니다. 그러자 그들 모두는 풍요함을 누렸습니다.

반면에 산해진미를 차려 놓고도 풍요함은커녕 피 비린 내가 진동하는 죽음의 잔치를 벌인 이야기도 성경에 등장합니다. 갈릴리의 분봉왕 헤롯 안피파스의 생일 잔치 이야기입니다. 왕의 생일 잔치이니 얼마나 많은 음식들, 얼마나 값진 장신구들이 그 현장을 가득 메웠겠습니까? 하지만 그 현장에선 생명의 풍요함이 경험된 것이 아니라 죽음의 피가 진동했습니다. 그곳에서 세례 요한의 참수가 벌어졌으니까요.

헤롯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그의 딸이 춤추고 노래했습니다. 이 딸은 자기 동생 빌립에게서 빼앗은 아내 헤로디아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이 일로 헤롯을 강하게 비판했었지요. 헤롯은 흥에 겨워 딸에게 무슨 소원이든 말하면 들어 주겠다 했습니다. 헤로디아는 그때를 틈타 딸을 종용하여 세례 요한의 머리를 달라 요구하게 했습니다. 헤롯왕은 염려는 되었으나 생일 잔치 자리에서 공개적으로 맹세한 일이라 세례 요한을 참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한편으로는 잘됐다 생각했을 터입니다. 세례 요한 때문에 골치가 아팠으니까요.

마태복음 14장을 보십시오. 가장 많은 것을 소유한 현장에서 벌어진 이 죽음의 향연 다음에 연이어 오병이어의 기적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헤롯왕의 생일 잔치는 겉으로는 풍요했으나 속은 비었고, 오병이어의 현장은 겉으로는 빈곤했으나 속은 충만했음을 보여주려 한 것은 아닐까요? 헤롯왕은 누구보다 많이 가졌습니다. 하지만 오병이어를 내놓은 어린 아이보다 풍요한 사람입니까? 헤롯왕은 갈릴리에서 누구보다 큰 권력을 가졌습니다. 하지만 힘없는 가난한 사람들 곁 가까이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그들에게서 하나님 나라의 기적과 신비를 보여주신 예수님보다 큰 권세를 지녔다 말할 수 있습니까?
 
물질적 풍요를 복으로 생각하는 우리가 결코 잊어선 안 되는 것은 물질적 풍요는 물질적 부함에도, 풍부한 소유에도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물질적 풍요는 그 물질을 허락해 주신 하나님의 풍요하심을 맛보아 아는 데 있습니다. 물질적 부를 앞에 두고도 여전히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면 그것은 곧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과 관계 맺지 못한 영적 빈곤함을 반증합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비유를 통해 말씀하셨는데, 누가복음 16장에 소개된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가 바로 그것입니다. 부자는 물질적으로 부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아직도 뭐가 그리도 부족하다 느꼈는지 거지를 보고서도 뭐 하나 나눠 주는 게 없습니다. 그의 부함이 그의 내적 부요함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는 게 이 비유의 핵심 아닐까요? 그의 부함이 하나님과의 관계와는 무관하다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적은 것을 가지고도 하나님께 감사하며 우리를 사랑하시며 돌보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안다면, 바로 거기에서 물질적 풍요함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풍요함 속에서 우리는 진정으로 행복하다 고백할 수 있습니다. 출애굽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하는 동안 하나님께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허락해 주신 것도 진정한 물질적 풍요가 무엇인지를 경험하고 깨닫게 하려는 데 그 진짜 이유가 있습니다. 앞으로 들어가 살게 될 가나안 땅은 풍요의 땅입니다. 비옥한 토지로 농사만 잘 지으면 배불리 먹고도 남을 수 있는 땅입니다. 많이 거두면 거둘수록 대접받는 땅입니다.

그러나 물질의 부함에 취해 자칫 하나님을 망각할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는 땅입니다. 물질적 부를 진정한 풍요라고 착각할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는 땅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광야 생활하는 동안 소유하지 않고도 쌓아놓지 않아도 배부를 수 있는 비결을 경험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딱 하루 먹을 만큼의 만나를 매일 매일 내려 주셨습니다. 이 말인즉 우리 먹을 양식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고, 매일 매일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힘입어 사는 것이 풍요의 원천임을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진정으로 행복하고 진정한 의미의 물질적 풍요함을 경험한 사람 중 하나였던 바울의 이야기를 보십시오. 빌립보서 4장 11-13절입니다.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바울의 이 고백에 담긴 핵심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으로 풍요하니 어떤 형편에서도 자족하고 풍요함을 경험할 줄 알게 되었다는 말 아닙니까?

바울의 이 말이 낯설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에 기반한 삶에 지나치게 편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경제 논리가 우리 사고 방식을 점유해 버렸고, 우리 정체성을 좌지우지하게 되어 버렸습니다. 이 세상은 경제적 부유함은 좋은 것이고, 경제적 빈곤함은 나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곧 내가 소유한 것이라 생각하고, 나는 곧 내가 소비하고 있는 그것으로 표현된다고 생각합니다. 소유와 소비가 우리 삶의 주된 양식이 되어버렸습니다.

세상은 지식과 정보를 많이 소유하는 게 곧 지성이고 지식과 정보를 많이 소유한 사람을 지성인이라고 말합니다. 이 세상은 지식이 많은 것과 지혜롭게 사는 것을 잘 구분하지 못합니다. 마르쿠제는 이렇게 경제 논리와 원리가 삶의 모든 영역을 주도하는 삶을 일차원적 삶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우리의 존재도 다차원적이고 우리의 삶도 다차원적인데, 그저 일차원적으로 살 뿐이라면 그게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을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물질적 부를 곧 물질적 풍요로 알고 사는 이 세상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물질적 부함을 구하기에 앞서 성령의 충만함을 구해야 하겠지요. 물질을 소유하는 데 힘쓰기에 앞서 물질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헤아리며 감사하는 데 힘써야 하겠지요. 가공물에 둘러싸여 있기보다 하나님의 신비가 깃든 자연을 향유하고 자연을 돌보듯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아는 일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하겠지요. 이 말씀을 가슴에 품고 실천함으로써 진정한 풍요와 행복을 누리며 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원합니다.

김현주 목사(한성교회)  webmaster@ecumenian.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김현주 목사(한성교회)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종로구 대학로 19 한국기독교회관 503호  |  제호 : 에큐메니안
대표전화 : 070-4252-0176  |  팩스 : 0303-3442-0176  |  등록번호 : 서울 자 00392  |  등록일 : 2012.10.22
발행인 : 홍인식  |  편집인 : 이정훈  |  청소년보호책임자 : 홍인식  |  E-mail : webmaster@ecumenian.com
Copyright © 2024 에큐메니안.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