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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큐메니컬 운동의 주체와 사회과학적 태도에 대하여황용연 목사님께 보내는 마지막 편지
이훈삼 목사(주민교회) | 승인 2023.09.02 00:09

1. NCCK 총무 선출과정에서 드러난 에큐메니컬 운동의 현실을 보면서 많이 망설이다가 페이스북에 글을 올린 것이 시발점이 되어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동안 페북의 첫 글에 대한 여러 지적에 대해 종합적으로 한 번 더 글을 올려 마무리하려 했는데, 황용연 목사님이 에큐메니안에 의견을 올려주어서 세 번째 대화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번거로운 일이었지만 나름대로 서로 선을 지켜가면서 각자 입장과 관점을 정리했고, 한국교회를 사랑하는 주위의 여러분들이 관심 두고 지켜보면서 애정 어린 비판과 격려를 보내주셨습니다. 우리의 현실과 미래에 대해 함께 고민하는 계기가 되었다면 그것으로 우리의 대화는 어느 정도 결실했다고 스스로 위안해도 될 것 같습니다. 양쪽 세 번의 글을 그대로 실어주신 에큐메니안에도 감사의 마음을 드립니다.

2. 운동의 기본은 회원의 참여와 책임입니다

NCCK가 자기 신앙고백을 역사 안에서 펼치기 위해서는 먼저 NCCK를 구성하고 있는 회원(아홉 교단과 다섯 연합기관)이 선교에 주체적으로 참여하고 책임지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1995년부터 2007년까지 수원에서 목회하면서 사회선교를 지향했습니다. 처음에는 학부모운동으로 시작했는데 진행하다 보니 지역의 환경‧인권‧통일 운동 등에도 연대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운동은 대개 품앗이입니다).

시민운동에 깊이 관여할수록 목회의 우선순위가 교회에서 사회로 변경되었습니다. 감사하게도 교인들이 목회자의 사회 참여를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어느 순간 돌아보니 목회자 혼자 앞에서 활동하고 있고, 시간이나 여건상 열정적으로 동참할 수 없었던 교인들은 뒤에 떨어져 있었습니다. 이때 교회의 사회선교는 목회자가 교인들과 함께 동참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대중성의 발견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NCCK가 교회주의에 매몰되지 않으면서 역사 참여 신앙을 견지하고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 운동의 주체로 서기 위해서는 생명‧평화‧정의라는 세계교회의 보편적 선교 과제를 어떻게 회원 교단과 개 교회 그리고 각 기관을 통해 구체적으로 실천하는가가 최우선 과제입니다. 여기서 대중성이 중요해집니다.

아무리 중요한 가치라 해도 현장 교회와 기관이 받아들이고 동참하기 어려운 과제를 중심으로 NCCK가 움직인다면 그 운동은 선도적이기는 하지만 대중성은 상실하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1970년대 이후 NCCK의 정체성을 형성한 사회선교의 의제와 방식들이 회원의 일반적 정서와 얼마나 밀착했는지 또는 괴리되어 있는지 차갑게 검토해야 할 것입니다.

3.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과 자본은 운동의 두 바퀴입니다

독립운동이 목숨 걸고 싸우는 사람만으로는 불가능하고 먹고 움직이고 무기를 갖춰줘야 하듯이, 에큐메니컬 운동도 재정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뜻이 아무리 좋아도 물적 토대가 없으면 공허하고 물적 토대가 거대해도 뜻이 잘못되면 악마가 되기에 우리는 뜻과 힘의 통전을 추구합니다. 에큐메니컬 운동의 현장은 철저히 자본의 논리에 따라 움직이는 사회 구조 안에 놓여 있기에 재정 안정성이 운동의 지속성에 필수 요소 중 하나입니다.

하나님께 드린 헌금 사용에 대해서 헌금자는 이래라저래라 말하지 않는 것이 원칙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낸 사람과 사용하는 교회 사이에 신뢰 관계가 형성되어 있을 때만 가능합니다. 만약 제가 주님께 드린 헌금이 극우 태극기 부대 집회에 사용된다면 저는 항의할 것입니다. 아니면 교회를 떠나겠지요. 마찬가지로 교회가 에큐메니컬 운동에 재정 지원을 하려면 교인들이 NCCK의 선교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물론 NCCK가 제대로 했는데 일반 교회가 오해한 것도 있을 테고, 또 NCCK가 과거 운동 방식과 가치에 매몰되어 달라진 교회와 사회에 유연하지 못했던 불찰도 있음을 시인해야 할 것입니다. 그동안 일부라고 해도 NCCK의 핵심 교단 중에서 꾸준히 탈퇴 요구가 나온 사실에 대해 우리가 귀담아들어야 할 것은 없는지 차분하게 내적 성찰을 해야 할 시기입니다.

4. 사회과학의 이데올로기 편향성에 대한 문제제기입니다

저는 한신대 82학번이고 5.18 광주를 겪은 80년대는 분노와 혁명의 시대였습니다. 그리고 모순의 시대를 돌파하고 혁명을 실현하기 위해 날카롭게 벼른 도구가 사회과학이었습니다. 제 기억에 한신대는 83년쯤부터 본격적으로 마르크시즘이 학교에 물밀 듯이 들어왔습니다. 한신대는 그때 김수행‧정운영이라는 걸출한 전문가들을 정교수로 영입했습니다. 학부에서 대학원까지 캠퍼스는 정말 혁명의 전장이었고 사회과학이 범람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군목과 전역 후 일반 목회를 하면서도 한동안 사회과학을 체계적으로 공부하지 않은 것에 대해 콤플렉스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2000년쯤 되었을까, 어느 순간 사회과학의 콤플렉스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내가 사회과학을 제대로 공부하지 않은 것에 오히려 감사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사회과학을 열심히 공부한 분들이 지나치게 이념에 치우쳐 있고, 오히려 과학적이지 않을 때가 많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80년대는 군부독재와 투쟁해야 했고 그 이론적 무기로서 도입한 마르크스의 사회과학의 이데올로기를 학습하는데 온 열정을 다했습니다. 마르크시즘이라는 게 사실 그 내용 자체도 방대하고 어려워서 제대로 이해하기도 쉽지 않았고, 그 원리를 다시 우리나라 상황에서 그것도 분단모순과 계급모순이 두드러진 한반도 상황에서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가를 논의하는 것은 대단히 전문적이고 난해한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또 투쟁의 전략을 세우고 현장에 나가 싸워야 하는 일까지 해야 하니 복잡하고 힘겨웠습니다. 어쨌든 이 모든 작업은 사회과학의 이데올로기적 성격이 중심입니다. 80년대는 가치판단이 쉬웠습니다. 극복해야 할 대상이 명확했습니다. 우리 편과 적을 구분하기가 어렵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싸울까가 고민이었습니다.

절반의 승리인 김영삼 그리고 민주 정부인 김대중-노무현을 거쳐 문재인 정부에 이르기까지 사회과학으로 무장한 민주세력은 권력의 비판자에서 권력의 책임자를 몇 번 경험했습니다. 덕분에 우리 사회는 놀라울 정도로 곳곳에서 민주화가 진행되었습니다. 달라진 세상에서 당연히 민주 세력의 운동 방식도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사회개혁의 도구인 사회과학을 ‘이데올로기’에 치중해서 공부했기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5. 사회과학을 공부해야 하는 중요한 이유는 이데올로기뿐 아니라 과학적 방법‧태도를 익히는 것입니다

허위를 벗겨내고 참을 밝혀내기 위해서는 엄밀하고 객관적인 자세가 필수입니다. 80년대는 실체를 규명하려는 엄밀한 태도로서의 사회과학에 소홀했습니다. 그때는 선악의 구도가 명확했으니까, 참과 거짓을 굳이 논구하지 않아도 누구나 아는 것이었으니까! 그러나 이 구도가 적어도 김대중 정부 이후로는 근본적으로 달라졌는데 아직도 운동가들은 자신을 객관화시키는데 선뜻 응하지 않았습니다. 사회를 선과 악, 아군과 적군으로 나누고, 싸움의 전략을 세우는 데만 치중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구도에서는 상대를 악마화할수록 그 악에 적극적으로 대항하는 사람은 자동으로 선이 됩니다. 이런 운동에서는 자기 성찰이 들어설 자리가 없으며, 자기를 성찰하지 않는 운동은 기여와 함께 사회적으로 폐를 끼치게 됩니다. 저는 성남 지역의 운동가들 만나면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종교는 사회과학을 통해 현실을 분석하고 이해해야 하고, 사회개혁 운동은 종교를 통해 절대 앞에서 자기를 성찰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종교는 공허해지고 사회운동은 독단의 괴물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기독교 운동권이 우리 사회의 개혁을 위해 정말 소중한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늘 감사하고 미안한 마음입니다. 동시에 선악을 판단할 때 정말 사회과학적으로 엄밀하고 객관적인 태도로 검증 단계를 치열하게 거친 후 가치판단에 이르면 좋겠습니다. 토끼도 그릴 수 있고 호랑이도 그릴 수 있는 불과 몇 개의 혐의점을 가지고 너무 성급하게 자기 마음대로 형상을 그려놓고 이것이 확실하다고 주장한다면 실체를 잘못 파악하는 오류에 빠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회를 개혁하기 위해 꼭 필요한 사회과학은 이데올로기 측면만 아니라 지금은 진리를 파악하기 위한 태도로서 더 중요하게 활용되어야 합니다.

6. 청년의 현장 활동에 감사하지만 지금 청년은 조직 활동에 사활을 걸어야 합니다

청년은 한국교회와 에큐메니컬의 가까운 미래입니다. 그러기에 지금 우리가 청년 세대를 어떻게 세우느냐가 미래를 결정합니다. 청년이 해야 할 일이 아주 많습니다. 그렇다고 다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선순위를 정해야 합니다. 에큐메니컬 청년의 첫 과제는 무너진 조직을 재건하는 일입니다.

EYCK나 KSCF의 현재를 보면, 과거의 영광을 뒤로 한 채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생존하는 것 같습니다. 회원 교단 청년연합회의 연대체인 EYCK는 교단 청년연합이 무너지면 직격탄을 맞습니다. 현재 장청은 사라졌고 감청은 비 에큐메니컬 교회 청년들이 장악했습니다. 그나마 조금 낫다는 기청도 겨우겨우 지탱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교단 청년연합회를 이루는 지역(노회/연회) 연합회가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NCCK나 각 교단은 청년을 살리기 위해 거의 모든 위원회에 청년 위원을 할당합니다. ‘청년예수(EYCK 소식지)’에 실은 기청 총무의 활동을 보면 대부분 회의 참여입니다. 실무자는 겨우 2~3명인데 참석해야 할 회의는 엄청 많습니다. 이런 형태로 활동하면 청년 조직은 살아나기 어렵습니다.

EYCK는 현재의 활동에서 회원 교단 청년회의 재건과 강화를 위해 절반 이상의 에너지를 집중해야 합니다. NCCK 총무를 괴롭히고(?) 각 교단 총무를 찾아가 교단 청년연합회의 활성화를 위해 부탁하고 요청해야 합니다. 각 교단 청년연합회는 교단 총무와 각 노회(연회)를 방문하여 목사‧장로들을 만나 오해를 풀고 도움을 요청하고, 지역의 청년 행사에 참여하고 청년들에게 청년연합회의 중요성과 의미를 설명하면서 연대체 구성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참석하고 있는 위원회 회의를 반으로 줄여야 합니다. 아주 빠지면 안 되니 양해를 구해도 되는 회의는 빠지고 그 시간에 조직 재건을 위해 일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조직 재건은 불가능합니다.

현재 에큐메니컬 운동에서 청년이 땀 흘려야 할 첫째 바닥은 바로 교단‧지역‧개교회의 청년입니다. 노회(연회) 청년연합이 결성되고 교단 청년연합회가 살아나면 EYCK는 자연스럽게 든든해지고 에큐메니컬의 밝은 미래를 구상할 수 있습니다. 교단 청년연합회가 든든해지면 거기서 사람과 재정을 안정되게 지원할 수 있게 됩니다. 이를 위해서 NCCK, 각 교단과 연합기관, 그리고 개 교회는 무엇을 해야 할지 연구해서 아주 구체적으로 도움을 요청하고 설득하는 일에 모든 에너지를 투여해야 합니다. 

7. NCCK와 에큐메니컬 운동의 위기는 곧 우리 내부에서 연구와 토론이 사라졌다는 것에 기인합니다. 프로그램 위원회‧실행위원회‧총회‧정책협의회‧세대간소통 등이 오래전부터 역동성을 잃었습니다. 자꾸 모여서 현실을 진단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자리가 다양할수록 우리의 미래는 조금 더 밝아올 것입니다. 예상하지 않은 이번 대화가 그런 움직임에 조금이나마 긍정적으로 이바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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